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에 거대한 국토 혹은 많은 인구를 보유한 나라들은 많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강대국이 될 수는 없다. 경제력과 군사력도 뒷받침 되어야 하는데, 미국은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엄청난 경제력에 더해 그 누구의 추월도 허용치 않는 무지막지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어 가히 초강대국이라 할만하다. 한때 소련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지만 결국 체제 붕괴로 막을 내렸고 현재는 중국이 도전하고 있지만 아직 미국과 대등하게 맞서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패권국의 자부심이기도 한 군사력을 최강으로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최고의 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군수 산업은 현재 경쟁력을 지닌 몇 안 되는 미국의 제조업 분야다. 총부터 핵폭탄까지 미국의 무기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무기를 국산으로만 도배할 수 없다. 기술이 없다기보다는 해외에서 도입하는 것이 유리한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총기는 수요도 많고 미국산의 품질도 좋은 편이어서 전통적으로 미군은 국산품을 애용하여 왔다. 서부 진출 역사와 총기에 관대한 미국의 문화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권총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다. 하지만 이러한 불문율을 깨면서 미군용으로 선택된 외국산 권총이 있다. 바로 베레타 92(Beretta 92)이다. 그것도 백 년 가까이 미국의 상징으로 군림하였던 터줏대감 M1911 권총을 대체하기 위한 사업에서 당당히 선택되었다.

미국의 자존심을 대체하다

오랫동안 미군의 제식 권총이었을 만큼 M1911은 좋은 성능의 권총이다. 그러나 군용으로 사용하기에 장탄수가 적고 초탄 발사 시 해머를 코킹하거나 슬라이드를 당겨줘야 하므로 시간이 걸렸다. 대구경탄을 사용하여 살상력은 좋지만 그만큼 반동이 커서 무게가 여타 권총에 비해 무겁다. 때문에 휴대와 조준이 힘들고 정확한 연사가 어려워 제대로 사용하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도 불평을 불러왔다.

당연히 일선에서는 이런 단점을 개선한 더 좋은 권총을 요구하였고 미군 당국은 1980년대 들어 새로운 제식 권총 사업을 시작하였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 유수의 총기 제작사들이 거대한 시장을 놓고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놀랍게도 마지막에 최종 후보로 남은 것은 미국제가 아니라 이탈리아 베레타(Fabbrica d'Armi Pietro Beretta)社가 출품한 베레타 M92SB-F(이하 베레타 92)와 스위스-독일 합작사인 지그-자우어(SIG-Sauer)社의 P226이었다.

한마디로 미국의 몰락이었다. 사실 미군이 사용할 총기 납품 경쟁에 외국 업체가 참여한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M1911의 채용 당시에도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독일 루거(Lugar)社의 P08이었을 정도였다. 다만 국산품에 대한 선호도가 크고 생산 업체의 로비로 말미암아 비슷한 성능이라면 미국제가 채택될 가능성이 월등히 컸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베레타 92와 P226의 성능이 상당히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명성

막상막하의 경쟁 끝에 가격 측면에서 유리하고 미국 내 면허 생산에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베레타 92가 간발의 차이로 선정되었다. 베레타 92는 미국에서 M9이라는 별도의 제식번호를 부여 받고 1985년부터 보급되면서 기존 M1911을 급속히 대체하여 나갔다. 그런데 1972년에 개발된 베레타 92는 미군에서 채택하기 이전부터 이미 뛰어난 권총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던 상태였고 많은 나라에서 사용 중이었다.

이탈리아 외에 베레타 92에 처음 관심을 보인 나라는 브라질이었다. 1975년 군경용 권총으로 채용되어 완제품을 소량 구매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일선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공급이 딸리게 되자 1983년부터 자국 내 타우르스(Forjas Taurus SA)社에서 PT-92라는 이름으로 라이선스 생산하였다. 브라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근의 칠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외에도 리비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까지 수출하였다.

대만의 T75, 프랑스의 PAMAS-G1, 남아프리카공화국의 Vector Z88, 스페인의 Llama M82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베레타 92를 라이선스 생산한 권총들이다. 미국의 M9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보니 어쩌면 베레타 92는 다양한 얼굴로 현지화에 성공한 가장 대표적인 권총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유사품이 판치는 상업 시장에서 흔히 원조를 따지는 것처럼 민수 총기 시장에서는 베레타에서 만든 제품을 여전히 최고로 대접하고 있다.

편견을 뛰어넘는 기술력

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전쟁사를 보면 이탈리아는 수시로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그다지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지는 못하였고 더불어 이탈리아 제 무기의 평가도 그리 좋지 못하였다. 오죽하면 제2차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연전연패 하는 이탈리아군을 돕기 위해 원정을 갔던 롬멜이 이탈리아군을 보고 ‘이런 무기를 쥐어주고 싸우라는 무솔리니의 결정에 머리카락이 곤두선다’고 하였을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베레타 92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갈고 닦은 기술력이 있었기 때문에 명품 권총이 탄생한 것이다. 이를 개발한 베레타는 1526년에 설립되어 무려 5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장수기업으로, 1918년에 개발한 M1918은 역사상 최초의 기관단총들 중 하나일 만큼 기술력도 뛰어났다.

제1차 대전 발발 당시에 이탈리아군은 글리센티(Glisenti) M1910을 제식 권총으로 사용 중이었으나 복잡한 구조 등으로 인하여 생산성이 나빠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권총의 개발을 의뢰 받은 베레타는 블로우백(blowback) 방식을 사용한 베레타 M1915를 만들어 군에 대량 납품하면서 권총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기반으로 베레타 M1922, M1934를 연이어 개발했다.

특히 9mm 파라블럼(Parabellum)탄을 사용하는 베레타 M1934는 제2차 대전 당시 사용된 모든 권총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고의 성능을 인정받아 이탈리아제 무기로는 보기 드물게 연합군이 노획하여 애용하였다. 이러한 기술력과 전통을 바탕으로 베레타 92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해 이탈리아제 무기의 성능이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편견이라 할 수 있다.

뛰어난 기술력과 다양한 변신

베레타 92는 명중률이 높고 연사에 유리하다. 장전과 탄피 배출을 부드럽게 처리하는 오픈슬라이드 와 총신 밑에 슬라이드와 총신을 블록으로 연결하여 사격 시 반동으로 인하여 총이 위로 들리지 않게 만드는 로킹 블록 배럴(Locking Block Barrel)을 채택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이런 기술이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단지 적용만 한다고 권총의 성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베레타는 이를 이용하여 좋은 권총을 만들 줄 아는 기술력이 있었던 것이다.

성능 외에 미군이 베레타 92를 제식화한 이유 중에는 초보자도 약간의 훈련을 거쳐 쉽게 사용할 수 있으며 장탄량이 M1911의 두 배 가량인 15발이나 되는 넉넉함도 있었다. 그런데 실전에 배치되어 사용하던 도중 슬라이드가 파손되는 사고가 수시로 벌어졌다. 조사 결과 슬라이드 내구성에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밝혀져 대대적인 개조에 들어가게 되었고 개량 모델인 베레타 M92FS를 제작했다.

베레타 권총들은 단순한 구조와 적은 부품으로 말미암아 생산성이 뛰어났고 유지보수도 편리하였다. 간단하다 보니 사용자의 다양한 요구에 맞춰 개량도 쉬운 편인데 특히 베레타 92는 파생형이 다양한 권총으로도 유명하다. 지난 2010년에도 디자인을 개량하고 레일을 추가한 베레타 92A1이 출시되었다. 한마디로 끓임 없는 변신과 개량을 통해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베레타 92도 단점이 있다. 대표적으로 9mm 권총탄을 사용하기 때문에 파괴력이 부족하다. 특히 45구경 ACP탄을 사용하는 M1911을 오랫동안 사용해온 미군 특수부대 요원 중에는 화력이 만족스럽지 않다며 사용을 기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설령 그런 일부 단점이 있더라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이 지켜오던 총기에 대한 오랜 자존심을 접도록 만들었을 만큼 장점이 훨씬 더 많은 권총 임에는 틀림 없다.

제원

탄약 : 9x19mm 파라블럼 / 작동방식 : 쇼트 리코일 / 전장 : 217mm / 중량 : 975g / 유효사거리 : 50m / 급탄 15발 탄창 외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