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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6군단 쿠데타(?) 사건 진압작전의 내용
작성자 : 북한맨(000.000.xxx.xxx)
입력 2006-02-02 16:43:28
  • 조회수 9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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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명 - 아래의 내용은 증언에 의한 것으로 북한관련 잡지에 발표된 것이며 잡지의 발표 내용은 아래의 내용을 요약하였습니다. 6군단 사건에 대해서는 1.아직도 국내에서 전문가들과 언론의 논의가 많고 2. 여기 사이트게시판에서도 논의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아래의 내용은 진술의 과정에서 진실성이 확인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따라서 본 내용은 적어도 70%정도의 정확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쿠데타냐, 반혁명사건이냐, 또 아래의 내용의 진실성에 관해서도 많은 논의가 있을 것으로 보이나
저 또한 1980년대 중반에 이미 반혁명적(?) 사고를 갖고 있던 군인(그로서는 반혁명이라기보다는 애국충정이라고 보아야 할)을 만난 적이 있음을 알려드리며 북한에서 체제와 김일성, 김정일을 반대하는 모의나 행동들은 끊임없이 있어왔고 오늘에도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립니다.

현재 남한에 8천여명의 탈북자들이 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실 심층적인 자료조사를 하면 많은 멋진, 훌륭한, 값어치 있는 자료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못하는 것이 지금의 세태라 좀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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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아래의 글에 많은 의견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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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쿠데타 미수 사건(일명 6군단사건)

- 1996년 3월 6군단 사건은 반정부 사건이었다. 6군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진압작전 진행은 3일간이었다고 한다.

- 96년 3월경 밤에 전투비상(준 전시상태에 해당) 발령이 떨어져 새벽 3시에 작전근무실에 처음 보는 군관 3명이 도착해 있었다. 한 명은 대좌(대령)이고 나머지 두명은 상좌(중령)로 최고사령부 관평원이라고 소개를 했는데 대좌가 최고사령부 참모부 관평원이라고 하면서 전투비상 발령을 내렸으며 명령 내용은 특공대 교방(교체) 훈련이었다. ○○○시는 17저격여단(특수부대)와 76저격여단이 있었는데 명령은 새벽 4시경에 떨어졌으며 평시 훈련에서는 전투비상 해제시간도 알려주는데 관평원들은 해제시간을 알려주지 않았다.

- 이 때 최고사령부 참모부 관평원들이 지휘소갱도(터널-이하 갱도)를 지휘처로 정하였는데 지휘소갱도(전쟁을 대비한 지하갱도 지휘시설)가 사용된 것은 건설 이후 처음이었다고 한다. 시당 책임비서도 이때 처음 지휘소갱도에 들어왔다. 또한 훈련이면 여단장인 책임비서가 지휘를 해야 함에도 관평책임자가 훈련상황을 총 지휘했다. 책임비서와 관평원책임자가 지휘소갱도의 려단장 방에 자리를 잡고 훈련지휘를 했다.

- 관평원의 전투비상 명령으로 ○○○지부의 민간무력인 지방군을 작전구역으로 내몰았다. 335련대(교도대)가 900대(민간화물열차 식별 번호) 열차를 타고 작전구역으인 함북도 부령 구역으로 이동을 하는데 만대(군수열차 식별번호로 네자리번호를 갖는데 이 때문에 만대라고 함) 열차 지붕에는 정규군 특수부대인 17저격여단이 탔다. 이를 알고 335연대 대열참모가 지휘소갱도에 전화로 보고하니 관평책임자는 그대로 작전지역까지 가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원칙적으로 훈련상 적에 해당하는 열차 지붕위의 17저격여단을 소탕해야 하지만 관평책임자의 명령으로 같은 열차를 타고 이동한 것이다. 목적지인 전거리를 지나 함경북도 지역(정확한 지명 모름) 창평에서 335연대가 하차하고 보니 지붕에 탔던 17저격여단은 어느새 열차에서 사라졌었다고 한다. 335연대는 방어구역 차지했다.

- 유별난 훈련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오후 3시경이 되어 6군단 정치위원과 안전국장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체포 보고가 올라오고 긴장이 조금 완화되자 책임비서와 관평검열대는 전방지휘소로 나간다며 몽땅 지휘소갱도를 떠나 전방지휘소로 되어 있는 군의대 야영소(지상에 있는)로 이동했다. 전투비상 명령이 해제된 것은 하루 더 지나서 해제되다보니 꼭 3일간 봉쇄됐었다.

- 작전 진행정형을 종합해보면 6군단 정치위원과 구데타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저격여단(특수부대)들은 조·중 국경선에 위치하고 있는 ○○○, 무산 등지에서 청진쪽으로 포위망을 좁혀갔고 해상저격여단(해상특수부대로 남한의 해군특전대에 해당)이 바다를 봉쇄하며 청진으로 포위망을 좁혀갔다. 이렇게 국경과 해상을 봉쇄한 후에 공중저격여단이 공중에서 낙하하여 6군단 쿠데타 세력을 체포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체포 직후에 밝혀진바에 의하면 6군단직속 포병대는 도당 청사를 비롯 중요 건물을 모두 조준해놓은 상태였다. 포 연대장, 대대장들은 작전좌표준대로 조준하다보니 조준 대상이 어딘지 몰랐다. 이처럼 쿠데타 준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6군단 군단장이 2년전부터 중병을 치료중이어서 결원상태였기 때문에 군단정치위원이 쿠데타 준비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6군단쿠데타 사건이후 ○○○시 인근에 있던 무력부 총참모부 산하 매봉무역회사 사장도 남한과의 연락책이어서 같이 잡아갔다고 한다.

- 6군단 쿠데타 사건이 일어난 이후 6군단은 해산하고 전방의 5군단 일부 부대들을 6군단지역 군대와 교체하고 9군단으로 부대명칭을 고쳤다. 북한군 군단급에서는 대외거래를 독자적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6군단 사건이 아편밀수나 기타 부정비리와 관련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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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맨 (127.0.xxx.xxx)
    2006-02-02 22:11:35
    회오리 님의 답글에 저도 동감입니다. 현실성과 목적성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하고 외면과 내면의 차이인 것 같기도 합니다. 최종적인 확인은 김정일 체제가 붕괴되어야 하겠죠.
    회오리님의 좋은 활동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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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dford (127.0.xxx.xxx)
    2006-02-02 19:33:13
    다만 쿠데타를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도 성공가능성은 회의적으로 보더군요. 일부부대가 평야으로 몰려오더라도 호위총국 병력 20만과 시가전을 해야 하는데..성공하기 쉽겠냐고 반문하더군요. 호위총국자체가 반란을 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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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dford (127.0.xxx.xxx)
    2006-02-02 19:15:09
    인천상륙작전중 해안에 상륙한 병사들은 아마도 자신들이 인천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겁니다. 회오리님이 몰라도 이상한것은 아니죠. 더구나 저런일은 병사들끼리 쉬쉬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될지는 몰라도 공식적으로 병사들에게 말하지도 않을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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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베로 (127.0.xxx.xxx)
    2006-02-02 18:01:02
    저같은 초보는 뭐라고 판단하기도 어려워서.. 하지만 여기서 회오리님의 고견을 보면서 언론에서 떠드는 일방적인 내용보다는 다소 균형을 잡을수 있어 회오리님께 고맙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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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오리33 (127.0.xxx.xxx)
    2006-02-02 17:57:29
    잘보았습니다. 경보병두개 여단이 특공대 훈련목적이라는 명분으로 청진 북쪽에 전개된것은 저도 보았습니다. 다만 진압작전에 항공육전대가 공중에서 낙하산 으로 강하한것은 아니엿음이 분명합니다. 6군단 전투준비상태를 검열한다고 최고사령부 검열원들이 파견되여 왔고 공중에 날수잇었던건 직승기 몇대뿐이엿습니다. 라남역전옆에 잇는 군단 연유창고의 재고량과 연유수송차량의 정량이 연유가 아닌 물이 흘러나온것부터 시작이 되였습니다. 주요 민간인은 라남구역 편의 관리사업소 초급당비서와 라남구역 책미비서 ..도당 조직비서 등입니다. 6군단은 구테타를 일으킬만한 위치도 무장력도 아닙니다.
    6군단혼자서 평양과 동떨어진 위치와 무력으로 ....상상이 안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에 있을때는 비교적(군관들 포함) 반혁명..군단부정부패사건으로 알지만 탈북한이후 구테타사건이라고 물어보는 남쪽사람들에게 대략적인 소문으로 들었던 내용을 구테타라고 쉽게 단정지어 대답을 해주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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