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7.1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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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대전쟁의 전환점

스탈린그라드 전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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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네시 시가지로 진입하는 독일 제4기갑군 소속 3호 전차 <출처: Bundesarchiv>

보로네시에서의 전초전

소련은 독일의 진격을 막기 위해 격렬히 저항했다. 방어에 나선 소련 남서전선군 사령관 바투틴(Nikolai Vatutin)은 깊게 파둔 참호를 발판으로 독일의 공격을 저지했고 3개 전차군단을 독일 제4기갑군과 정면충돌시키는 격렬한 소모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의 명장 중 한 명인 호트(Hermann Hoth)가 지휘하는 제4기갑군은 악전고투 끝에 7월 7일 돈 강을 건너 보로네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구데리안과 환담 중인 헤르만 호트(우). 파파(Papa)라는 애칭으로 불릴 만큼 부하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기갑전의 대가 중 하나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여담으로 이때 격전을 펼친 호트와 비투틴은 개전 당시부터 인연이 있던 사이였다. 지난 1941년 제3기갑집단(Panzergruppe 3)을 이끌던 호트가 독일 증부집단군의 선봉장을 자임하며 모스크바로 향하였을 때, 노브고로드(Novgorod) 일대에서 바투틴이 참모장으로 있던 소련 북서전선군(Northwestern Front)과 부딪힌 적이 있었다. 그러했던 그들이 약 1년이 지난 후 남부에서 칼을 섞었던 것이고 이후에도 여러 번 거대한 전투의 승패를 놓고 승부를 펼치는 악연을 이어갔다.

이렇게 소련군은 약 열흘간의 격전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둔화시키는 데 일단 성공했지만 대신 도심을 내주면서 37만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다. 남서전선군은 지난 제2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은 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그 이상의 피해를 다시 입은 것이었다. 결국 바투틴은 브리얀스크 전선군이 엄호하는 틈을 타서 잔여 부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철수에 나섰다. 스탈린도 더 이상 후퇴를 제지하지 않았다.

원래 제4기갑군은 보로네시를 점령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코카서스를 향해 남진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예상보다 손실이 커서 일단 멈추고 부대 재편에 착수해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북쪽에 위치한 브리얀스크 전선군의 행태가 심상치 않아 이들을 견제하는 데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결국 이 때문에 청색 작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제4기갑군은 7월 13일까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다시 해임된 사령관

보크는 만일 브리얀스크 전선군이 남하하면 어렵게 개척한 통로가 위험할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던 남서전선군의 잔여 부대를 추격해 섬멸해야 했다. 결국 그는 제4기갑군을 대신해 우측에서 진격하던 제6군에게 추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기동력이 떨어지는 제6군과 소련군의 간격이 이미 많이 벌어진 뒤여서 바투틴은 대부분의 중장비를 보존한 상태로 7월 24일에 이르러 안전지대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작전을 구상 중인 니콜라이 바투틴.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추격을 뿌리치고 소련 남서전선군을 후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결과를 보고받은 히틀러는 격노했다. 진격 시간이 지체된 것보다 대어를 그대로 놓쳤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었다. 남부집단군은 진격을 개시한 지 한 달 동안 보로네시 일대에서만 57만여 명의 소련군을 붕괴시키고 상당수의 각종 장비를 노획, 격파했지만 히틀러는 이 정도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한 나머지 50여만의 소련군만 보였던 것이다.

모든 비난은 남부집단군 사령관에게 집중되었고 결국 보크 원수는 일선으로 복귀한 지 6개월 만에 다시 해임되어 군복을 벗었다. 히틀러는 이후 스탈린그라드의 참사를 포함한 일대의 모든 나쁜 결과들을 보크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며 두고두고 비난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일 육군 총사령관인 본인의 책임이었지만 히틀러에게 나쁜 결과는 모두 남의 탓에 불과했다.

히틀러 사진 아래서 집무 중인 페도르 폰 보크. 스탈린그라드 전투 직전에 두 번째로 해임되어 야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보크가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소모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당시 독일의 능력으로는 남쪽 깊숙이 위치한 코카서스로 주력 부대를 남하시키는 전략이 올바르다고 보기는 힘들었지만 이왕 그렇게 결정했다면 보로네시에서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이지만 소련은 보로네시를 모스크바를 지키는 남쪽의 외곽 방어선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독일은 우회해서 진격해도 무방했다.


분리된 남부집단군

보크를 해임한 히틀러는 청색 작전 개시 한 달 만에 대대적인 부대 재편에 착수했다. 남부집단군을 전격 해체하여 A, B집단군으로 분리한 것이었다. 그동안 아조프 해(Sea of Azov) 연안에서 작전을 펼쳐온 제1기갑군, 제11, 17군을 주축으로 새롭게 창설된 A집단군(Heeresgruppe A)은 리스트(Wilhelm List)의 지휘하에 이번 공세의 최종 목표인 코카서스로 진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남부집단군은 A, B집단군으로 나뉘어 코카서스와 볼가 강을 향해 진격하기로 결정되었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제4기갑군, 제2, 6군을 근간으로 편성되어 바익스(Maximilian von Weichs)가 사령관으로 부임한 B집단군(Heeresgruppe B)은 전선을 볼가(Volga) 강까지 밀어붙여 A집단군의 원활한 남진을 위한 통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처음과 비교해 부대가 둘로 나뉜 점만 제외하면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이번 공세를 앞두고 대폭 증강된 남부집단군의 규모와 임무를 감안할 때 이는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당시의 통신이나 교통 사정을 고려할 때 동맹국 군대를 포함해 10여 개의 야전군으로 구성된 150여만의 병력을 한 개 사령부에서 지휘하기엔 벅찼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현장 지휘관의 융통성을 최대한 담보한 독일군 특유의 임무형 지휘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조직이 합리적으로 재편된 것처럼 보였지만 지난 모스크바 전투를 기점으로 히틀러의 간섭이 너무 세세한 부분까지 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야전에서 작전을 검토하는 히틀러. 이제 군부에서 그의 독주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히틀러는 부대를 재편한 후 육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이번 공세를 직접 지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작전 수립은 물론 시행과 관련한 세세한 사항까지 일일이 간섭을 했다. 참모총장 할더가 일기에 총통 때문에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이렇게 조직을 재편하고 지휘 전면에 나선 히틀러는 총통 명령 제43, 44, 45호를 연달아 하달하면서 진격을 독려했다.


의도를 알아챈 소련

7월 24일, 제17군이 코카서스로 향하는 초입에 위치한 로스토프(Rostov-on-Don)를 재점령했다. 이곳은 지난 해 겨울 소련군이 탈환하면서 독소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둔 장소였다. 엄밀히 말해 독일이 전략상 점령을 포기한 것이었지만 패배는 패배였기에 이곳의 재점령은 독일이 다시 공세로 나섰다는 방증과도 같았다. 이제 STAVKA도 이번 독일의 공세 목표는 모스크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코카서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로스토프 도심에서 격파된 소련군 KV-1 전차. 독일은 지난 겨울 소련에게 빼앗긴 이 도시를 재점령했다.

상황을 보고받은 스탈린도 코카서스의 중요성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 지역을 빼앗긴다면 소련은 핵심인 우랄(Ural) 산맥 서쪽의 러시아 평원 전체를 독일에게 내주고 시베리아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공간도 마구 내줄 만큼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동원 능력을 가진 나라였지만 우랄 산맥 동쪽으로 물러서게 된다면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힘을 잃을 수도 있었다.

우선 석유와 식량의 확보가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 볼가 강의 수운과 철도망이 단절되면 모스크바가 자연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는 비록 넓고 자원도 많은 땅이지만 인구가 적고 교통도 나빠 전쟁 수행에 있어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우랄 산맥 서쪽의 러시아 평원을 뺀다면 소련이라는 국가는 팥 없는 단팥빵 신세가 되어버릴 수 있기에, 이 생명줄을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볼가 강 서안에 위치한 볼고그라드(스탈린그라드)의 최근 위성사진. 철도망과 수운이 사통팔달로 연결된 교통의 요지다.

스탈린이나 STAVKA도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분명히 이전에 수시로 남발하던 무조건 사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낼 지점으로 스탈린그라드(현재의 볼고그라드)를 주목했다. 남부 러시아의 최대 요충지로 제정 러시아 시대에 차리친(Tsaritsyn)이라 불린 이 도시는 내전 당시 백군(白軍)에 포위당한 적군(赤軍)이 끝까지 사수하면서 공산혁명을 완수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