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11.24 13:42

글자크기

[전쟁사]

1943년 3차 하르코프 전투 [3]

독일의 마지막 대승

0 0
벨고로드 도심으로 진입하는 소련 제40군 병사들. 이제 하르코프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내우외환에 빠진 독일군

대대적으로 부대를 개편하고 지휘관을 교체했을 정도로 현지 사수에 대한 히틀러의 의지는 확고했다. 오히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반격을 요구했다. 총통의 집요한 행태에 현지 지휘관들은 물론, 1942년 9월 참모총장 할더(Franz Halder)가 해임된 이후 모두 예스맨으로 바뀐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의 브레인들도 난감해했다. 하르코프가 중요한 곳이기는 했지만 전선 전체의 상황을 고려할 때 반격은커녕 사수할 필요성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르코프 교외의 평원에서 경계 중인 독일군 전차. 이처럼 별다른 지리적 방어물도 없는데다 당시 전선의 상황을 고려할 때 사수할 필요는 없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비참한 경험을 한 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히틀러는 또다시 오기를 부렸다. 후퇴를 하지 않고 도시를 방어막 삼아 공방전을 벌인다면 당분간 하르코프를 장악할 수는 있겠지만, 측면과 배후가 너무 부실해서 고립을 자초하는 격이었다. 친위장갑군단이 정예이기는 하지만 10배나 많은 보로네시 전선군과 남서전선군의 양면 공격을 물리치기에는 구조적으로 어려운 상태였다.

더구나 소련군이 도심 가까이 다가오자 그동안 은인자중하던 하르코프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어쩌면 그것은 은연중에 강요된 항거와 다름없었다. 비록 나치의 폭정에 지난 2년간 숨죽이며 지내왔지만 살아남은 시민들은 소련이 도시를 탈환한 이후 부역 혐의로 문책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따라서 보복을 피하려면 대독 항전에 적극 나섰음을 알릴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소련군이 가까이 다가오자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반소, 반유대 선전 자료를 보는 하르코프 시민들. 피난 가지 못하고 점령지에서 살던 많은 이들이 해방 후 부역 혐의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원래 전쟁은 보통의 사람들에게 가혹하지만 독소전쟁의 경우는 특히 더했다. 인종주의와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나치는 점령 지역을 학살이 일상화된 지옥으로 만들었고 그런 곳에서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소련의 수복 이후에 부역자로 몰려 처벌을 받곤 했다.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살아남은 것이 죄가 되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폭동은 대독 항전이라기보다는 소련군 진입 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히틀러, 사수를 명령하다

북쪽의 벨고로드가 소련 제40군에게 함락된 이상 소련군의 도네츠 강 도하는 기정사실이었으나 당장 이들을 저지할 수단이 독일에게는 없었다. 멍하니 당할 수만은 없었던 란츠는 하르코프 외곽에 전진 배치된 친위장갑군단을 일단 도심 쪽으로 후퇴시켰다. 공격보다 방어가 유리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경험 때문에, 반격을 가할 수 없다면 그나마 도심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것이 차선책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한다면 어찌되었던 사수를 외치는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지시를 받고 하우서는 친위장갑군단을 신속히 이동시켰다. 하지만 란츠와 달리 하우서는 파르티잔 때문에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고 외곽에서 소련군의 압박이 동시에 진행되는 와중에 도심을 사수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완전 철군을 란츠와 만슈타인에게 요청했으나 사실 그들도 힘이 없었다.

히틀러는 위기를 타개하라고 남부집단군을 새롭게 창설해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지휘권을 만슈타인에게 몰아주었으면서도 여전히 친위장갑군단을 자신의 직접 감독 하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하우서가 부대를 이끌고 하르코프에서 빠져나오려면 총통의 허락이 필요했다. 하지만 히틀러가 하르코프를 포기하는 데 순순히 동의할 리는 만무했다.

하르코프에 방어선을 구축한 제1친위사단. 만슈타인은 반격을 위해 금쪽같은 정예부대를 최대한 보존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히틀러의 사수 명령은 분명히 틀렸지만 하르코프가 실함되면 아조프 해 인근에서 고군분투하는 제1기갑군과 홀리트 파견군도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런 상황은 추축국의 분열을 야기할 악재가 될 수 있었다. 지난 코카서스 전투 당시도 그랬고 이후에 벌어질 크리미아 전투에서도 유별나게 히틀러가 현지사수에 목을 매었던 이유 중 하나가 소련의 직접 영향권인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의 추축국 이탈을 우려해서였다.


철군에 대한 갈등

아무리 히틀러의 권위가 매서워도 철수를 요구하는 군부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물밑으로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만슈타인은 소련군을 하르코프로 최대한 깊숙이 끌어들여 지치게 만들어 놓고 반격을 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월이 되면 소련군도 더 이상 진격을 계속할 수 없을 만큼 일선 부대의 피로도가 한계에 다다르고 후방 부대의 보급도 어려워질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소련군도 몹시 지쳐 있는 상황이므로 기회를 노리면 역전의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러려면 히틀러가 하르코프에서 철군하는 데 동의해야 하지만 그보다도 반격의 주력으로 예정한 친위장갑군단을 자신이 쓸 수 있어야 했다. 만슈타인은 여러 루트를 통해 이런 의견을 조심스럽게 피력했지만 여전히 총통은 요지부동이었고 친위장갑군단의 지휘권도 내놓지 않았다. 오히려 즉시 반격하라며 닦달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만슈타인은 일단 소련군의 공세를 서서히 흡수시키면서 기회를 노려야 했다.

히틀러가 고집을 피우는 사이에 보로네시 전선군의 선봉인 제6군, 제3전차군이 하르코프 동쪽에서 진입을 개시했다. 그와 더불어 남서전선군 예하의 제1근위군과 제3근위군이 하르코프 남단의 크라스노그라드(Krasnograd)로 향하면서 독일 제4기갑군을 드네프르 강 인근까지 밀어붙였다. 도시 북쪽도 위태로워 벨고로드를 점령한 소련 제40군이 수미(Summy) 인근까지 다다랐다. 하르코프 후방까지 차단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히틀러에게 항명하고 부대를 후퇴시킨 친위장갑군단장 하우서. 병사들로부터 아빠(Papa)라고 불릴 만큼 신뢰를 받았고 전투 중 한쪽 눈을 상실할 만큼 열정적으로 부대를 지휘한 인물이다. 하지만 전후 친위대를 옹호하는 활동을 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란츠는 반격을 명령했지만 오히려 남동 측에서 진입한 소련 제6군에게 저지당하며 위기에 빠졌다. 결국 이들 부대는 하르코프 시내로 퇴각했고 2월 14일이 되었을 때 소련 제40군과 제3전차군이 도시 외곽을 엄중히 둘러쌌다. 이처럼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이 재현되려는 바로 그 순간 친위장갑군단장 하우서가 예하 사단들에게 하르코프를 포기하고 즉시 도시를 빠져나오라는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하우서의 항명

하우서는 자발적으로 나치에 가입한 인물이었지만 군사작전에서만큼은 소신을 지켰다. 그는 자신의 금싸라기 같은 부대가 독일 제6군의 전철을 되밟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하우서가 항명했다는 보고를 받은 란츠는 기겁하며 부대의 이동을 중지시켰지만 막을 수 없었다. 란츠 또한 하우서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감히 총통의 명령을 거부할 용기가 없던 소심한 인물이었다.

히틀러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하르코프를 포기했을 만큼 독일은 소련의 공격을 막을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당시 독일 지휘관들이 가장 용기를 보여야 할 순간은 바로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지 말아야 할 때였다. 총통의 엄명에 반기를 든 하우서는 2월 15일, 친위장갑군단을 완전히 폴타바로 후퇴시켰고 소련군은 텅 빈 하르코프로 속속 진입했다. 친위장갑군단의 지휘권만 확보한다면 소련군을 격파할 자신이 있었던 만슈타인은 전력을 고스란히 보존시킨 하우서의 용기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비슷한 시기에 소련 남부전선군 소속의 제2근위군과 제28군이 로스토프에 진입했다. 도네츠 강 하구의 주요 거점인 이곳 역시 히틀러가 사수를 엄명하던 곳이었다. 독일 제1기갑군이 격렬히 저항했지만 5배나 많은 적들이 사방에서 파고들어오자 방법이 없었다. 마침내 2월 16일, 소련군은 하르코프와 로스토프를 완전히 탈환했다. 별 작전과 질주 작전의 목표가 반 이상 달성된 셈이었다.

하르코프 도심의 자유광장으로 진입하는 소련군 기갑부대. 15개월 만에 도시를 탈환해 의기양양했지만 그들의 즐거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하게 막을 내렸다.

이로써 15개월 만에 소련군은 역사적인 도시 하르코프에 감격스럽게 진입했다. 그동안 숨어있던 점령 지역의 주민들이 뛰어나와 환영했고 소련군은 해방자로서의 위용을 마음껏 뽐냈다. 그런데 소련군이나 하르코프의 시민들은 이러한 감격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순간의 꿈으로 끝날 것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르코프가 탈환되었다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고 독일군은 여전히 가까운 곳에 있었다.


남도현|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