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7월 13일, 히틀러는 치타델 작전(Operation Citadel)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쿠르스크(Kursk) 일대에서 독일과 소련이 벌인 건곤일척의 대결은 소련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거대한 전투 직후, 독일 제4기갑군 사령관 호트(Hermann Hoth)가 남부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에게 이른바 ‘벨고로트 리포트(Belgorod Report)’로 알려진 전황 보고서를 올렸다. 거기에는 독소전쟁을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적혀 있다.

“소련군은 1941년 이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군복만 입은 농민군이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전쟁의 기술을 배웠습니다.”

사실 독일의 극성기였던 1942년 여름까지도 외형적인 하드웨어에서 소련이 독일보다 열세였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래서 흔히 질적으로 독일의 무기가 앞섰기에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렇게 볼 수도 없다. 전쟁 개시 직후 등장한 T-34와 KV전차에 독일군이 당혹감을 느꼈을 만큼 소련의 무기 수준은 상당했다. 특히 보병들이 보유한 소화기는 동계 전투에서 독일제보다 더 좋은 성능을 발휘하고는 했다.

결론은 보고서대로 독일이 초기에 승리를 얻었던 것은 전쟁을 치르는 소프트웨어 때문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소련도 이를 습득하면서 독일의 이점은 사라졌고 결국 전쟁에서 패했다. 소련도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좋은 무기를 생산하고 사용하였지만 상당수는 이미 전쟁 훨씬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었고 1945년 베를린을 점령하는 그 순간까지도 사용하였다. 그중 하나가 데그챠레프 경기관총(Degtyaryov Machinegun-이하 DP)이다.

초기 기관총의 문제점

그전부터 있었지만 제1차 대전은 기관총이 그 위력을 여실히 보여준 결정적인 무대였다. 어쩌면 그것은 참호전이라는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었다. 1914년 9월 이후 양측 모두 참호를 깊게 파고 팽팽히 대치하자 전쟁의 방법은 오히려 단순해졌다. 공격하는 쪽은 대대적인 포격 후 함성을 지르며 상대편 진지로 돌격하는 것이고, 반면 방어하는 쪽은 사거리 내로 적이 진입하면 사격을 개시하여 막아내는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전차나 장갑차를 이용하여 공격에 나서겠지만 당시에는 보병이 뛰어서 상대편 진지까지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때 돌파의 주역이었던 기병은 쉽게 눈에 띄다 보니 오히려 저격당하기 좋은 목표물로 전락하였다. 설령 상대편 참호까지 살아서 다가갔어도 숨이 턱에까지 차와 이미 육체적으로 지쳐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맹렬히 뿜어대는 기관총의 화망을 피해서 공격을 계속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결국 많은 병사들이 외마디도 지르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이처럼 참호전은 예외 없이 공격자보다 기관총을 사용한 방어자의 화력이 강하였다. 일부 자동화 된 소총이나 기관단총이 보급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볼트액션식 소총으로 무장한 당시 보병들이 진지 속에 틀어박혀 기관총을 난사하며 방어하는 상대방을 제압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웠다. 이처럼 기관총은 방어에 나선 측이 절대 유리한 참호전의 총아로 군림하였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기관총의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기도 했다. 당시의 기관총은 진지에 거치하고 사용할 수밖에 없을 만큼 무거워서 들고 다니며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피아구분 없이 주력 기관총으로 사용한 맥심(Maxim) 같은 경우는 총 자체만도 30㎏ 가까이 되었는데, 그 중 러시아가 라이선스 생산하여 사용한 PM M1910은 60㎏가 넘었다. 당연히 일선에서 경량의 기관총을 원하는 목소리는 커갔다.

새로운 요구

쇼샤(Chauchat), 루이스(Lewis) 같은 탄창식 경기관총과 BAR같은 자동화기의 등장은 그래서 필연적이었다. 비록 이들도 오늘날 기준으로 본다면 무겁지만 당장 공격할 때 들고 다닐 수 있는 경량의 기관총이 필요하였던 당시에는 상당히 요긴하게 쓰였다. PM M1910 기관총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기관총의 효용성을 잘 알던 나라였으나 쓸만한 국산 경기관총이 없어 덴마크제 마드센(Madsen) 기관총 등을 사용하였다.

이후 혁명의 혼란기를 거치며 새로운 국가로 옷을 갈아입은 소련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하였지만 전쟁과 이후 벌어진 내전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혼란기를 극복한 소련은 1920년대 이후 새로운 무기의 생산과 도입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경기관총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다지 절박하지 않았다. 가장 커다란 이유는 지옥 같은 서부전선의 참호전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동부전선은 상대적으로 덜 고착되었기에 소련 군부는 PM M1910과 모신나강(Mosin-Nagant)의 조합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쟁국들이 새로운 소부대용 화기개발에 박차를 가하자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적어도 경쟁에서 뒤질 수 없다고 생각하여 휴대하기 편리하고 지속 사격이 가능한 기관총을 개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1926년, 데그챠레프(Vasily Degtyaryov)가 이끄는 설계국이 DP-26으로 명명 된 새로운 경기관총을 만들었다.

고심 끝에 선택한 탄창

소련식대로 개발자의 이름을 붙여 데그챠레프 경기관총 혹은 줄여서 DP라고 명명하였는데, 소련제 총기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단순한 구조여서 생산 및 유지보수가 편리하고 내구성이 좋았다. 제2차 대전 당시 사용된 PPD-40 기관단총, DK 중기관총, DS-39 중기관총, PTRD 대물저격총 등의 개발을 주도한 데그챠레프는 총의 기계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용도에 대해서도 잘 알던 뛰어난 엔지니어였다.

경기관총은 휴대가 편리하도록 탄창식으로 제작하는 것이 효율적인데, 문제는 탄띠 식에 비해 충분한 화력 투사가 어렵다는 점이다. 장탄량을 늘리려 탄창을 길게 하려면 이른바 바나나 모양으로 만들어야 했으나 탄이 자주 걸리고는 했다. 보통 소총처럼 하부에 탄창을 장착하면 눕거나 진지에 거치하고 사격하기가 불편하고 ZB-26이나 마드센 기관총처럼 상부에 꽂으면 사수가 목표물 조준하는데 불편하다는 단점이 있다.

이에 데그챠레프는 루이스 기관총처럼 모두 47발을 장착할 수 있는 쟁반 모양의 대용량 드럼 탄창을 채택하였다. 사격을 하게 되면 탄을 약실에 공급하기 위해 탄창 커버가 축을 따라서 회전하는데, 마치 그 모양이 전축과 유사하다고 하여 탄창을 흔히 ‘레코드 플레이어’라고 불렀다. 실험용인 DP-26을 개량한 모델이 DP-28인데, 소련 군부가 정식 채택하면서 양산에 들어갔고 흔히 DP는 이를 의미한다.

그래도 역사를 장식한 기관총

사실 제2차 대전이 발발하였을 당시에 DP는 이미 구형이어서 독일의 MG34나 MG42에 비한다면 성능이 매우 부족하였다. 특히 고심 끝에 선택한 쟁반 모양의 탄창이 탄환을 재장전하는데 상당히 불편한 구조여서 의외로 지속 사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따라서 미리 장전한 탄창을 여러 개 가지고 다녀야 했는데, 이는 탄띠 급탄식이 오히려 편리하다는 뜻이었고 결국 탄띠를 사용하는 RP-46으로 개조가 되기에까지 이르렀다.

경기관총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10㎏이 가까이 되는 무게도 문제였다. MG42나 M60 같은 다목적 기관총과 비슷한 무게이면서도 성능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운용에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적어도 야전에서의 신뢰성에 대해서만큼은 이의를 달지 못할 만큼 좋아 소련군 보병의 든든한 지원 화기로 귀하게 사용되었다. 사실 제2차 대전 당시에 소련에게 DP를 대신할 다른 선택도 없었다.

결국 전쟁 초반에 어려운 시기에 굴욕도 함께 겪었지만 DP는 베를린 전투에서도 사용되며 가장 커다란 전쟁에서 승리한 기관총이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파생형, 개량형을 포함하여 약 80만 여정이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2차 대전을 상징하였던 MG42가 40여 만 정 생산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상당한 양임을 알 수 있다. 종전 후에는 친소 국가에 공급되었고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중공군도 대량 사용하였다.

전후 RPD, PKM처럼 뛰어난 경기관총이 등장하자 DP는 일선에서 급속히 도태되었다. 비단 경기관총 분야뿐만 아니라 AK-47로 상징되는 것처럼 제식 소총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지만 DP가 일거에 퇴출된 이유는 그만큼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커다란 전쟁 내내 가장 많이 일선에서 사용되었던 기관총이라는 명백한 사실 하나만으로 DP는 전쟁사의 한 장을 차지한 기관총이라 할만하다.

제원

탄약 7.62 x 54mm R / 작동 가스작동식 / 전장 1,270mm / 중량 9.12㎏ / 발사속도 분당 500~600발 / 유효사거리 800m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