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02.0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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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방어전의 백미

데미얀스크 전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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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셴코의 절치부심


제2군단의 경이적인 선전으로 독일은 데미얀스크를 지킬 수 있었지만 티모셴코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1939년 폴란드 침공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직후 벌어진 겨울전쟁에 구원 투수로 투입되어 전세를 역전시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폴란드 침공전은 독일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은 격이었고 핀란드 전역은 이기는 것이 당연한 엄청난 전력을 투입하고도 간신히 얻어낸 치욕적인 승리였다.
참호 속에서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소련군을 막아내는 제2군단 병사들. 이러한 저항에 막혔지만 티모셴코는 점령을 포기하지 않았다. <출처: Bundesarchiv>

엄밀히 말해 실력이 입증된 적은 없었지만 대숙청의 피바람 속에서도 모나지 않은 처신으로 살아남은 덕택에 독소전쟁 초기만 해도 그는 소련군의 실세로 군림했다. 더구나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 부됸니(Semyon Budyonny), 쿨리크(Grigory Kulik)처럼 권력 최상부에서만 맴돌던 노골적인 정치군인도 아니어서 군부 내의 신망도 컸다. 하지만 독소전쟁 초기부터 연이어 처참하게 패하면서 그의 위신은 추락했다.

티모셴코는 1941년 엄청난 대패로 끝난 스몰렌스크(Smolensk)와 키예프(Kiev) 전투의 주역 중 하나였고 이듬해 6월에 있었던 제2차 하르코프(Kharkov) 전투에서도 참패한 후, 2선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북서전선군의 사령관 자리는 예전의 직위를 생각하면 좌천된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위신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명예 회복을 위해 최대한 빨리 공격을 재개할 생각이었다.



1940년 주코프가 관할하는 키예프 특별군관구를 방문한 인민국방위원 시절의 티모셴코. 두 사람의 관계는 원만했으나 지휘 능력의 차이로 인해 1942년 이후 군부 내의 위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모스크바 전투를 기점으로 소련 군부의 최고 실세가 되면서 승승장구하던 주코프(Georgy Zhukov)가 그맘때 실행한 르제프 돌출부 제거 작전에서 대패했기에 조급함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거의 종착점을 향해 가고 있었고 르제프 전투가 소강상태로 접어든 틈을 타서 북서전선군 재건에 착수한 티모셴코는 전력을 강화하기 시작했고 완료되는 대로 즉각 공세에 나설 예정이었다.


이제는 물러날 때다


반면 스탈린그라드에서 제6군의 산화가 확실시되었던 독일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단 코카서스의 깊숙한 지점까지 내려가 있던 A집단군이 즉시 철군해야 했다. 아무리 현지사수의 필요성을 신봉하는 히틀러라도 이들의 후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이번 기회에 동부전선을 대대적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어차피 소련과의 소모전을 감당할 수 없으므로 전선을 최대한 단축해 전력을 재배치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히틀러에게 해임당한 할더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에 오른 쿠르트 자이츨러. 그는 전형적인 예스맨이었지만 데미얀스크 사수를 고집하는 히틀러의 주장에 강력히 반대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지만 이제 이 전쟁에서 독일이 이길 수 없는 것은 확실했다. 단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점령은 중단해야 할 시점이었으므로 독일이 가장 먼저 포기를 검토한 곳이 바로 르제프 돌출부와 데미얀스크 포켓이었다. 이 지역들을 내주면 5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전선이 200여 킬로미터로 대폭 단축되면서 약 30만의 병력을 다른 곳으로 투입할 수 있게 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매몰된 병력이 30여만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당장 취해야 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대답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를 되갚기 위해 이들 돌출부를 발판 삼아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데미얀스크와 르제프에서 동시에 진격하여 소련 북서전선군과 칼리닌 전선군을 포위 섬멸하고 전선을 소련 쪽 후방으로 단축시키라고 명령했다.

히틀러는 돌출부를 발판으로 소련군을 포위 섬멸하라고 명령했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전 직후의 독일에게는 그런 여력이 없었다.
당시 지도상에 그어진 전선만 놓고 보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독일에게 공세로 나갈 여력이 없다는 점이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을 반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 참모총장 자이츨러는 총통의 의견에 강력히 반대하며 철수를 주장했다. 그는 전임자 할더와 달리 예스맨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결국 히틀러는 1943년 2월 1일 군부의 의견을 수용했다.


철군에 성공한 독일군


드디어 지난 1년간 고군분투하던 제2군단에게 철군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항상 이 순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하고도 신속히 이루어져야 했기에 허위 정보 등으로 기만전술을 썼다. 덕분에 일선의 병사들마저 그저 방어선을 강화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2월 중순에 이르러 포켓을 빠져나갈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제2군단은 소련군을 철저히 기만하며 즉시 철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완료했다.

2월 15일, 소련은 레닌그라드 해방을 목표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더불어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티모셴코에게 데미얀스크 점령을 지시했다. 원래 그는 전력을 충분히 회복한 후 공격을 재개하려 했지만, 독일 제16군에게 더 이상의 예비대가 없다고 본 STAVKA는 지원에 소극적이었다. 사실 다른 곳의 지원이 시급한 상황이라 북서전선군은 현재의 전력으로 공세에 나서야 했다.

절치부심했던 티모셴코는 이번 공격을 오로지 라무셰포 가도 한 곳으로 집중시켰다. 우선 제1충격군과 제11군이 남북으로 공격을 가한 후, 공격 동력이 떨어지면 뒤에 대기한 2개 군으로 공세를 지속할 생각이었다. 제2군단은 필사적으로 소련군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전망이 좋지 않았다. 2월 17일 드디어 히틀러가 철수 명령을 내렸고 제2군단은 서쪽으로 후퇴를 시작했다.

절치부심한 소련 북서전선군이 2월 15일 공세를 재개하자 독일 제2군단은 지연 방어를 펼치며 서서히 포켓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출처: RIA Novosti>
OKH는 완전 철군에 약 70여 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았으나 제2군단은 20일 안에 안전지대로 빠져나가고자 했다. 제10군단의 지원을 받아 제290사단과 제126사단이 통로를 사수하는 동안, 가장 동쪽의 데미얀스크, 발다이를 사수하던 부대들을 시작으로 신속하고도 효과적인 지연전을 구사하며 서쪽으로 탈출을 시작했다. 소련군이 추격을 개시했으나 그들을 기다린 것은 텅 빈 독일군 진지와 끊어진 교량, 그리고 부비트랩이었다.


숨겨진 의의


다급해진 티모셴코는 애초의 계획과 달리 추가 투입을 위해 예비해 놓았던 제34군과 제53군까지 일거에 투입하며 추격을 독려했지만 독일이 미리 구축한 연속된 방어선에 막혀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2월 27일, 데미얀스크 일대의 모든 독일군이 로바트 강 서쪽으로 완전히 소개되었다. 제2군단은 OKH의 예상을 무려 60여 일이나 앞당기며 불과 열흘 만에 철군을 완료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제2군단이 불과 열흘 만에 철수 작전을 완료함으로써 지난 1년간 기묘하게 형성된 돌출부가 사라지고 전선이 곧게 펴졌다. <출처: 미육군 사관학교>

3월 1일 티모셴코는 마침내 데미얀스크 돌출부를 탈환했다. 하지만 독일군을 격파한 것도, 소모시킨 것도 아니고 별다른 노획물을 차지한 것도 아니어서, 그저 독일군이 후퇴한 지역을 뒤늦게 접수한 꼴밖에 되지 않았다. STAVKA의 실망은 대단했고 이런 결과에 대한 모든 비난이 티모셴코에게 쏟아졌다. 이를 만회하고자 그는 즉시 스타라야루사 탈환에 돌입했으나 역공에 걸려 또 다시 참패를 당했고 결국 3월 14일 해임되었다.

소련의 공세로 시작되어 약 보름 동안 이어진 2월 전투의 승패를 따진다면 독일의 승리라고 평가할 수 있다. 단순히 인명피해만 보더라도 소련은 전사상자가 33,000여 명이었지만 독일은 7,000여 명에 불과했다. 소련은 눈엣가시 같았던 데미얀스크 돌출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독일이 양보한 형국이었다. 이처럼 소련은 영토의 탈환이라는 명분 말고는 얻은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데미얀스크 전투 참전 기장. 독소전쟁의 여타 전투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방어전의 백미로 손꼽을 만한 사례였다. <출처: (cc)Tillmann Tegeler at Wikimedia.org>
1년간 벌어진 데미얀스크 전투는 인근에서 벌어진 여타 전투들이 워낙 크다 보니 그동안 많이 간과되었고 종종 그 의의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면이 있다. 하지만 10만의 제2군단이 장장 1년간 40여만의 북서전선군을 묶어 놓으면서 전략적으로 대단한 효과를 발휘한 덕분에 레닌그라드와 르제프에서 독일군이 선전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은근하게 빛을 발한 방어전의 백미()라 할 수 있었다.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