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7.07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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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대전쟁의 전환점

스탈린그라드 전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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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 최대, 최악의 격전 중 하나였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상징 발마레 분수. 악어 주위에서 춤추는 어린이들의 조각상이다. <출처: (cc) Kremlin.ru at Wikimedia.org>



시선을 남쪽으로 돌린 히틀러

1940년 6월 23일 파리 앵발리드 지하의 나폴레옹 묘를 방문한 히틀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그도 소련 원정에 실패하며 몰락했다.

1941년 12월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하고 전선이 정체되자 히틀러는 나폴레옹의 망령을 떠올렸다. 150년 전 유럽 대륙을 정복하고 기세등등하게 러시아 원정에 나섰지만, 적의 초토화 작전에 말려 결국 패퇴한 황제의 비참했던 말로를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히틀러는 정치적인 목표인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보다 좀 더 현실적인 가치가 큰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소련 남부에 위치한 코카서스(Caucasus) 지역의 광대한 유전과 곡창이었다. 독일이 북극곰의 생명줄과 다름없는 이곳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소련의 저항 의지를 쉽게 꺾어 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거대한 자원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어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전쟁 이전부터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와 이곳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보고 있었다.

비록 바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수립할 당시에 군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모스크바를 주공 목표로 삼았지만, 히틀러는 전선 남부에 위치한 엄청난 보물 창고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한 번 쓴맛을 본 후 이곳에서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으려는 총통의 결심에 따라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청색 작전(Fall Blau)으로 명명한 1942년 여름 공세의 계획을 입안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친 독일군은 1942년 6월 28일, 지금까지 소련군과 대치하고 있던 돈(Don) 강을 넘어 쾌속의 진군을 개시했다. 청색 작전의 초기 돌격은 1년 전 독소전쟁 개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히틀러의 꿈은 결국 나폴레옹의 전철을 능가하는 처절한 피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바로 독소전쟁의 흐름을 극적으로 바꾼 전환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다.



되살아난 패전의 기억

독소전쟁은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들 만큼 워낙 규모가 커서 대개 중요한 전역이나 전투별로 나누어 살펴보게 된다. 그래서 종종 전투와 전투 사이에 공백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1945년 5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시도 총성이 멈춘 적은 없었다. 모스크바 전투 이후에도 르제프, 레닌그라드, 크림 반도 등지에서 연일 격전이 이어졌다. 이처럼 남북으로 2,000km에 이르는 전선 어디에서건 한시도 평화로운 곳이 없었다.

러시아 정교회 교회 인근에 주기 중인 독일 공군 Do 17 폭격기. 이처럼 독소전쟁 내내 한시도 평화로운 곳이 없었다.

양측 합쳐 약 800만의 대군이 팽팽히 맞선 1942년 봄이 되자, 전쟁이 흔한 일상이 되어버린 형국이었다. 전쟁사를 살펴볼 때 기습에 나선 공격자의 진격이 멈추고 전선이 급속도로 정체되면 지구전으로 빠져들곤 했다. 이때부터는 엄청난 소모전을 감당할 수 있는 쪽이 결국 승리하거나 유리한 위치에서 정전을 하게 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지난 제1차 대전 당시의 서부전선이었다.

당시 독일은 소련과 프랑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패했다. 물론 계속 싸울 기력이 없어 먼저 수건을 던진 것이었지만 적어도 종전 당시의 전선만 놓고 본다면 독일이 패했다고 보긴 힘든 모양새였다. 그런 상태에서 패전을 강요당한 기분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던 독일에게 현재의 정체된 전선은 몹시 불편했다. 겉으로는 말을 삼가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물론 독일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진지에서 쪽잠을 자는 소련군 병사들. 독일의 진격이 멈추자 곳곳에 깊게 참호가 파이면서 전선이 정체되었다. 독일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독일은 영국 공략을 포기하고 북아프리카에서 부수적인 전선을 구축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양면 전쟁이라 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또한 여전히 전선의 주도권을 잡고 베를린에서 최소 1,500km 떨어진 소련 땅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바바로사 작전이 좌절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장기전으로 빠져들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했다. 당연히 이를 타개할 대책이 요구되고 있었다. 다만 어디로,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사병화가 된 독일 군부

1941년 독일은 일거에 소련을 제압하겠다고 주력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진격했지만, 예정된 곳까지 진격한 병단은 남부집단군(Heeresgruppe Süd) 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에 독일이 보여준 엄청난 전과에 전 세계가 경악했지만 엄밀히 말해 독일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최초에 작전을 입안한 마르크스(Erich Marcks)나 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의 생각대로 두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 독일의 능력으론 옳았는지도 모른다.

1942년 4월 PPSh-41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소련 소년병의 모습. 독일은 1년간의 경험을 통해 소련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깨달았다.

지난 1년 동안의 경험에서 뼈저리게 느꼈듯이 소련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더구나 새로운 공세의 준비를 전쟁이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해야 했지만 당시 독일의 동원 능력을 고려했을 때 물리적으로 상당히 어려움이 많았다. 사실 지난해 전황이 좋았을 당시에도 일선에서 요구하는 병력과 물자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당연히 1941년 여름처럼 다수의 장소에서 동시에 공세에 나서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소련에게 가장 큰 결정타를 날릴 수 있는 한 곳을 목표 지점으로 선정해야 했는데, 군부는 여전히 모스크바에 미련을 두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정치적인 상징성 때문에 이 도시를 노렸지만 지금은 소련군 정예 부대의 대부분이 이 일대에 몰려 있어서였다. 다시 말해 군사 전략상 충분히 승부수를 던져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언급한 것처럼 히틀러의 생각은 달랐다.

1942년 7월 16일, 청색 작전 도중 전방인 폴타바에 위치한 남부집단군 사령부를 방문해 지시를 내리는 히틀러. 코카서스 점령에 대한 그의 의지는 이처럼 대단했다.

이제 히틀러의 사병이 되어버린 독일 군부 내에서 총통의 명령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이는 없었고 그의 의지대로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일각에서 공세가 현재 시점에서는 무리이고 르제프 돌출부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묵살되었다. 1942년 4월 5일, 히틀러는 전군에 하달한 총통 명령 41호에서 ‘소련의 예비대가 완전히 고갈되었다’고 주장하며 오히려 자신의 의지를 더욱 구체화했다.



코카서스의 유전지대로

일차적으로 코카서스 산맥까지 남하해 바쿠(Baku)의 유전지대를 장악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종국적으로는 동맹 고려 대상인 터키와 이란과의 연결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남부집단군이 이러한 목표를 실현할 새로운 공세의 주공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개전 이후 지금까지 제 역할을 다해 준 제1기갑군과 제2, 6, 11, 17군, 루마니아 제3, 4군에 더해서 제4기갑군과 헝가리 제2군, 이탈리아 제8군이 새롭게 충원되었다.

독소전쟁 개전 당시 1개 군단 규모였던 이탈리아군은 청색 작전을 앞두고 3개 군단으로 구성된 제8군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 의미 있는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네이버 지식백과] 스탈린그라드 전투 [1] - 대전쟁의 전환점 (전쟁사)

특히 레닌그라드 전투와 모스크바 전투를 모두 경험한 제4기갑군의 배속 변경은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독일은 키예프 전투, 모스크바 전투의 예처럼 거대한 전투를 목전에 두고 주공으로 선정된 병단에게 기갑부대를 집중시켜 전력을 증강해 주곤 했다. 즉 제4기갑군의 이동은 이번 공세의 성격과 독일의 의지가 어떤 것인지를 상징하는 지표였다. 독일은 기습의 효과를 노려 부대의 전개와 증강을 은밀히 진행했다.

중부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된 지 한 달 만에 남부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페도르 폰 보크 원수. 그는 1941년에 이어 또다시 독일군 주공 부대를 지휘했다.

지휘는 보크(Fedor von Bock) 원수가 담당했다. 그는 바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의 주공인 중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가 모스크바 전투 패전의 책임을 지고 1941년 12월 해임되었던 인물이다. 그런데 남부집단군 사령관 라이헤나우(Walther von Reichenau)가 급서하자 한 달 만에 현역으로 다시 복귀해 후임 사령관이 되었고 1942년 공세에서 또다시 독일군의 주공을 담당하게 되었다.

보크는 북쪽에 제4기갑군과 제6군을, 남쪽에 제1기갑군과 제17군을 배치하여 전형적인 양익 포위 전술로 돈 강 일대에 배치된 소련 남서전선군(Southwestern Front)과 남부전선군(Southern Front)을 일거에 포위 섬멸할 생각이었다. 중앙에 배치된 제2군과 크림 반도 전투 종료 직후 전개가 예정된 제11군이 예비대 역할을 담당하고 전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루마니아, 헝가리, 이탈리아군이 측면을 연결하도록 지시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