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과 그 대부분을 승계한 현재의 러시아는 두말할 필요 없는 군사대국이다. 한 목소리를 내는 나라들이 많아 합동 작전과 소모품의 호환을 염두에 두고 개발되는 서방의 무기들과 달리, 제2차 대전 이후 소련이 독자적으로 만든 무기는 미국이나 서방에 적대적인 나라들의 확고한 표준이 되었다. 하지만 단지 이념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했기에 소련제 무기를 사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소련-러시아에서 개발한 무기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측 무기와 충분히 경쟁을 벌일 만큼 성능이 좋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실 군사 관련 분야에서 이 정도의 자신감도 없이 소련이 세계사의 한 축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수는 없었다. 비록 실전을 벌이지는 않았다 해도 좋은 무기를 보유하지 못한 상태로 미국과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제2차 대전 전까지만 해도 소련제 무기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소련군이 숫자상으로는 세계 제일의 병력과 장비를 보유했음에도 독소전쟁 초반에 연전연패했던 이유 중 하나로 무기의 성능 부족이 거론되었을 정도다. 사실 T-34 같은 최신예 무기도 있었지만 당시 일선에서는 20세기 이전부터 사용하던 무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고전했다는 평가는 일종의 편견일 뿐이다.

단지 오래된 무기라고 해서 무조건 성능이 나쁘다고 폄하할 수는 없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모신나강 소총을 구닥다리라고 비웃었지만 정작 자신들도 비슷한 시기에 탄생한 Kar98k 소총을 주력으로 사용했다. 사실 환경과 조건만 맞는다면 오래된 무기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나강(Nagant) M1895 권총(이하 나강 권총)은 좋은 성능에도 불구하고 단지 오래전에 제작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됐던 대표적 무기 중 하나다.

무기 근대화에 나선 러시아

제정 러시아는 나름대로 강대국임을 자부했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변방으로 취급되었다. 근대화가 서유럽에 비해 뒤졌기 때문인데 그만큼 군사력에도 차이가 있었다. 좋은 무기를 만들 기술적 기반이 부족했기에 주로 외국에서 무기를 도입해 군대를 무장시켰는데 이러한 점은 제국주의 경쟁을 펼치는 데 있어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특히 19세기 중반의 크림전쟁(1853∼1856)은 러시아에게 크나큰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곳에서 벌어진 싸움이었음에도 연합군에게 패하는 굴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일단 무기의 열세가 두드러졌는데, 당장 전선에서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병사들의 소총에서부터 차이가 확연했다. 패전을 계기로 러시아는 대대적인 근대화에 나섰고 그런 과정에서 무기 개발에도 착수했다.

당장 기술력이 부족하다 보니 베르단(Berdan) 소총처럼 일단 해외에서 직도입한 후 국내에서 생산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여타 열강과 비슷한 시기인 1891년에 뛰어난 볼트액션 소총을 제작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AK-47 등장 이전까지 소련군 보병의 기본 화기로 맹활약한 모신나강 소총이다. 러시아는 이러한 자신감을 발판으로 해외 도입에만 의존해 온 권총의 개발에도 착수했다.

엄밀히 말해 현대전에서 권총은 호신용이나 지휘용으로 사용되는 무기다. 물론 눈앞에 적이 나타나면 돌이라도 던지며 싸워야 하는 것이 전쟁이지만 권총을 들고 최전선에서 싸우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군에서뿐 아니라 치안 용도 등으로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으므로 권총은 무장 세력이 갖추어야 할 필수 무기 중 하나다. 그동안 미국 스미스앤드웨슨(Smith & Wesson)사 등에서 만든 권총을 수입해 사용해 온 러시아는 이를 자국산으로 대체하려 했다.

고신 끝에 선택한 리볼버

러시아 당국은 모신나강 소총을 만들 때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벨기에의 나강 형제(Emile & Léon Nagant)에게 새로운 권총의 개발을 의뢰했다. 당시 군용 권총의 시류는 사용이 편리하고 장탄수가 많은 자동권총으로 서서히 넘어가던 중이었지만 나강 형제는 리볼버(Revolver)를 선택했다. 러시아의 거친 환경에서는 무엇보다 신뢰성이 중요한데 잔 고장이 많은 자동권총보다 리볼버가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게다가 자국 내에서의 양산을 전제로 하다 보니 당시 러시아의 기계공업 능력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무기를 설계해도 정작 이를 생산할 능력이 없다면 단지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권총이 단순한 무기 같아도 군사적으로나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경우는 양손으로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좋은 권총을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면에서 시대를 역행하는 선택이라 할 수 있었지만, 나강 형제는 기존의 리볼버보다 훨씬 뛰어난 성능을 구현하면 군용으로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들은 더블액션 방식은 물론, 상황에 따라 싱글액션 방식으로도 사격이 이루어지도록 했다. 또한 실린더에 7발을 장탄할 수 있도록 설계해 지속사격 능력을 약간이나마 높였다. 덕분에 사격 속도와 연사력이 초기 자동권총과 비교해 뒤지지 않았다.

장점을 얻기 위해 포기한 것

리볼버의 약점 중 하나가 화력이 약하다는 것인데 이는 사격 시 가스의 누출이 많기 때문이다. 밀봉된 형태인 자동권총은 상대적으로 가스 누출이 적어 탄을 밀어내는 데 보다 많은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다. 나강 형제는 리볼버로 그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고안했다. 우선 방아쇠를 당길 때 실린더가 함께 당겨지면서 레버와 실린더 사이의 틈을 최대한 막도록 했다.

더불어 화약을 담고 있는 약협부를 길게 만들어 탄두를 감싼 특이한 모양의 별도 탄환을 사용하도록 했는데, 마치 탄두가 탄피에 매립된 것 같은 모습이다. 격발 시 연장된 약협부가 총신 후단에 최대한 밀착되기 위한 것인데 덕분에 실린더가 당겨질 때 발생하는 실리더와 총신 사이의 틈을 완벽하게 메웠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가스의 누출을 막은 덕분에 나강 권총은 리볼버임에도 강력한 화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기존의 리볼버에 비해 구조가 복잡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탄환을 사용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대부분의 리볼버가 중절식이거나 스윙아웃 실린더를 채택한 것과 달리 고정된 탄창을 사용하다 보니 탄환을 갈아 넣는 것이 상당히 불편했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대용량에 사격이 편리하고 화력도 강력하다는 장점이 부각되어 나강 권총은 1895년 제식화되었다. 처음에는 벨기에에서 생산했지만 곧 러시아로 제작소를 옮겼다.

대학살의 상징이 되다

양산에 들어간 나강 권총은 급속도로 군과 치안 당국에 보급되었고 1930년 TT 권총이 등장하기 전까지 러시아-소련군의 주력 권총으로 사용되었다. 원래 TT 권총을 제식화하면서 즉시 도태될 예정이었지만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1945년까지 생산이 계속 이루어졌고 소련에서는 1950년대 중반까지 사용되었다. 이것은 콜트 M1911이 기록을 깨기 전까지 군용 제식권총으로는 최장 사용 기록이기도 했다.

나강 권총은 그야말로 격렬했던 역사의 현장에서 사용된 권총이었다. 같은 시기에 전 세계에서 수많은 권총이 쓰였지만 그 의의는 사뭇 달랐는데, 가장 큰 이유는 나강 권총이 사용된 20세기 초반이 소련-러시아 역사에서 제1차 대전, 공산혁명, 대숙청, 제2차 대전으로 이어진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국방뿐 아니라 체제 수호와 안정을 강제로 유지하기 위해 자국민을 탄압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특히 TT 권총이 제식화되면서 경찰, NKVD(내무인민위원회) 같은 후방 조직으로 이전된 나강 권총은 학살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 권총은 제1, 2차 대전 당시에 많은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의 도구라기보다 오히려 혁명과 대숙청의 혼란기에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세력의 살상 수단으로서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다. 물론 이는 총의 잘못이 아니라 지도자의 광기에 의한 것이었지만 나강 권총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제원

탄약 7.62×38mmR(7.62mm 나강탄) / 작동방식 더블액션, 싱글액션 / 전장 235mm / 중량 800g / 유효사거리 46m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