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대전 당시 총탄을 난사해대는 독일군의 MG42는 소련군에게 분노의 대상이었지만 감탄의 대상이기도 했다. 워낙 많은 소련군이 MG42에 의해 사상 당하면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성능만 놓고 본다면 가히 부러울 수밖에 없을 만큼 좋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MG42라고 무결점의 무기는 아니지만 사용자가 아니라 피해를 당했던 이들에게는 장점이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너무 당연하였다.

물론 소련군도 DP 경기관총과 PM M1910 중기관총처럼 다양한 종류의 기관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MG42같이 휴대가 편리하면서도 강력한 화력을 함께 보유한 기관총은 없었다. 이론상 일선에서 DP와 PM M1910을 섞어 사용하면 독일군 못지않게 화력 투사가 가능하지만, 제식 무기가 이러 저리 나뉘는 것은 부대 운용을 불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작전을 펼치는데도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구시대의 기관총인 PM M1910은 너무 무거웠다.

이런 차이 때문에 대등한 규모의 소부대간 교전에서 소련군의 화력 열세가 지속되자 새로운 기관총에 대한 일선의 요구는 계속되었다. 이에 1943년 소련군은 여러 총기 설계국에 새로운 경기관총의 개발을 지시하였고 경합 끝에 DP 경기관총을 만든 바실리 데그차크레프(Vasily Degtyaryov)의 개발안이 채택되어 1944년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RPD(Ruchnoy Pulemyot Degtyaryova) 경기관총이다.

냉전에 의해 양산되다

RPD는 이후 등장한 AK-47의 제식 탄환으로 유명한 7.62×39mm 탄을 처음으로 사용한 총기다. 따라서 7.62×54mm 탄을 사용하던 이전 기관총들에 비해 반동제어가 상대적으로 용이하였고 그만큼 총의 중량도 감소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RPD가 보급되기 시작하였을 때는 종전 무렵이라 전선에서 그다지 의미 있는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전쟁이 막을 내리면서 양산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아무리 새로운 기관총에 대한 군부의 열망이 크다 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처럼 거대한 전쟁이 끝난 이상 군비 감축은 당연한 수순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시작된 냉전 덕분에 RPD는 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소련군 당국은 소부대를 SKS 반자동소총과 RPD 경기관총으로 무장시키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총성이 멈춘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더욱 더 전쟁의 공포에 떨어야 했던 냉전시대의 자화상이었다.

비록 이겼지만 제2차 대전에서 호된 경험을 당한 소련은 중화기 못지않게 일선 보병들의 화력 보강 또한 상당히 중요한 문제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전 세기에 개발되었던 모신나강이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사용된 구닥다리 기관총으로 또 다시 전쟁을 벌인다면 승패를 장담하기 힘들다고 보았다. 따라서 휴대가 간편하지만 화력이 훨씬 강화된 SKS와 화력지원용 RPD의 조합은 상당히 훌륭한 결정이었다.

이렇게 데뷔시기가 어정쩡하였던 관계로 제2차 대전에서의 활약상은 없다시피 하였지만 RPD는 1950년대부터 소련군의 주력 경기관총 자리를 당당히 꿰찼다. RPD는 양각대를 표준 장비로 장착하여 엎드리거나 진지에 거치하고 사용하기 편리하였고 부착된 멜빵을 이용하면 이동 중에도 사격이 가능하였다. 그렇다 보니 RPD는 항상 일선 보병과 함께 작전을 펼칠 수 있도록 최적화 된 경기관총이 되었다.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하다

소련군이 처음부터 그렇게 의도하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RPD는 이른바 SAW(분대지원화기)의 개념을 정립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월남전에서 이를 노획하여 사용해본 미군은 자신들이 화력지원용으로 사용하던 M60 기관총과 달리 8kg도 되지 않는 경량임에도 불구하고 화력이 뛰어난 RPD에 상당히 감탄하였다. 특히 소총과 같은 탄을 사용한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당시 미군의 기관총은 7.62mm탄이었지만 소총은 5.56mm탄을 사용하던 상태여서 보급에 애로가 많았다. 이 때문에 RPD는 소총과 같은 탄을 사용하는 FN 미니미나 M249처럼 다양한 종류의 SAW가 등장하도록 만든 촉매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기존에 있어왔던 방식이었다. 엄밀히 말해 미군도 5.56mm탄이 나오기 전에는 소총과 기관총이 같은 탄을 사용하였다.

RPD는 동구권에 대량 공여되었고 중국에서 ‘56식 경기관총’, 북한에서 ‘62식 경기관총’이라는 이름으로 라이선스 생산되어 일부는 아직도 제식 무기로 사용 중이다. 특히 중국제 56식은 월남전에서 월맹군과 베트콩이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RPD의 명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가벼워서 신체가 작은 동양인들도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전투 환경이 열악한 정글에서도 무난히 작동하여 대 호평을 받았다.

개발국에서의 짧았던 생애

그런데 RPD는 정작 개발국이자 야심만만하게 차세대 경기관총으로 도입한 소련군 일선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물러나게 되었다. 신뢰성도 좋았고 실전에서 호평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생각만큼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선 RPD의 특이한 급탄 방식에 원인이 있었다. RPD는 외형만 놓고 본다면 많은 이들이 드럼탄창방식 기관총으로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RPD는 100발씩 장착된 금속 탄띠를 드럼 모양의 콘테이너에 수납하여 사용한다. 이 방식은 탄환의 휴대가 간편하지만 사격 전에 많은 준비와 조작이 필요하였고 유사시에 소총용으로 보급된 탄을 즉석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때문에 소련군에서 50년대 후반까지 완전 퇴출을 예정하였던 DP가 RPD와 함께 사용되면서 제식 탄환이 통일되지 못하였다. 더불어 제작비가 비싸고 제작 시간이 많이 걸리는 절삭가공 방식 또한 양산을 저해시켰다.

하지만 그보다 더 RPD의 운명을 가르는 사건은 다로 있었는데, 바로 AK-47의 등장이었다. AK-47은 소련이 제2차 대전 후 SKS와 RPD로 보병을 무장시키려던 야심만만한 계획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미련 없이 포기하도록 만들어 버렸을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엄밀히 말해 AK-47로 무장시킨 보병은 이전의 어떠한 보병들보다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손님이 만든 명성

성능만 놓고 본다면 RPD가 AK-47보다 강하다고 볼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굳이 RPD를 보유하면서 소부대의 화기를 이러 저리 나눌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결국 기관총이라면 AK-47보다 강력하여야 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지만 당장 그런 기관총은 없었다. 고심 끝에 소련은 AK-47을 베이스로 하는 새로운 경기관총 제작에 착수하였다. 그러면 적어도 AK-47와 동일한 성능을 낼 수는 있다고 보았던 것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경기관총이 바로 RPK다. RPK는 프레스 가공으로 생산성이 좋았고 유사시 AK탄창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호환성이 좋았다. 더불어 AK-47과 사용 방법이 같아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데다가 유효사거리는 더 길었다. 마치 AK-47에 밀린 SKS처럼 결국 RPD는 RPK에 치여 도태 될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고, 그렇게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련군에서 순식간 사라져 갔다

하지만 해외에 공여되고 라이선스 제작 된 많은 물량이 여러 분쟁에서 꾸준히 활약을 펼친 덕분에 RPD는 아직도 주요 기관총의 명성을 지니고 있다. 사실 제2차대전 후 탄생한 소련제 무기의 실전 사용은 소련보다 제3국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정작 개발국인 소련과 이를 계승한 러시아에서는 기억에서 사라진 구세대의 무기가 되어버렸지만 아직도 남들에게는 그럭저럭 쓸만한 경기관총으로 유명하다. 결국 주인이 아닌 손님들에 의해 명성을 얻게 된 셈이었다.

제원
탄약 7.62 x 39mm M43 / 작동 가스작동식 / 전장 1,0370mm / 중량 7.4kg / 발사속도 분당 750발 / 유효사거리 1,000m

글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