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도와준 세계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였을 때 국제사회는 한 목소리로 소련을 맹비난하였다. 진주만 급습 전까지 중립을 유지했던 미국이 전비로 사용하라고 1,000만 달러의 차관을 긴급 제공했고 역시 중립국인 스웨덴이 각종 지원과 더불어 9천 명 가량의 의용병을 급파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주변 강대국의 위협에 시달렸던 덴마크, 노르웨이, 헝가리,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등에서도 자원한 병력들이 핀란드로 달려왔다.

하지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적 비난을 하는 정도에 그치고 수수방관하였다. 비록 폴란드가 사라져 의미가 없어지긴 했지만 형식상으로는 독일과 교전상태였기에 여력이 없다고 핑계를 대며 먼 산만 보았던 것이다. 그들 또한 침략을 자행한 소련처럼 핀란드가 곧바로 무너질 것이라 예상하여 지레 포기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핀란드의 예상 밖의 선전이 널리 알려지자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1940년 2월, 영국과 프랑스는 10만 정도의 병력을 노르웨이에 상륙시켜 스웨덴을 경유해 핀란드로 투입하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연합국의 목적이 핀란드 원조보다 독일로의 철광석 수출을 막기 위한 사전 조치로 의심했고 실제로 이후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그렇게 군사 행동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가장 적극적으로 핀란드를 돕고 있던 노르웨이와 스웨덴도 제3국군이 자국 영토에 들어올 경우 자칫 전쟁에 휘말릴 수 있다고 몸을 사렸다.

그런데 이때 묘한 태도를 취한 나라가 독일이었다. 독립 당시의 상황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에게 핀란드는 각별한 나라였으나 독소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며 소련의 핀란드 지배권을 인정하였기에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설령 핀란드에 관심이 있어도 당장은 프랑스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도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핀란드군의 선전이 이어지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추후 소련과 전쟁 시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화를 낸 자의 책임

전선에서 들려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에 경악한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메레츠코프를 비롯하여 침략에 동원된 4개 야전군 사령관과 예하 모든 장성들을 즉각 해임하였다. 나름대로 처세술이 좋았던 메레츠코프는 그의 능력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하여 좌천당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제44사단장 비노그라도프를 비롯한 상당수 지휘관들이 즉결 총살되었을 만큼 스탈린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스탈린의 화풀이는 혁명동지로 절대 신뢰하고 있던 국방장관 보로실로프에게도 향하였다. 그런데 스탈린의 비난이 얼마나 도가 지나쳤는지 충견과 다름없던 보로실로프가 반발하여 식탁 위의 식기를 내리쳐 깨뜨리며 대들고 나섰다. "이보시오, 스탈린 동지! 이건 나나 현지 지휘관들의 잘못이 아니오!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오. 우리 군의 훌륭한 지휘관 동지들을 숙청으로 모조리 처형해 버린 것은 바로 당신 아니오!"

모든 독재자들이 그렇듯이 스탈린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있었다. 패배의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자 성급하게 전쟁을 일으킨 자신의 과오는 전혀 생각지 않고 이번에도 무조건 남을 탓하였던 것이었다. 전쟁 직전 대숙청이라는 역사상 최악의 피바다를 연출하며 절대 권력자가 된 스탈린은 자신의 잘못을 툭하면 남에게 전가하고는 했다. 사실 군부의 지휘 체계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스탈린 자신이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총참모장 투하체프스키(Mikhail Tukhachevskii)를 위시한 수많은 고급 장교들이 제거되면서 거대한 소련군은 순식간에 지휘 공백사태에 직면하였고 이때부터 소련 군부는 충성 경쟁의 장으로 돌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내재되었던 무능이 총체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겨울전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결국 스탈린은 두 달 전에 폴란드 침공전을 지휘하였던 티모센코(Semyon Timoshenko)를 급하게 호출하였다.

소련군의 변화

티모센코는 제2차 대전에서 활약한 소련군 장성들 중에 그다지 유능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후 독소전쟁 초기에 중요한 보직을 맡아 전쟁을 지휘하였지만 스몰렌스크 전투, 키예프 전투, 제2차 하르코프 전투에서 연이어 대패를 당한 후 1942년부터는 일선 지휘관에서 배제되어 후방의 한직을 전전하였을 정도였다. 그런 인물이 구원투수로 나서야 했을 만큼 겨울전쟁 당시의 소련군은 총체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주변의 말을 충분히 듣고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냈던 신임 사령관 티모센코는 전임자처럼 한심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너무나 평범하고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상대방보다 5배 이상의 전력을 투입하여 패하지 않을 정도의 극히 평균적인 작전 구사 능력은 있었던 인물이었다. 호된 신고식을 치른 소련군이 만용을 버리고 겨우 정신을 차리면서 전쟁의 양상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였다.

여담이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위대한 승리'로 역사에 길이 남는 전투들은 소수가 압도적인 다수를 물리친 사례들이었다. 예를 들어 명량해전이나 앞서 소개한 수오무살미 전투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당연히 이런 전투는 엄청난 전력 격차를 뛰어넘는 승자의 뛰어난 작전에 의한 성과이기도 했지만, 더불어 패자의 무능과 만용도 함께 어우러져서 나타난 결과가 대부분이다.

반면 압도적인 전력으로 소수의 적을 제압하여 얻는 승리는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인류사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결국 소련은 겨울전쟁에서 호되게 당한 후에야 그들의 군대가 단지 덩치만 컸지 소프트웨어는 엄청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고와 학살이 난무하던 혼란한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그제서야 소련은 지극히 평범한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북극곰의 반격

90만의 병력과 2,800여 문의 화포를 지원받아 전력을 대폭 증강시킨 티모센코는 전임자 메레츠코프와 달리 주요 축선만 선택하여 집중 돌파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그는 공군과 포병으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는 동안 선도 정찰부대와 공병대가 진격로를 개척한 후, 보병의 엄호를 받는 대규모 전차 부대를 투입하는 식으로 공격할 생각이었다. 초전에 당한 막대한 희생 덕분에 소련군은 제 병과가 연합하는 현대전의 교리를 자연스럽게 터득했던 것이다.

준비를 완료한 소련군은 2월 1일 마침내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였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핀란드군의 후방 보급 거점과 전방 숙영지로 판단된 곳을 반복하여 타격하였는데, 특히 공군의 활약이 돋보였다. 2월 한 달 동안에만도 무려 7,000회 이상의 출격을 쉬지 않고 감행하였을 정도였다. 헬싱키 같은 도시의 민간 거주지도 가리지 않고 폭격하여 국제적인 비난을 받았지만 처음부터 욕을 많이 먹었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난 2개월간 기적적인 용전분투를 하여온 핀란드군의 무운도 서서히 끝나고 어려움이 시작되었다. 최전선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하였지만 두 달 만에 환골탈태하여 핀란드의 유격전술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소련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월 11일부터 그동안 핀란드를 굳건히 수호해 내었던 만네르하임선의 곳곳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핀란드의 가장 큰 지원군이었던 매서운 겨울이 점차 끝나가고 있었다.

세계가 놀랄 만큼 선전을 펼치며 고군분투하던 핀란드군은 소련군이 공세를 재개한 지 2주 만에 전 병력의 절반 가까이가 사상당하면서 개전 이후 최대의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이렇게 소모된 전력을 회복할 방법이 핀란드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호수의 수문을 열거나 마을을 불살라 초토화시키는 식으로 저항을 계속하였지만 더 이상 효과적인 저항이 될 수 없었다. 핀란드군 총사령관 만네르하임은 한계가 왔음을 깨달았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