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4.14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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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만용이 부른 참극

1942년 2차 하르코프 전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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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봄의 상황


소련은 1941년 동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앞날이 결코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독일의 공세를 극적으로 좌절시킨 모스크바 전투만 하더라도 오히려 피해는 소련이 훨씬 컸다. 독일의 전사상자는 약 35만 정도였지만 승리한 소련의 인명 피해는 무려 100만이었다. 비록 무시무시한 전쟁 수행능력으로 손실을 즉시 복구하긴 했지만 사실 개전 이후 지금까지 당한 피해는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었다.
모스크바 전투 당시 시민들의 위문을 받는 소련군 전차부대. 이처럼 자신만만한 선전 사진과는 달리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간신히 독일의 진격을 저지시키고 있었다. <출처: RIA Novosti>

독일을 물리치려면 산술적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될지, 그리고 그런 내용을 인민들에게 솔직히 공개할 수 있을지조차 자신할 수 없었다. 패배를 면한 것은 확실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독일은 전쟁을 개시한 선에서 1,000km 동쪽에 이르는 소련의 땅과 시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점령하고 있었다. 당연히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손실의 대부분은 소련의 몫이었다.

정권 붕괴 위험까지 심각하게 느꼈을 만큼 움츠러들었던 스탈린은 지난 모스크바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어 전 전선에서 즉시 반격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전쟁 초기처럼 막무가내는 아니어서 군부가 어느 정도 의견을 펼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독일군을 몰아내고 싶은 마음이야 군부라고 예외가 아니었으나 이들은 좀 더 이성적이었다. 현재 전력의 격차와 전선의 상황을 인정한 상태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개전 초 STAVKA에서 전쟁 지휘를 하는 스탈린을 묘사한 체제 선전화. 그는 모스크바 전투의 승리에 도취되어 즉각 공세를 주장했다.

반면 르제프(Rzhev)에서 소련의 반격을 가까스로 저지하는 데 성공한 독일도 다가오는 여름을 목표로 새로운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이처럼 두 거인의 충돌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격전이 벌어질 장소가 남북으로 2,000km가 넘는 동부전선의 어디가 될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러던 1942년 5월, 남쪽에서 소련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며 잠시 잠잠했던 전선이 다시 불타올랐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어질 대격전의 오픈 게임이었던 2차 하르코프 전투(Second Battle of Kharkov)였다.



전선의 돌출부


지난 겨울, 소련은 든든한 진흙장군과 동장군의 지원을 업고 모스크바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바로 직후 스탈린의 고집 때문에 벌어진 르제프 전투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에 막혀 오히려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 이처럼 1942년 초반기에 가장 치열했던 르제프 전투가 5월을 기점으로 점차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동부전선은 정체되었다. 양측 모두 일단 참호를 깊게 파고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1942년 봄이 되면서 전선의 곳곳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면에서는 양측 모두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출처: Bundesarchiv>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는 여전히 독일의 위협을 받고 있었지만, 위험한 고비를 넘긴 것은 확실했다. 이처럼 전선 북부와 중앙에 고조되었던 위기를 일단 진정시켰다고 판단한 스탈린은 관심을 오렐(Orel)에서 로스토프(Rostov)에 이르는 남부로 돌렸다. 1941년 11월 독일군이 로스토프에서 밀려난 후 이곳은 상당히 조용한 상태였다. 아니 엄밀히 말해 모스크바 전투와 이후 일대에서 벌어진 격전들 때문에 양측 모두 이곳에 관심을 둘 수 없었다.

이곳은 독일 남부집단군(Army Group South)과 소련 남서전구(Southwest Theater)가 일직선으로 팽팽히 대치 중이었는데, 도네츠(Donets) 강 연안의 이지움(Izyum) 일대가 독일군 쪽으로 유별나게 돌출되어 있었다. 주코프(Georgy Zhukov)는 말렸지만 스탈린은 이곳을 발판 삼아 공세를 취할 것을 명령했다. 전면에 있는 독일 제17군의 양측을 파고들어가 포위 섬멸하여 남부집단군을 양단시키라는 것이었다.

1941년 12월 동부전선 남부의 모습. 로스토프 전투 후 하르코프를 향해 튀어나온 이지움 일대의 돌출부를 정점으로 전선이 소강상태에 빠졌다. <출처: 미 육군 사관학교>

그런데 후에 언급하겠지만 이지움 돌출부가 눈엣가시인 것은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이곳을 제거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사실 전쟁 중 형성된 전선의 돌출부는 전쟁 당사자 모두에게 다음 작전을 구상하고 유인하는 동기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돌출부 제거를 염두에 둔 독일의 준비는 2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소련군의 공세를 전혀 예견하지 못해 기습을 당했음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티모셴코의 의도


티모셴코를 기리기 위해 소련에서 발행한 기념우표. 많은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특별히 유능한 장군은 아니었고 오히려 많은 패배의 굴욕을 겪었다.

스탈린은 소련 남서전구와 예하 남서전선군 사령관을 겸임 중인 티모셴코(Semyon Timoshenko)에게 임무를 하달했다. 티모셴코는 핀란드와의 겨울전쟁 당시인 1940년 1월, 구원투수로 나서서 위기를 극복하고 승리를 엮었고 1941년 9월, 키예프 전투에서 소련이 대패하며 전선 남부에 심각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부됸니(Semyon Budyonny) 대신 투입되어 전선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티모셴코는 예하 남부전선군이 크라스노그라드(Krasnograd)로, 남서전선군이 수미(Sumy)로 진격한 후, 방향을 각각 남북으로 틀어 하르코프 외곽에서 조우해 독일 제17군을 포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방어에만 급급했던 소련군의 형편을 생각하면 가장 야심만만한 공세라 할 만했다. 그런데 이는 지금까지 독일에게 숱하게 당해왔던 포위 섬멸전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1943년에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Battle of Kursk) 직후 독일 제4기갑군 사령관 호트(Hermann Hoth)가 상관인 남부집단군 사령관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이제 소련군은 결코 급조된 농민군이 아닙니다.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강해졌습니다”라고 언급한 대목처럼 소련군은 계속 얻어맞아가며 하나하나 습득해 나갔다. 티모셴코의 공세도 집단화한 기갑부대를 돌파의 중핵으로 삼는 독일군의 전술을 흉내 낸 것이었다.

보병을 태우고 하천을 도섭하는 소련군의 T-34 전차. 소련은 지난 1년간 엄청난 피해를 당하며 최신 기동전의 원리를 하나씩 터득해 나갔다.

사실 소련 군부에도 독일의 전격전과 유사한 ‘종심타격이론’을 이미 1936년에 구상한 총참모장 투하체프스키(Michał Tuchaczewski) 같은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대숙청 당시 모함을 받고 처형된 후,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자 공군과 집단화된 기갑부대를 이용한 그의 앞선 구상도 함께 사라지다시피 했다. 스탈린이 연구를 제한한 것은 아니었지만 피의 공포 속에서 군부의 분위기가 경직되어 버린 것이었다.



자만에 빠진 소련군


키예프 전투 후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주코프와 바실렙스키(Aleksandr Vasilevsky) 체제로 바뀌어 가는 중이었지만, 모스크바 전투에서 승리하며 간섭병이 도진 스탈린이 나서서 티모셴코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티모셴코는 지원 받은 1,500여 대의 전차와 자주포로 중무장한 기갑부대를 독일 제17군 정면으로 파고들어갈 남부전선군에 집중 배치시켰다.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독일군의 모든 노하우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티모셴코는 많은 전차를 남부전선군에 배치하여 돌파의 선봉으로 삼고자 했다. <출처: RIA Novosti>

돌파구는 어느 정도의 크기로 벌리는 것이 적당한지, 공군의 타격이 어느 선까지 이루어져야 지상군의 작전을 수월하게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선두의 기갑부대를 뒤이을 후속부대와 보급은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는 것이 좋은지 등등,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사실 이와 관련된 기법들은 독일도 실전을 거듭하며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것들이었다. 따라서 티모셴코는 그저 압도적인 전력을 발판으로 서서히 밀어붙일 결심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 겨울전쟁 당시 재미를 본 것처럼 티모셴코는 전력이 앞서면 크게 무리하지 않는 작전을 펼쳐도 충분히 우세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동원된 병력은 물경 75만에 이르렀다. 반면 이들을 맞이해야 할 일대의 독일군은 35만에 불과했고 전차나 야포의 수량도 부족했다. 적어도 겉으로 확인된 물량만 놓고 본다면 그의 예측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1942년 봄 남부집단군 소속 독일 병사들. 지난 겨울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투력은 여전히 소련군보다 뛰어났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media.org>

분명 병력에서 소련은 독일보다 2배 이상의 우위를 보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차이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1941년 6월 개전 직후와 그해 11월 태풍 작전 초기 정도를 제외한다면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물량으로 소련을 앞선 적은 거의 없었다. 비록 로스토프 전투와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을 밀어냈지만 르제프 전투에서도 보듯이 병력 수와 상관없이 소련에게 독일은 여전히 버거운 상대였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