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이나 화살의 살상 능력이 변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전쟁 무기로써의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화약의 발명과 동시에 등장한 포(砲)는 상당히 생명력이 긴 무기라 할 수 있다. 비록 새로운 타격 수단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그 역할이 예전보다 축소되기는 하였지만 계속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여전히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효과를 발휘하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포는 현재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포병은 모든 군대의 당연한 기본 병과다. 정밀유도포탄을 사용하여 미사일처럼 목표물을 정확히 타격하는 방법도 등장하였지만 아직까지도 포는 화력으로 목표 일대를 제압하는 것이 주요한 임무다. 그런데 최근의 전쟁은 필요한 곳만 골라서 공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서 예전처럼 포탄의 비를 마구 날리지는 않는다.

어느덧 광범위한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제압하는 방식은 과거의 전쟁 기법이 되었다. 화력도 계속 중요하지만 예전에 비해 타격 정밀도가 요구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단지 화력만 놓고 보았을 때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포들은 과거의 전쟁에서 사용된 것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지난 제2차 대전까지 포 중의 포로 그 역할을 다한 거대한 괴물들이 있었는데, 바로 열차포(Railway Gun)다.

 

반비례하는 화력과 기동력

가장 쉽게 포의 사거리와 파괴력을 늘리는 방법은 구경을 크게, 그리고 포신을 길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최근 포탄은 과거 동급 포탄에 비해 파괴력이 커졌지만 그래도 위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키기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그런데 포탄의 크기가 클수록 포의 구경이 커질 수밖에 없고 또 멀리 보내려면 되도록 포신도 길어야 한다. 그 외 여러 부수적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일단 커다란 포가 당연히 위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무작정 포의 크기를 크게 만들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움직임 때문이다. 전쟁은 전선의 변동이 많은 동적인 행위이므로 상황에 따라 포도 이동하여야 한다. 당연히 포를 만들 때 기동력이라는 변수도 고려하여야 하는데 무게는 이동 능력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커다란 요소다. 포의 크기가 커지면 움직임이 둔해 질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화력과 기동력은 반비례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고속 기동전이 대세가 된 현대에 와서 기동력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더해 대포병전(對砲兵戰) 수단이 발달하면서 기동력은 포병의 생존을 담보하는 주요 방어 수단이기도 하다. 지금은 방열하고 사격을 한 후 적의 반격을 피하기 위해 조속히 안전지대로 이동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에 따라 최신 포들은 자주화, 차량화 되거나 아니면 견인이나 항공 이동이 원활하도록 최신 기술과 소재를 사용하여 경량화 되는 추세다.

 

시대가 요구한 거포

사실 이는 현대에 들어 새롭게 등장한 문제가 아니고 포가 탄생한 당시부터 계속 이어 온 고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반대로 기동력을 완전히, 혹은 대부분 포기하고 극단적으로 화력만 증대시킨 포들도 있다. 요새나 해안가에 순전히 방어 목적으로 설치된 거포들이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포상을 들락거릴 정도의 제한적 이동이 가능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완전히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는 사례도 있다.

화력만 신경 쓰다 보니 포가 커졌고 결국 이동을 포기한 것인데, 욕심 많은 사람들은 그런 거포를 당연히 공격 작전에도 사용하고 싶어했다. 특히 철옹성 같은 요새를 공격하려면 거포가 반드시 필요했는데 문제는 전선까지 이동시킬 수단이었다. 20세기 이전만 해도 지상에서 수십 톤이 넘는 중량의 화물을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은 철도 밖에 없었다. 그런데 포를 열차에 싣고 목적지까지 가져가서 방열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차라리 열차에 포를 장착하고 목표 지점까지 이동시켜 사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생각하였다. 그렇게 열차포가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세계 곳곳에서 열차포 제작을 주장하고 시험적으로 제작한 이들이 등장하는데,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사례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인 1862년 새비지 역(Savage's Station) 전투였다. 당시 남군이 32파운드 함포를 무개화차에 적재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여러 나라에서 대구경의 포를 장착한 열차포를 속속 제작하였는데 특히 막강한 해군을 보유한 영국은 기존에 전함에 장착한 9.2인치(233.7mm) 함포를 이용한 열차포를 만들어 1900년 제2차 보어전쟁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기존에 사용하던 거포를 단순히 열차에 얹었다는 것을 제외하고 아직 완충 장치나 사통 장치 등은 빈약하였다. 따라서 극히 제한된 작전에만 사용이 가능한 실험적인 수준이었다.

 

공룡들의 전성기

하지만 1914년 발발한 제1차대전은 순식간 열차포를 강력한 화력 투사 수단이 되도록 만들었다. 전쟁 초반 독일의 공격이 마른(Marne)에서 저지당하며 서부전선이 급속히 고착화되자 이를 돌파할 보다 강력한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열차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전쟁 중반기인 1916년 이후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은 거대한 열차포를 경쟁적으로 제작하여 속속 전선에 투입하였다.

당시 열차포는 대개 구경 240mm~280mm 수준이었지만 14인치(355mm) 구경의 BL 14inch RG(영국)와 15인치(380mm) 구경의 SK L/45(독일) 같은 거포도 있었다. 함포를 개조하여 열차에 탑재한 이들은 무게가 250톤이 넘었고 유효사거리도 30킬로미터 이상이었다. 한마디로 당대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던 괴물들이었는데, 이른바 No Man's Land 라는 말로 대변되는 것처럼 서부전선을 초토화하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제1차대전은 진정한 열차포의 전성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가장 결정적 이유는 당시 공군의 능력으로 의미 있는 폭격 작전을 펼치기가 어려웠고 전선의 변동도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포병은 유일한 화력 투사 수단과 다름없었고 따라서 대구경의 장거리 타격이 가능한 열차포의 활약이 돋보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이후 제2차 대전 당시에도 많은 열차포들이 운영되었으나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못하였다.

 

그렇게 사라진 공룡

전쟁의 방법이 공군과 기갑부대를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으로 바뀌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비록 화력은 강하지만 폭격기와 비교한다면 열차포로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더불어 철로가 부설된 곳에서만 사용이 가능하고 그것도 지형상 극히 제한된 곳에서만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거대한 만큼 준비와 운용에 시간과 비용은 물론 병력도 많이 필요하여 작전 효율성이 너무 떨어졌다.

예를 들어 구포(臼砲)나 공성용 박격포를 제외하고 역사상 최대인 800mm 구경에 1,350톤의 중량을 자랑하는 ‘슈베러 구스타프(Schwerer Gustav)’는 작전지역에 전개하려면 포를 분해하여 수십 량의 열차에 나누어 적재한 후 이동하여야 했다. 게다가 목적지에 와서 방열을 하려면 진지를 구축한 후 별도의 철도를 부설하고 조립하여야 하는데, 이 기간만도 대략 1달이 넘게 걸렸다. 더불어 250명의 운용 병력 이외에 시설 구축을 위해 약 2,500여명의 인원이 추가로 필요하였다.

그렇다 보니 정작 실전에서 활약한 것은 1942년 세바스토폴(Sevastopol) 전투 단 한 차례밖에 없다. 사실 이 정도라면 무기로써의 가치가 사라졌다고 보아야 한다. 전쟁도 당연히 효율적이어야 승리할 수 있다. 결국 다양하고도 새로운 공격 수단이 속속 등장하자 거대한 열차포들은 제2차대전을 끝으로 생명을 고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에 벌어진 거대한 전쟁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지만 계속해서 주인공으로 활약하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았고 어느덧 시대에 뒤졌다.

사실 무기는 효용가치가 사라지면 그 어떤 상업 제품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도태가 된다. 한때 전선을 호령하던 황제 같은 모습으로 군림하던 열차포는 이제 극히 일부만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고 그 활약상은 빛 바랜 사진이나 기록 필름으로만 전하고 있다. 강하기는 하지만 너무 크다 보니 변화에 적응이 늦어서 그런 운명을 맞은 것인데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지구상에서 사라져 화석으로만 남은 공룡과 같은 모습이 연상된다.

 

글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