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0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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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16년 솜 전투 [2]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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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 강행이냐 연기냐

조프르는 7월 말까지 40개 사단을 목표로 한창 진행 중이던 프랑스 북부집단군의 증강을 중단시키고 그때까지 구축된 전력을 대거 차출해 베르됭에 투입했다.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스스로 독일의 의도에 말려들어가는 모양새였다. 연합군 지휘부는 독일의 이번 공세가 베르됭의 점령보다는 이곳을 프랑스군을 소모시킬 블랙홀로 삼는 데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른바 ‘성스러운 길(Voie Sacree)’을 통해 베르됭으로 이동 전개하는 프랑스군. 이 때문에 솜에서 실시하려던 연합군의 공격은 성사가 불투명해졌다.

만일 프랑스가 독일의 의도를 정확히 깨닫고 일단 후퇴하여 후방에 방어선을 형성하는 식으로 지연 전술을 펼쳤다면 베르됭 전투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파리로 향하는 천혜의 길목에 위치한 베르됭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요새들이 축조될 만큼 전략적 가치가 너무 컸기에 조프르는 조급하게도 독일군 참모총장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하지만 팔켄하인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예상대로 프랑스가 적극 대응하는 바람에 소모를 강요할 수는 있었지만 독일이 입은 피해도 그에 못지않게 엄청났다는 사실이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석 달이 지난 6월 초가 되면서 베르됭은 누가 우세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학살의 경연장이 되어 있었다. 이때쯤에 이르러서는 정작 공격을 시작한 독일도 어떻게 전선을 추슬러야 할지 암담할 지경이었다.

베르됭 전투 당시 돌격하는 독일군. 프랑스군에게 엄청난 출혈을 강요하는 데 성공했으나 독일군의 피해도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처럼 독일이 고심하고 있을 때, 솜에서 예정대로 공세에 나서야 할지를 놓고 연합군 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BEF는 예정대로 13개 사단으로 증강되었지만 프랑스 북부집단군 20여 개 사단이 베르됭으로 전개해서 전체적으로 본다면 전력이 오히려 줄어든 상태였다. 결국 BEF가 담당해야 할 전선이 넓어졌고 동원할 수 있는 예비대는 부족해졌다. 때문에 포슈는 1917년 이후로 작전을 연기할 것을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무시되는 반면교사

하지만 베르됭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하기 위해 예정보다 빨리 공세를 펼치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있었다. 대표적 인물이 바로 BEF 사령관 헤이그였다. 야심만만한 그는 전쟁 발발 후 계속 조연만 담당해온 영국군이 이번 기회에 전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프랑스가 베르됭에 더욱 진력하면 포슈의 생각대로 솜에서의 공격이 연기 또는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조바심을 낼 정도였다.

(좌에서 우로) 솜에서의 대공세를 주도했던 조프르 프랑스군 총사령관, 헤이그 BEF 사령관, 포슈 프랑스 북부집단군사령관. <출처: 영국 전쟁 박물관>

헤이그는 프랑스가 이렇게 미적지근하게 나선다면 차라리 솜을 포기하고 전쟁 초기부터 BEF가 계속 담당해온 이프르에서 단독 공격을 실시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전쟁 발발 후 지금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긴밀히 협조하여 작전을 펼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충분한 협의를 거쳐 전략적으로 계획한 최초의 작전인 솜에서의 합동 작전이 무산된다면 결국 섹터를 나누어 알아서 싸우는 예전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당연히 조프르도 이런 모습이 달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국의 단독 공격 의지가 확고하자 이프르보다는 그래도 베르됭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솜에서 공격을 실시하라고 헤이그를 설득했다. 결국 영국이 주공을 담당하여 최초 계획보다 한 달 앞선 7월 초에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이탈리아가 5월, 러시아가 6월에 공세를 시작한 것도 크게 자극이 되었다. 영국 제4군, 후방군 예하 13개 사단과 프랑스 제6군 11개 사단은 애초 구상의 절반 정도 수준이지만 그래도 독일 제2군의 두 배는 되었다.

전선을 이동 중인 BEF 병사들. 이제는 영국군이 주공의 임무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출처: 영국 육군 박물관>

그런데 공세에 나설 연합군의 헤이그는 자신이 이번 작전을 주도한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반면교사가 될 만한 사례를 무시했다. 바로 한창 동남쪽에서 진행 중이던 베르됭 전투였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은 목적과 방법으로 연합군보다 먼저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독일이 베르됭에서 곤욕을 치르는 모습은 솜에서 공격을 시작할 연합군에게 좋은 참고 자료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황을 너무 낙관했다.


기동전을 구상한 헤이그

오히려 헤이그는 독일도 베르됭 전투에 진력하느라 이곳에 신경을 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다만 일대 프랑스군의 전력이 약화되어서 1915년 말에 세워 놓았던 전략대로 작전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전선의 상황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가장 효과가 크다고 판단한 알베르 일대로 폭을 좁혀 공격을 실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대 독일군의 방어가 허술한 것은 아니었다.

공세에 들어가기 직전인 1916년 5월 10일 항공 촬영된 독일 제2군 방어선의 모습. 어지간한 공격으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제1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쟁의 방식이 많이 바뀌게 되는데, 항공 정찰이 일상화된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진의 상황을 샅샅이 파악할 수 있게 되면서 좀 더 정밀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었고, 이는 그만큼 사상이 늘어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영국군은 항공 정찰 등을 통해서 독일군의 방어선이 3중으로 단단하게 설치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헤이그는 세르(Serr)에서 몽토방(Montauban)에 이르는 지역에 설치된 제1방어선을 최대한 빨리 돌파한 후, 포지에르(Pozieres)에서 긴치(Ginchy)를 연결하는 제2방어선까지 신속히 다다르는 것이 관건이라 보았다. 고지대를 따라 형성된 제2방어선은 상대적으로 전력이 취약한 편이어서 독일 증원부대가 오기 전에 다다르면 점령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본 것이다. 이후에 후사면에 위치한 제3방어선의 돌파도 손쉬울 거라고 판단했다.

헤이그의 계획은 최대한 빨리 제1방어선을 돌파하여 고지대에 위치한 제2방어선까지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동전을 원했지만 당시 수준으로는 실현이 어려웠다.

한마디로 기동전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 5월 23일 창설된 후방군 예하 2개 군단까지 배속 받은 영국 제4군이 공격 전면에 일렬로 배치되었다. 그 좌우로 영국 제3군과 프랑스 제6군이 보조를 맞출 예정이기는 했으나 제4군의 진격에 작전의 성패가 달려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제4군을 지휘할 롤린슨(Henry Rawlinson)은 헤이그의 전략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기동전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진 인물이었다.


손발이 맞지 않은 영국군

롤린슨은 무엇보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속전속결보다 점령한 지역의 방어선을 일단 강화한 후 후방에서 포병대가 이동하여 화력 지원 태세가 갖춰지면 다음 공격을 재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은 훌륭해 보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지난 2년간 겪어왔듯이 그렇게 해서는 제일 먼저 마주할 무인지대(No Man's Land)의 돌파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영국 제4군 사령관 헨리 롤린슨. 그는 기동전이 어렵다고 보았지만 독일군 방어선의 돌파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지금까지 서부전선의 모습이나 바로 옆에서 혈전을 벌이는 베르됭 전투에서 보듯이 돌파구를 내는 것도 힘들지만, 사실 대부분의 피해는 구멍을 뚫더라도 지쳐서 속도가 느려진 보병들이 후속 돌파에 실패하면서 발생했다. 결국 이런 문제는 제2차 대전 때 기갑부대가 일반화되면서 극복하게 되지만 당시 기동전으로 이를 타개하려 한 헤이그도 정작 진격 속도를 높일 만한 뾰족한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유기적인 협조 체계를 충분히 구축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헤이그는 언제까지 어디를 점령하라는 개략적인 명령만 롤린슨에게 내렸을 뿐이었고, 롤린슨도 예하 사단장들에게 알아서 자신이 지시한 방식대로 신중히 공격하라는 대략적인 지시만 하달했다. 결국 최전선의 부대장들은 옆 부대나 후방의 협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예정된 시간에 각기 따로 작전을 펼쳐야 했다.

이번 공세를 위해 BEF는 참전 후 최대라 할 수 있는 1,500여 문의 야포를 준비했고 남측에서 함께 공격에 나설 프랑스군도 전력이 약화되었음에도 상당한 수준의 포병을 동원했다. 헤이그는 이런 엄청난 포병 전력으로 대대적인 제압 포격을 가하면 이후 보병들이 천천히 걸어서 적진을 점령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마침내 6월 24일,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이 시작되었다. 드디어 지옥으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