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8.01.05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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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16년 솜 전투 [3]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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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을 뒤흔든 폭발

대다수의 전사에서는 영국 보병이 일제히 독일군 진지를 향해 돌격에 나선 7월 1일을 솜 전투의 공식 개시일로 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전 제압 포격이 처음 실시된 6월 24일부터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서부전선에서 어느덧 포격은 하나의 일상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 연장선상의 작전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누구나 차이를 느낄 정도로 규모에서부터 확연히 달랐다.

한창 사전 제압 포격이 실시되던 1916년 6월 28일, 공격을 위해 전선으로 이동하는 영국군 제31사단 병사들.

내심 독일 제2군을 완전히 섬멸하여 서부전선 전체의 판도를 뒤집을 야심까지 가지고 있던 만큼 헤이그가 이번 공세에 거는 기대는 상당했다. 포격의 강도가 이전과 확연히 달랐던 데다가 장장 8일간이나 계속되자 독일도 대공세의 전조임을 알아챘다. 보고를 접한 참모총장 팔켄하인은 공세에 나설 연합군의 정확한 규모는 몰랐지만 베르됭에 집중된 압박을 분산시키기 위한 의도임을 즉시 눈치챘다.

독일도 베르됭에서 발을 빼기 힘든 와중이어서 솜 강 일대에 또 다른 격전지가 형성되면 골치가 아플 것은 분명했다. 만일 이곳에서 연합군을 저지하지 못하고 돌파구를 허용한다면 한창 베르됭에서 격전 중인 독일 제5군의 배후도 위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한창 대공세 중이었고 알프스 전선에서는 이탈리아의 공격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고전 중이었다. 일단 제2군 사령관 벨로브의 선전에 기대를 걸어야 했다.

호손 리지(Hawthorn Ridge)의 독일군 보루 밑에 은밀히 매설한 폭발물이 터지는 모습.

7월 1일이 되자 8일간 지속된 포격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보병이 돌격하기 10분 전인 07시 20분, 알베르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약 20여 km의 전선에 산재한 19곳의 독일 진영에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대지가 크게 흔들렸다. 그 위에 있던 진지들이 파괴되었고 많은 독일 병사들이 비명횡사했다. 사전에 영국 공병대가 터널을 뚫고 들어가 매설한 엄청난 양의 폭약 지뢰가 진격에 앞서 일제히 폭발한 것이었다.


자신만만했던 돌격

사실 공세를 준비하면서 영국이 참호 지대를 돌파할 묘수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뒤에 등장하게 되는 전차(Tank)처럼 다양한 연구와 시도를 하고 있었는데, 폭약 지뢰 공격도 그중 하나였다. 현재까지도 핵폭탄을 제외한 가장 커다란 인공 폭발 중 하나로 손꼽힐 만큼 개전 첫날 영국군이 선보인 깜짝쇼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지금도 솜 전투 전적지에 가면 처참한 지옥의 서막을 알렸던 커다란 흔적이 남아있다.

인위적으로 생성된 로크나거(Lochnagar) 분화구. 우기에 호수로 변하는 이곳은 솜 전투의 잔혹함을 알리는 기념물로 보존되고 있다. <출처: (cc) Alertomalibu at Wikimedia.org>

대대적인 제압 포격과 폭약 지뢰 공격이라는 매조지를 바로 앞에서 지켜본 BEF 병사들은 이 정도면 독일군의 전의가 완전히 꺾였을 것이라 생각했다. 헤이그처럼 이들도 파괴된 독일군 진지를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이 직접 보았던 사전 공격은 몸서리칠 정도로 대단했다. 마침내 돌격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들리자 수십만 병사들이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와 무인지대로 뛰어들었다.

남쪽에서 보조를 함께하는 프랑스 제6군 예하 1개 군단을 포함하여 충실히 무장한 총 27개 사단 75만의 연합군 병력이 공격에 나섰고 이를 막을 독일 제2군은 서둘러 증강을 받았지만 16개 사단 40만에 불과했다. 이 정도의 압도적인 전력과 8일간 있었던 무서운 사전 정지 과정만 보더라도 영국은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본다면 분명히 영국이 이길 수 있는 전투였다.

1917년 7월 루 일대에 형성된 전선의 모습. 좌측의 영국군 참호선과 우측의 독일군 참호선 사이의 공간이 이른바 무인지대다. 돌격하다가 무인지대에서 전사한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종종 임시 휴전이 벌어지곤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16년 솜 전투 [3] -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다 (전쟁사)

착검을 한 영국 병사들은 마치 경주를 벌이듯이 앞다투어 달려 나갔다. 거리가 먼 곳이라도 무인지대의 폭이 300m 내외에 불과했으므로 독일군 진지까지 다다르는 데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병사들은 중간쯤 이르러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의 포격으로 제거되어 있어야 할 철조망을 비롯한 독일군 방어물이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막힌 진격

결국 전진이 멈추었고 이곳을 넘기 위해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독일군 진지에서 예상치 못한 기관총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독일 포병대의 저지 사격이 개시되었다. 허허벌판에서 이런 불벼락을 피할 방법이 없던 많은 영국군 병사들이 외마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독일군은 8일간의 포격으로도 부술 수 없을 만큼 요새화된 벙커에서 그동안 안전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다.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영국군 병사들. 하지만 방어물 때문에 머뭇거리는 사이 독일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오히려 폭약 지뢰 공격이 끝나고 10분 동안 영국군이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보병의 돌격이 곧바로 시작될 것이라 판단한 벨로브는 벙커에서 부대를 빼낸 후 전진 배치시켜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서부전선에서 그래왔던 것처럼 무인지대는 그저 앞으로 달려가다가 죽거나 다친 영국군 병사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러나 규모가 컸던 만큼 쌓여가는 시신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곰쿠르(Gommecourt), 프리쿠르(Fricourt) 같은 일부 지역에서 돌파에 성공해 목표한 독일군 진지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이 또한 엄청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기동전을 생각하던 헤이그나 거점을 점령하고 일단 전선을 정비한 후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던 제4군 사령관 롤린슨의 생각은 처음부터 어긋났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지휘하던 이들은 정작 이런 현실을 아직 알지 못했다.

일선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히 최초 돌격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음에도 다른 대안이 없었던 그들은 병사들을 같은 방식으로 축차 투입했다. 영국군은 지난해 내내 갈리폴리(Gallipoli)에서 경험했던 참혹함과 현재 바로 옆 베르됭에서 프랑스군이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시키는 데 성공한 교훈을 망각했다. 그렇게 피비린내 나는 첫날의 공격은 일부 점령한 곳도 있었지만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참혹했던 그날의 결과

1916년 7월 1일, 약 20여 km의 전선에서 돌파를 시도하다가 영국군이 입은 손실은 그야말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하루 동안 무려 19,240명이 전사하고 35,493명이 부상당한 영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였다. 전쟁사에는 기원전 216년에 있었던 칸나에 전투(Battle of Cannae)처럼 하루 동안 이보다 더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기록도 있지만, 신빙성을 따질 때 솜 전투 첫날의 모습은 가히 전무후무한 수준이라 할 만했다.

매장되기 직전의 영국군 주검들. 솜 전투 첫날 무려 19,240명이 전사하는 영국 역사상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무서운 결과가 나오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야심만만하게 실시했던 8일간 이어진 사전 포격의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먼저 거론할 수 있다. 숫자상으로는 1,500여 문이라는 엄청난 야포를 동원했지만 사실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중포(重砲)는 그리 많지 않았다. 무인지대에 설치한 독일 철조망 대부분이 그대로였던 것도 포탄이 미치지 못할 만큼 사거리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국 포병이 사전 포격으로 우선 제압할 대상은 독일군이 매복해 있는 참호나 진지 같은 방어 시설이어야 하는데, 정작 이를 파괴할 수 있는 고폭탄보다 재고량이 많은 대인용 유산탄(Shrapnel shell)을 사용하여 효과가 크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에다가 상당한 불발탄이 나왔을 만큼 품질도 형편없었다. 당시 나름대로 성과를 올린 프랑스 제6군의 전과와 비교하면 이는 확연히 드러난 실책이었다.

기관총 사격 준비 중인 독일군. 독일 제2군은 비록 전력이 뒤졌지만 충분한 대비를 해놓고 영국군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면 독일 제2군의 방어는 그야말로 냉정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만큼 훌륭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효과적이지 못했던 영국군의 포격을 안전한 곳에서 피하면서 방어 준비를 충실히 진행했다. 또한 포병도 최대한 전선 가까이 배치되어 일선에서 요구하는 목표를 향해 즉시 응사해 주었다. 전방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후방에서 사격을 하여 즉시 대응이 어려웠던 영국군 포병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