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기의 명가, 피에트로 베레타

이탈리아의 피에트로 베레타(Pietro Beretta) 사는 16세기에 세워진 회사다. 1526년 창립 당시에는 아르퀘부스(arquebus)라는 초기의 화승총을 만들었고, 이 총기로 베네치아 함대는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을 치렀다. 즉, 현존하는 주요 총기회사 가운데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회사다.

베레타는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탈리아군을 위한 총기를 만들면서 급성장했다. 종전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세계 최대의 총기회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베레타는 명품 샷건을 만드는 회사로도 유명하지만 역시 독특한 스타일의 권총으로 명성을 날려왔다. 특히 M1934 권총은 이탈리아군뿐만 아니라 독일군도 사용했고, 노획한 연합군이 애용하기도 했으며, 100만 정 이상 생산되었다.

베레타의 권총들은 1923 모델부터 총열 대부분이 드러나는 독특한 슬라이드 디자인으로 유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0년대 말에 베레타는 M1934 시리즈를 대체할 새로운 권총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베레타 1951(보통 M951로 많이 불림) 권총이다. 380ACP 탄환을 사용하는 M1934와 달리 M951은 9mm 파라블럼(Parabellum)탄을 사용했는데, 이에 따라 쇼트 리코일(short recoil) 방식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M951은 과감하게 발터(Walther) P-38의 로킹 배럴(locking barrel) 방식을 채용했다.

- 원더나인 시대의 새로운 총기

M951을 개발함으로써 베레타는 소구경탄의 권총만 잘 만드는 업체라는 시장의 선입견을 떨쳐내고 본격적인 제식권총의 모델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M951은 2차대전후 등장한 총치고는 아쉬운 점이 너무 많았다. 브라우닝 하이파워(Browning Hi-Power)가 보여줬던 대용량 복열(Double-column) 탄창이나 전후에 인기를 끌던 더블액션 방아쇠에 대한 필요성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래서 1970년에 총기설계자인 베레타(Pier Carlo Beretta), 발레(Vittorio Valle), 마체티(Giuseppe Mazzetti)가 새로운 권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총기가 먼저 노린 것은 국내 시장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이탈리아 국가경찰(Corpo delle Guardie di Pubblica Sicurezza: 1982년까지만 해도 군 조직이었음)은 제식권총을 통일하기로 했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베레타 34 모델을 주로 써왔고, 일부 부대는 베레타 951 모델을 채용했다. 국가경찰 이외에 국가헌병대(Carabinieri)도 새로운 권총이 필요했다. 또한 기존에 M951을 채용해왔던 이탈리아 육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1975년 최초의 베레타 모델 92가 등장했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 베레타도 ‘원더나인(Wonder Nine)'(9mm 대용량 자동권총), 즉 15발의 대용량 장탄수에 더블액션 방아쇠를 가진 9mm 자동권총을 만들었다. 양산은 1976년 5월부터 시작되었는데, 모델 92의 초기형은 '스텝 슬라이드(step slide)'라고 불린다. 슬라이드가 총열 부분 뒤로는 계단처럼 올라와 단차가 있기 때문이다. 모델 92는 약 5만 2,000여 정이 생산되었는데, 그중에 7,000여 정만이 스텝 슬라이드 모델이라고 한다. 베레타 모델 92는 우선 이탈리아 해군 특수부대인 콤수빈(COMSUBIN)에 채용되었고, 마침 새로운 제식권총을 찾고 있던 브라질군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제식총기로 채용되기까지 했다.

한편 모델 92는 다시 한 번 진화를 한다. 모델 92에서는 안전장치가 프레임 쪽에 달려 있었는데, 오직 안전장치로서 기능할 뿐이지 디코커(decocker: 장전 해제 장치)는 아니었다. 즉, 더블액션 발사상태로 가기 위해서 수동으로 해머를 장전상태에서 해제해야만 했다. 경찰용 총기로는 위험하다는 말이다. 이에 따라 안전장치가 디코커를 겸하도록 설계를 변경하여 슬라이드에 안전장치를 위치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모델 92S다. 1977년 92S가 등장하자 국가경찰과 국가헌병대는 애초의 계획에 따라 M1934 권총을 92S로 교체했다. 92S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 시장에 수출되기 시작했다.

- 사상 최대의 시장인 미군을 겨누다

한편 1977년 미 공군은 제식권총이던 스미스 앤 웨슨(Smith & Wesson) M15 리볼버의 재고분이 없어짐에 따라 새로운 권총을 선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미 의회가 실태를 파악한 결과 미 공군은 무려 25종의 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사용하는 탄환까지 모두 달라 온갖 종류의 탄환과 각종 총기의 수리부속을 준비하는 것이 감내 수준을 넘어섰다. 의회는 국방부에 앞으로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의 제식권총을 통일하고 구형 권총들은 점차 퇴역시킬 것을 권고했다. 이에 따라 합동제식소화기사업(JSSAP, Joint Service Small Arms Program)(이하 JSSAP)이 시작되었다.

사업 시작 소식이 알려지자 콜트, 스미스 앤 웨슨, FN, HK 등 그야말로 전 세계 유수의 총기회사들이 덤벼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최소 구매 수량이 22만 정이었기 때문이다. 1979년부터 선정사업이 시작됨에 따라 베레타는 공군시험평가를 위해 모델 92S-1을 개발했는데, 추후 이는 모델명이 92SB로 바뀌었다. 92SB는 미 공군의 요구에 따라 공이안전장치, 좌우대칭형 안전장치, 3점식 가늠자/가늠쇠를 채용했으며, 권총 손잡이 하단에 장착되었던 탄창멈치를 방아쇠울 근처로 옮겨 신속한 탄창 교체가 가능하도록 했다. 92SB의 진화를 목격한 이탈리아 국가경찰과 국가헌병대는 92S의 추후 도입분은 92SB로 교체했다.

1981년 미 공군의 시험평가 결과, 유수의 9mm 권총들을 제치고 베레타 92S-1이 JASSP 모델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공군 주도의 시험평가가 잘못되었다면서 미 육군이 이의를 제기했다. 진흙의 종류를 잘못 사용하여 베레타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하는 등 내구성 시험평가에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미 국방부는 그렇다면 육군이 내구성 평가만 해보라며 공을 넘겼다. 미 육군은 기준을 까다롭게 세워서 재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 1982년에 선정할 만한 총이 없다고 의회에 보고했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사실 육군은 익숙한 데다가 아직 수량도 충분히 많은 M1911을 바꾸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의회의 압박에 1983년부터 다시 권총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JASSP는 육군이 시험평가를 주도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XM9 SPT(Service Pistol Trials)사업이었다. 이 새로운 사업에도 유수의 업체들이 몰려들었다. XM9 차기 권총의 후보 기종은 모두 8개로 다음과 같았다.

•콜트(Colt's Manufacturing Company): SSP
•스미스앤 웨슨: 459A
•베레타: 92SB‑F
•시그 사우어(SIG Sauer): P‑226
•헤클러 앤 코흐(Heckler & Koch): P7
•발터(Walther): P88•슈타이어(Steyr): GB
•FN(Fabrique Nationale d'Herstal): 브라우닝(Browning) BDA

- 드디어 M9 권총으로 채용

XM9 선정사업을 위해서 베레타는 92SB 모델을 개량한 92SB-F(추후 92F로 재명명)를 선보였다. 92SB-F 모델은 외형적으로는 방아쇠울을 보강하여 양손으로 지지가 가능하도록 했고, 브루니톤(Bruniton) 코팅으로 표면 처리를 하여 부식을 방지하도록 했다. 손잡이도 하단에 각도를 주어 확실한 그립이 가능하도록 했고, 무엇보다도 약실에 크롬강 도금을 하여 신뢰성을 높였다. 치열한 시험평가에서 8개 기종 가운데 92SB-F와 시그 사우어의 P226이 최종 후보로 남았고, 피 말리는 입찰이 벌어졌다. 그중에서 단 900만 달러를 적게 쓴 베레타의 92SB‑F가 선정되어 1985년에 M9 권총으로 채용되었다. M9 권총의 미군 납품가는 정당 178달러 50센트 수준이었다. 모두 31만 5,930정이 주문되었으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가격이었다.

M9은 당시로서는 꽤나 혁명적인 권총이었다. 특히 베레타 특유의 오픈 슬라이드 설계 방식을 채택해 슬라이드에서 총열 부분이 대부분 외부로 노출되는 형태였다. 탄창은 15발을 장전할 수 있고, 슬라이드 쪽 좌우에 위치시킨 안전장치는 동시에 작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여담이지만 베레타 M9 권총은 모양새가 예뻐서인지 할리우드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영화 <다이하드(Die Hard)>나 <리썰웨폰(Lethal Weapon)> 등에서 주인공이 들고 나오는 총들이 M9 권총(정확히는 민수형 92F)이다.

그러나 M9은 채용 초기에 엄청난 사건을 겪었다. 1987년 9월경 미 해군 특수부대 실(SEAL) 6팀 대원이 사격 중에 슬라이드가 분리되면서 대원의 얼굴을 강타한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를 일으킨 모델은 정확히는 M9이 아니라 민수용으로 나왔던 베레타 92SB였다. 하지만 1988년 1월과 2월에는 제식권총으로 채용된 M9 권총들이 똑같은 문제를 일으켰다. 소식을 들은 미 육군은 1988년에 문제점을 파악하기 위해 7개월간 집중적인 시험평가를 실시했다. 시험한 총기 가운데 14정이 적게는 4,900발, 많게는 3만 500발에서 비슷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의 원인을 추적해보니 탄환이 문제였다. 미군이 사용하던 M882 탄환은 유럽에서 사용하던 NATO 표준 9mm 파라블럼탄보다 장약이 더 많이 들어가 다소 쎈 탄환이었다. 제작사는 탄환의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했지만 미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은 슬라이드의 강성이 약한 점을 지적하면서 개선을 요구했다. 미국의 생산공장에서 슬라이드 개선 작업이 이뤄졌고, 슬라이드 분리 사고 시에도 사수가 다치지 않도록 내부에 안전장치를 만들어서 문제를 해결했다. 이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모델은 베레타 92FS로 분류되었다.

- 전성기에서 황혼기로

미군이 베레타 92 모델을 채용하면서 베레타는 전성시대를 맞았다. 군 다음으로 권총을 많이 채용하는 곳은 경찰인데, LAPD(로스엔젤레스시 경찰국)와 LA카운티 보안관서가 채용하면서 수많은 경찰관서에서 92FS 모델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의 국가헌병대(Gendarmerie)는 이미 1987년부터 92G 모델을 PAMAS G1이라는 제식명으로 11만 정 채용하기로 했다. 상당한 물량이다 보니 프랑스 MAS 조병창에서 면허생산했다.

베레타가 미군에 본격적으로 배치되는 시기는 전쟁과 맞물렸다. 베레타가 지급된 후 최초로 시작된 분쟁이 1989년 미군의 파나마 개입이었다. 그리고 1991년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이라크 대테러 전쟁 등에서 베레타 M9 권총은 일선을 지키면서 활약해왔다. 2012년경에 이르러 M9 권총은 무려 60만 정이 미군에 공급되었으며, 미군은 2017년까지 10만 정을 더 구매했다.

오랜 기간 채용하는 사이에 개선의 필요성도 제기되어 2006년 M9A1이 등장했다. M9A1은 우선 프레임 하부에 1슬롯 피카트니 레일(Picatinny rail)을 장착하여 권총용 레이저 조준기나 전술 라이트를 장착할 수 있도록 했다. 2015년에는 M9A3가 등장했다. M9A3는 3슬롯 레일을 장착하고, 탄창은 기존의 15발에서 17발로 늘어났다. 또한 소음기 장착이 가능하도록 총열 끝에 나사선을 만들었고, 손잡이는 버택(Vertec)이라는 모델 92 개량형의 것을 채용했다. 총기의 색상도 최근의 추세에 맞춰 사막색으로 발매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차기 권총 XM17 사업에서 베레타는 패배했다. 한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차기 권총인 M17로 시그 사우어의 P320 MHS 모델이 선정되면서 점차 미군에서 퇴출될 전망이다. 미군에 앞서 이미 2003년부터 LA경찰국도 베레타 92FS에서 글록(Glock)으로 제식권총을 전환했다. 권총의 프레임에 플라스틱의 일종인 폴리머(polymer)를 사용하여 무게를 줄인 권총들이 시장을 장악하면서 베레타 92와 같은 고전적 권총들의 입지가 줄어든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추세에 발맞춰 베레타는 PX4 스톰(Storm) 권총을 2004년부터 발매했지만, 폴리머 권총의 후발주자로서 아직 큰 히트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베레타 92 시리즈는 당분간 일선을 지키겠지만, 결국은 당대의 명총으로 이름을 남기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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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레타 92 시리즈의 특징과 운용 현황, 변형 및 파생형은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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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양욱 | 군사전문가
서울대학교 법대를 거쳐 국방대학교 국방관리대학원에서 군사전략을 공부했고, 줄곧 국방 분야에 종사해왔다. 중동지역에서 군 특수부대를 훈련시키기도 했고, 아덴만 지역에서 대(對)해적 업무를 수행하는 등 민간군사요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컨설팅과 교육, 훈련을 제공하는 민간군사서비스(PrivateMilitary Service) 기업인 AWIC(주)의 대표이사다. 또한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수석연구위원이자 국방부·합참·방위사업청 자문위원, 해·공·육군 정책자문위원으로 우리 국방의 나아갈 길에 대한 왕성한 정책제안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