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8.2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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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대전쟁의 전환점

스탈린그라드 전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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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은 도심으로 진입을 서둘지 않고 최대한 전선을 분리시켜 포위망을 더욱 강화했다.

비관과 낙관 사이

히틀러는 예쇼네크의 답변에 고무되었으나 최대 300톤의 공수 능력과 단기간 동안이라는 제약을 간과했다. 고립된 제6군이 충분한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한 하루 보급량은 1,500톤인데, 이것을 줄이고 줄여 필수 불가결한 요소만 보급한다 해도 적어도 하루 750톤이 필요했다. 때문에 300톤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양이었고 그나마 당시 루프트바페의 능력으로는 한 달 이상의 공수를 지속하기도 불가능했다.

식사 중인 제94사단 병사들. 히틀러의 망상과 달리 탄약과 식량을 비롯한 각종 보급품의 부족으로 고통을 받았다.

더구나 이제부터 겨울이었고 러시아 평원의 혹한은 공군의 공수 작전을 방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결국 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실제로 이루어진 최대 보급량은 400톤이었고, 평균적으로는 불과 100톤 내외였다. 결론적으로 포위 직후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제6군을 지원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히틀러는 솔깃한 의견에 마음이 쏠려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임무를 수행할 제4항공군 사령관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은 후방의 참모들이 책상머리에 앉아 기안한 작전이라고 반발했다. 그는 300톤 정도도 실제로 공수하려면 스탈린그라드 내에 야간 이착륙이 가능한 비행장이 최소 6개는 확보되어야 하고 가동률을 고려해 800기의 수송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비행장도 부족하고 야간 관제시설도 전무했으며 일대에 작전 중인 모든 수송기를 동원해도 500여 기 정도에 불과했다.

즉각 공수작전이 개시되었으나 당시 독일 공군의 능력으로는 상당히 과한 임무였다. 곧바로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육군도 신임 참모총장 자이츨러(Kurt Zeitzler), B집단군 사령관 바익스 등이 제6군의 현지 사수를 반대했다. 그렇지만 모든 수뇌부가 히틀러나 괴링의 의견에 반기를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괴링의 주장을 믿었기에 오판을 한 것이기는 했지만 제11군 사령관 만슈타인도 이들이 시간을 벌어주면 포위망을 격파하고 제6군과 다시 연결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는 등 상황을 긍정적으로 본 이들도 있었다.


오로지 현지 사수

이처럼 의견이 갈렸던 이유는 지난 봄에 데미얀스크(Demyansk) 일대에 고립되었던 제2군단을 공중 보급으로 구원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 포위된 33만은 데미얀스크에서 고군분투하던 10만보다 무려 3배나 많은 규모였다. 더구나 고립된 데미얀스크 포켓은 북부집단군 본진과의 거리가 10여 km 정도여서 마음만 먹는다면 연결할 가능성이 충분했고, 실제로 양쪽에서 돌파를 시도해 포위망을 풀었었다.

12월 초만 하더라도 전투력이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어 마음만 먹으면 포위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엄명으로 현지를 사수해야 했다.

11월 24일의 시점에서는 고립된 독일군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 것이 백번 옳았다. 비록 양익의 루마니아 제3, 4군이 붕괴되었지만 아직까지 주력인 제6군과 제4기갑군의 전투력은 대부분 보존되어 있었기에,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돌파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아마도 히틀러가 후퇴를 승인했다면 한국전쟁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의 장진호 전투처럼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전사에 길이 빛날 후퇴전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현지 사수를 명했고 이로써 불행이 시작되었다. 괴링의 호언장담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하루 300톤을 넘기기 힘든 데다 본격적인 12월의 겨울로 접어들고 비행장이 소련군에 하나하나 접수될 때마다 보급량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결국 폭격기까지 동원한 공중투하로 변칙적인 보급도 실시했지만 소련군 진지에 떨어져 남 좋은 일을 시키거나 망실되는 경우가 많았다.

겨울 혹한으로 공수 능력이 악화되면서 전투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파울루스는 사수는 하겠지만 만일 탈출해야 할 경우 서남쪽으로 전선을 돌파할 수 있도록 총통에게 재량권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보급을 해주겠다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만 반복하고 그 외의 모든 요구를 거부했다. 히틀러의 명령은 오로지 스탈린그라드의 현지 사수였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를 첩첩이 포위한 소련군은 막대한 포격을 앞세워 조금씩 안으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구원투수 만슈타인

그런데 제6군이 이처럼 제대로 도움도 못 받고 포위망 안에서 고군분투할 때 이들을 구할 구원군이 없었다는 점이 사실 독일에게는 더 큰 문제였다. 구조상 B집단군이 나서야 했지만 주력부대의 대부분을 상실한 B집단군은 사령부만 있을 뿐 휘하에 변변한 전투부대 하나 없는 서류상의 부대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구원은커녕 소련 남부전선군의 공세에 계속 서쪽으로 밀려나기 급급했다.

애당초 남부집단군을 A, B집단군으로 분리했을 때만 해도 A집단군이 최종 목표인 코카서스를 제압하는 동안 B집단군은 돈 강에서 볼가 강 연안에 이르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 임무였다. 하지만 작전 도중 주객이 전도되어 스탈린그라드에 집착하게 되면서 모든 것이 틀어졌다. 결국 이 상태에서 B집단군의 잔여 전력마저 붕괴된다면 코카서스 깊숙이 남진한 A집단군마저 고립될 위기에 처할 상황이었다.

히틀러의 고집으로 제6군이 현지 사수에 나선 이상 유일한 타개책은 다시 스탈린그라드 부근의 볼가 강까지 진격해 전선을 연결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히틀러는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기존의 A, B집단군과 별개로 1942년 11월 21일, 새로이 돈 집단군(Heeresgruppe Don)을 창설해 크림 반도 전투의 영웅이자 소련군에게 저승사자로 불린 만슈타인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한창 재편 중이던 제11군을 근간으로 돈 집단군을 창설하고 만슈타인에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제6군을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제11군 사령부를 기반으로 긴급하게 조직된 돈 집단군은 명칭에 걸맞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었다. 서류상에 편제된 예하부대에는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제6군, 제4기갑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구출 작전에 투입 가능한 부대는 제48장갑군단 일부와 저 멀리 프랑스에서 긴급 이동 전개한 제6전차사단, 중부집단군에서 차출된 제17전차사단, 인근 A집단군에서 배속을 변경한 제23전차사단 정도 밖에 없었다.


그래도 지체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여타 부대들이 적극적으로 양동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현지를 사수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서쪽으로 치고 나와야 동진하는 돈 집단군과 연결될 수 있었지만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생각이 없던 히틀러는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만슈타인은 3개 전차사단을 근간으로 편성된 선봉부대를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호트 기갑집단(Hoth's Panzer Group)으로 칭했다.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있다가 대부분의 예하부대를 포위망 속에 남겨둔 채 간신히 지옥을 빠져나온 호트는 보복전의 선봉대장으로서 중책을 부여받았다. 돈 집단군의 또 하나의 주먹은 제48장갑군단 예하부대들을 근간으로 긴급 창설된 홀리트 파견군(Armeeabteilung Hollidt)이었다.

돈 집단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않은 데다 혹한의 날씨임에도 지체 없이 구출 작전에 돌입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결국 말만 집단군이지 실제로 구원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전력은 이들 군단급 2개 부대를 제외하곤 없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여타 부대들이 적극적으로 양동작전을 펼치지 못하고 현지를 사수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이들이 서쪽으로 치고 나와도 동진하는 돈 집단군과 연결이 될까 말까 한 상황이었지만 한번 차지한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할 생각이 없던 히틀러가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리 만슈타인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4개 전차군이 주축인 소련의 남서전선군을 격파한 뒤 돌파구를 뚫고 100여 km를 전진해 첩첩이 포위된 도시에 갇혀 있는 제6군을 구출하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임무였다. 그렇다 해도 망설일 수는 없었다. 만일 돈 집단군이 작전을 지체한다면 제6군뿐 아니라 코카서스에서 로스토프 방향으로 후퇴해야 할 A집단군의 퇴로마저 차단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 집단군의 구출 작전이 늦어지면 코카서스로 깊숙이 남하한 A집단군의 퇴로가 차단될 수도 있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만슈타인은 설욕을 벼르고 있는 호트의 선전에 기대를 걸었다. 이 작전의 선봉이 될 호트 기갑집단의 지휘관 호트는 만슈타인과 절친한 사이이자 독일에서 손꼽히는 기동전의 대가로 파파(Papa)라고 불릴 만큼 부하들의 신망이 높았다. 호트가 지휘하는 3개의 전차사단을 선봉으로 내세운 돈 집단군은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제6군을 구출하기 위해 12월 11일 전선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갔다. 바로 겨울폭풍 작전(Operation Winter Storm)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