입력 : 2017.08.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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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대전쟁의 전환점

스탈린그라드 전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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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직후인 12월 초 도심을 순찰하는 독일군. 아직까지도 위기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왕성 작전

1942년 11월 19일 오전 7시 30분, 4,000여 문의 화포와 다연장로켓이 일제히 불을 뿜으면서 소련이 준비한 회심의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었다. 포탄이 루마니아 제3군 진지에 정확히 떨어지면서 발생한 엄청난 폭발음은 제2차 대전의 균형추를 드디어 소련 측으로 기울게 만든 시발점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었다. 혼비백산한 루마니아군이 뒤로 물러나자 멀리서 대규모의 소련군 보병과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련군의 대대적인 포격을 신호탄으로 천왕성 작전이 시작되었다.

새롭게 편성된 소련 남서전선군은 얼어있는 돈 강 지류를 건너 루마니아군 진지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루마니아군은 제대로 교전도 못해보고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하자 소련의 대규모 추격부대가 그 뒤를 쫓았다. 그로부터 사흘 후에 5개 군단으로 구성되었던 루마니아 제3군은 지구 상에서 종적을 감추었고 극히 일부만이 소련군의 추격을 벗어나 겨우 외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소련군의 목적은 약체인 루마니아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속도를 더해 칼라치나도누(Kalach-na-Donu)를 향한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 제6군의 좌익에 위치한 루마니아 제3군이 무너지기 시작한 다음 날, 남쪽에서 독일 제6군의 우익을 담당하던 루마니아 제4군과 독일 제4기갑군이 소련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동시다발적인 대규모 공격을 받았다. 상황은 전날 루마니아 제3군의 경우와 같았다.

남북에서 진격을 개시한 소련군이 11월 22일 합류에 성공하면서 스탈린그라드에 몰려있던 독일군을 완벽히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루마니아 제4군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독일의 최정예인 제4기갑군은 양단되어 버렸다. 불과 나흘 만인 11월 22일, 북쪽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무너뜨리고 남으로 진격하던 남서전선군과 남쪽에서 제4기갑군과 루마니아 제4군을 붕괴시키고 북으로 진격 중이던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이 칼라치나도누에서 마침내 조우했다. 이 두 부대의 만남은 독소전쟁, 아니 제2차 대전의 흐름이 바뀌게 되는 전환점이었다.


그물 안에 갇힌 대어

바로 이전까지만 해도 독일 제6군이 격렬하게 저항하던 소련 제62군을 분쇄하고 스탈린그라드를 완전히 장악한 듯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등장한 엄청난 규모의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모든 독일군을 순식간에 가두어 버렸다. 이때까지도 STAVKA는 약 8만 정도의 독일군을 가둔 것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물에 걸린 먹이는 제6군, 제4기갑군 대부분, 루마니아군 일부 부대 등 모두 25개 사단 총 33만에 달했다.

지금까지 소련군을 몰아붙였다고 생각한 독일군은 순식간에 포위당해 적진에 고립되었다.

이 무시무시한 포위망을 탈출한 것은 제4기갑군 일부와 루마니아 제4군 일부, 그리고 처음부터 포위망 밖에 있었던 이탈리아 제8군과 헝가리 제2군 정도였다. 한마디로 독일 B집단군이 와해될 정도의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스탈린그라드를 반드시 접수하겠다고 발악하는 히틀러의 광기로 인해 엄청난 대군이 그 좁은 폐허의 도시로 집중되면서 벌어진 최악의 참사였다.

변화에 즉시 반응하는 기민함을 보였던 독일군의 장점은 전쟁이 장기화되고 히틀러의 아집이 더해지면서 어느덧 사라졌다. 총통의 아집을 말리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전임 참모총장 할더의 퇴장을 마지막으로 군부에서 히틀러의 폭주를 제지할 이는 더 이상 아무도 없었다. 결국 좌우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전력을 스탈린그라드 한곳에 지나치게 투입한 데다 소련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우마저 범했던 것이다.

그런데 독일은 이 시점에서도 상황을 오판하고 있었다. 고립된 독일군은 포위망을 뚫고 밖으로 탈출해야 했는데, 그들을 포위한 소련군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면서 포위망 밖의 B집단군 잔여 부대와 포위망 안의 독일군이 협공한다면 오히려 소련군을 격멸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직도 독일은 소련을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은 독일처럼 스탈린그라드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생각이 없었다.


사수냐 후퇴냐

소련은 주력을 서남쪽으로 돌려 스탈린그라드 외곽의 독일 B집단군 잔여 부대를 로스토프 방향으로 힘껏 밀어붙였다.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독일군을 최대한 전선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스탈린그라드를 제21, 24, 57, 62, 64, 65, 66군의 7개 군으로 이중 삼중 깊게 에워쌌다. 그들은 서둘러 도심으로 들어가지 않고 독일군을 서서히 말려 죽이려 했다.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를 고립시킨 후 전선을 서쪽으로 밀어붙여 간극을 넓혔다.

스탈린그라드 도심에 고립된 독일군은 보급로가 봉쇄되었다. 소련 제62군은 피로 지켜낸 볼가 강 교두보가 있어 도심에서 생존이 가능했던 반면, 고립된 독일 제6군은 당장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하늘 밖에 없었다. 또한 소련이 B집단군 잔여 부대를 로스토프까지 완전히 몰아낸다면 코카서스로 깊숙이 내려가 있던 독일 A집단군을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고립시켜 스탈린그라드와 맞먹는 또 하나의 대어를 낚을 여지도 있었다.

이제 독일에게는 재빠른 상황 판단이 필요했다. 이것은 스탈린그라드만이 아니라 독소전선 전체의 문제이기도 했다. OKH는 스탈린그라드를 끝까지 사수하느냐 아니면 후퇴하느냐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11월 23일, 제6군 사령관 파울루스는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서쪽으로 탈출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B집단군 사령관 바익스도 제6군이 서쪽으로 치고 나오면 B집단군을 동쪽으로 진격시켜 탈출로를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명석한 참모였으나 성격이 우유부단해 지휘관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은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독일이 당한 대참사의 주인공 중 하나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파울루스와 바익스는 비록 스탈린그라드가 포위당했지만 현재의 전력이면 충분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던 것이고, 사실 그런 생각이 옳았다. 현지 야전 지휘부의 생각이 그러하자 OKH도 후퇴가 타당하다고 생각해 히틀러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물론 코카서스로 깊숙이 내려간 A집단군의 철수와 연계해 속도를 조절해야 했지만 그 부분은 자신이 있었다. 군부는 이번만큼은 총통이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낙관으로 인한 오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일 이곳이 스탈린그라드가 아니라 차리친이었다면 OKH의 요청에 히틀러도 마지못해 동의했을지 몰랐다. 아니 이 정도가 될 때까지 이전투구를 벌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예를 들어 군부에서 점령을 주장했던 북부의 레닌그라드 같은 경우는 스탈린그라드와 정반대로 결정적인 시기에 히틀러가 도심 진입을 저지하고 외곽에서 봉쇄만 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었다.

히틀러가 고민에 빠져있을 때 괴링이 공중 보급을 제안했다. <출처: Bundesarchiv>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이제 막 차지했는데, 바로 뒤돌아서 나오려니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고민하자 나치의 2인자이자 공군 총사령관인 괴링(Hermann Goring)이 나섰다.

“총통 각하! 저희 루프트바페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제6군에게 충분한 물자를 공급하여 현지를 사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다.”

이에 히틀러는 공군이 보급을 유지해주면 스탈린그라드를 계속 차지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사이에 제6군을 구하면 된다고 보았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직접 명령을 하달했다.

“현재 전선을 사수하라. 보급은 공중으로 하며 곧바로 구원 부대를 보낼 것이다.”

문제는 이때까지도 히틀러가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자기 입맛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독일 공군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고, 사실상 당장 보낼 수 있는 구원 부대도 없었다. 물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준비를 갖출 수도 있었겠지만, 스탈린그라드의 상황은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 전투에서 접하게 될 소련군은 지난 1년간 독일이 상대했던 덩치만 커다란 허접한 군대가 아니었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주력 수송기였던 Ju 52. 히틀러가 결심한 이상 이들이 생명선이 되어야 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그런데 괴링의 허풍을 누구보다 잘 알던 히틀러가 처음부터 그의 공중 보급 주장을 무조건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약간의 감추어진 뒷이야기가 있다. 히틀러는 작전을 실제로 기안한 담당자인 예쇼네크(Hans Jeschonnek) 공군 참모총장을 따로 불러 가능성을 진지하게 물어보았었다. 단독 면담 중에 예쇼네크는 몇 가지 단서를 달았지만 하루 300톤 정도의 공중 보급은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이 말은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