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2.2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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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1916년 솜 전투 [1]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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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공을 펼치기로 한 연합군

1914년 8월, 유럽의 열강들이 마치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전쟁에 돌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바로 끝날 것으로 낙관했던 전쟁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되었고 어느덧 두 번째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다. 젊은이들이 환호를 지르며 앞다투어 전선으로 달려갔을 만큼 열광적이던 전쟁 초기의 모습은 어느덧 사라졌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상태로 전쟁이 장기화되자 당사국들은 모두 당황했다. 특히 참호가 굳게 파이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단단해진 서부전선은 어느 누가 우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왕 전쟁이 발발한 이상 반드시 이겨야 했고 그러려면 이 상태로 있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었다. 너무 팽팽하다 보니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뭔가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1915년 12월 6일, 지금까지의 지지부진한 전과를 분석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파리 북부 샹티이(Chantilly)에 위치한 프랑스군 총사령부에서 프랑스, 영국, 러시아, 이탈리아를 비롯한 연합국 주요 군사 관계자들이 참석하는 전략 회의가 개최되었다. 3일 동안 계속된 토론 끝에 연합군은 지금까지 별개의 전역으로 싸웠던 동(러시아), 서(프랑스, 영국), 그리고 남(이탈리아)에서 동시에 협공을 펼치기로 결정했다.

1915년 12월 6일 샹티이에서 개최된 연합국 전략 회의 당시에 함께 회의장 밖으로 나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우)와 영국 원정군 사령관 헤이그.

동시다발적인 공세로 독일이 손을 들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연합국 전체의 동원 능력이 독일보다 앞서므로 충분히 타당한 전략이었다. 서부전선에서 결전의 장소로 지목된 곳은 솜 강 북쪽의 아라스(Arras)에서 알베르(Albert)에 이르는 폭 30여 km의 피카르디(Picardy) 지역이었다. 지금까지도 잔인한 악명을 떨치는 솜 전투(Battle of the Somme)는 그렇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감당해야 할 어려움

그런데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동안 계속해 온 전투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실 당시의 전투 기법이나 장비를 고려한다면 대대적인 포격 후에 돌격을 감행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대안을 생각할 수도 없었다. 문제는 이제까지 경험했듯이 이런 방식은 아군의 심각한 피해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결론적으로 출혈 경쟁이 되는데, 전선의 돌파나 점령과는 별개로 끝까지 살아남는 쪽이 이기는 셈이었다.

시신을 치우지도 못하고 휴식을 취하는 독일군 병사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연합군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적군을 많이 소모시켜 대응을 포기하도록 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가정이고 핵심은 더 이상 독일이 예비대를 투입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지휘부는 작전 개시일로 정한 1916년 8월 1일까지 전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며 전력을 최대한 축적하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에 반대편의 러시아와 알프스 남쪽의 이탈리아도 공세를 함께 시작할 예정이었다. 무려 7개월의 기간을 상정하고 준비에 나섰을 만큼 이번 공세에 대한 연합군의 의지는 대단했다.

이번에 서부전선에서 공세 지역으로 낙점된 솜 강 일대는 교통의 요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변에 반드시 점령해야 할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전쟁 발발 후, 수차례의 격전이 벌어진 아라스 북쪽의 이프르(Ypres)나 알베르 남쪽의 수아송(Soissons) 등과 달리 상대적으로 소강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곳이 공격 장소로 선정된 이유는 BEF(영국 원정군)와 프랑스군의 경계선에 놓여 연합 작전을 펼치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BEF(영국 원정군)와 프랑스군의 경계인 솜 강 일대의 피카르디 지역이 공세 장소로 지목되었다.

1915년 12월 당시, 솜 강 일대에는 BEF 소속 8개 사단과 프랑스 북부집단군(Groupe d'armées du Nord) 예하 11개 사단이 포진해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독일군은 벨로브(Fritz von Below)가 이끄는 제2군으로 총 11개 사단이었다. 이들은 석회질 지대를 깊숙이 파고 5km 가량의 종심에 차례대로 구축한 3개의 단단한 방어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따라서 연합군에 비해 전력은 열세였지만 충분히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야심가의 반발

영국과 프랑스는 작전의 목표와 지점은 쉽게 합의했지만 세부 실행안 수립 과정에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Joseph Joffre)는 BEF가 솜 강 북쪽에서 전투를 벌여 독일군의 주의를 끌어주면 남쪽에 대기 중인 프랑스군이 독일 제2군의 측면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겠다고 제안했다. BEF가 일종의 미끼가 되는 것을 전제로 한 이런 주장은 영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우)와 환담 중인 조프르 프랑스군 총사령관. 전쟁 초반에 독일의 공세를 극적으로 꺾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프랑스군의 희생이 커지면서 1916년 12월 해임되었다.

지난 1915년 12월, 제2대 BEF 사령관에 부임한 헤이그(Douglas Haig)는 영국군이 조공을 담당해야 한다는 프랑스의 주장을 몹시 불쾌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병사들의 엄청난 희생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저돌적인 공격을 선호한 야심가여서 영국군이 전선을 주도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무모한 면이 있는 헤이그의 성향은 솜 전투의 비극을 불러온 하나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솜 강 북쪽에서 영국군이 바폼(Bapaume)으로, 남쪽에서 프랑스군이 페론(Peronne)까지 나란히 공격에 나서는 것으로 타결을 보았다. 사실 당시 프랑스군이 영국군보다 전력이 앞섰으므로 조프르의 제안이 합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헤이그가 함께 주공을 자임할 수 있었던 근거는 2월에 제4군이, 5월에는 후방군(Reserve Army, 제5군의 전신)이 창설되어 BEF의 전력이 대폭 증강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제2대 BEF 사령관에 부임한 헤이그. 공세적인 지휘관이었으나 너무 많은 병사들의 희생을 불러와 전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인도, 남아프리카 등에서 지원 온 병력으로도 부족했던 영국 정부는 1916년 1월 징병제를 실시했다. 덕분에 1914년 최초 파병 당시 20여만에 불과했던 BEF는 5월이 되면서 120만에 이를 전망이었다. 아무리 전투를 벌이는 곳이 프랑스 땅이라 해도 사실 이 정도의 병력을 투입하고 조공 역할에만 머문다는 것은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허를 찌른 독일의 공격

우여곡절 끝에 확정된 공격의 총지휘는 그나마 영국군과 사이가 원만했던 프랑스 북부집단군 사령관 포슈(Ferdinand Foch)가 맡기로 했다. 그는 BEF의 증강이 완료될 때까지 전선에서 최대한 소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섣부른 공격은 위험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손실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압도적인 상황에서 공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1915년 루(Loos) 전투 직후 이동하는 영국군. 계속된 교전 경험을 통해 압도적인 전력으로 일거에 밀어붙이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출처: 영국 전쟁 박물관>

하지만 2월 21일, 전선 중앙의 베르됭(Verdun)에서 들려온 소식은 연합군의 야심만만했던 모든 계획을 흩뜨려 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 수세적 대응을 견지하던 독일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는 급보였다. 프랑스군이 결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지만 참호 지대를 돌파한 독일군은 2월 25일, 난공불락으로 여겨져온 두오몽(Douaumont) 요새를 함락시켰다. 당장 이곳을 틀어막지 않는다면 파리의 안전까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서부전선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이 선택한 방법도 연합군의 출혈을 강요하여 전의를 꺾어 버리는 것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독일이 끝장을 볼 장소로 지목한 곳은 베르됭이었고 먼저 준비를 완료한 후 공격을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세부적인 방법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포병 전력을 집중하여 대대적인 포격을 가한 후 보병이 돌격하는 방식으로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같았다.

8월 1일을 목표로 준비를 하는 동안 베르됭에서 독일이 먼저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연합군의 계획은 전면 수정되어야 했다.

후세의 사가들은 너무 무모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쉽게 비판하지만 양측 모두가 동시에 같은 방식을 생각했다는 것은 어쩌면 당시 전쟁을 치르던 이들에게 고착된 전선을 무너뜨릴 현실적인 방법이 이것 말고는 없었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제 연합군의 급선무는 베르됭에 가해지는 위기를 해소하는 것이었다. 솜 일대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상당수의 프랑스군이 베르됭으로 급거 이동 전개에 들어갔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