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톨바야르비 협곡

전쟁 개시 전 소련은 병력뿐 아니라 동원한 장비에서도 핀란드를 완벽하게 압도하였다. 하지만 침략의 선봉에 세웠던 소련군의 전차들도 무기력하기가 보병 못지않았다. 당시 소련군이 동원한 T-26 같은 전차들은 장갑이 약해서 쉽게 격파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기갑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이 상황에 맞지 않았기에 패배를 자초한 측면이 크다. 소련군은 전방의 상황도 모르고 무조건 전차를 밀어 넣기만 하였다.

따라서 핀란드군이 가장 앞에 있는 전차와 가장 뒤에 있는 전차를 격파하면 좁은 길을 따라 일렬로 전진하던 소련군 기갑부대는 그 자리에서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때 함께 이동하여 온 보병들을 공격하여 분리시켜 버리면 도로와 숲 속에 늘어선 전차들은 단지 손쉬운 표적물로 전락해 버렸다. 이후부터는 그동안 효과를 많이 본 대전차용 폭약이나 화염병을 이용하여 하나하나 제거하거나 항복을 받아내면 되었다.

라도가 호수 북쪽에 위치한 톨바야르비(Tolvajarvi)와 수오야르비(Suoyarvi) 사이의 협곡에서 몰살당한 소련 제139사단의 참패는 소련군 망신의 시작을 알린 전투였다. 12월 12일, 숙영하고 있던 소련 제139사단을 최초로 공격한 핀란드군은 단지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경무장한 1개 소대에 불과하였다. 결국 차츰 증강된 핀란드군의 끈질긴 유격전술에 호되게 당한 소련군은 도주하다가 12월 22일 퇴로가 막혀 아글라야르비(Aglajarvi)에서 무참하게 궤멸되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소련군 제75사단이 허겁지겁 달려왔으나 이들의 운명도 제139사단과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승리한 핀란드군 제16연대는 350여 명이 사상당한 반면 소련군은 5,000여 명 전사, 5,000여 명 부상에 59대의 기갑 장비가 격파되는 참패를 겪었다. 하지만 톨바야르비 전투에서 소련군이 당한 패배는 지극히 예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겨울전쟁 초기에 있었던 일반적인 풍경이라 할 수 있었다.

계속된 무용담

이러한 핀란드군의 무용담 중 역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은 12월 7일부터 이듬해 1월 8일까지 한 달간에 걸쳐 중부전선의 교통요지인 수오무살미(Suomussalmi) 일대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들이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국경 도시인 오울루를 점령하기 위해 수오무살미로 진격한 소련군은 제9군 예하의 제44, 163사단과 1개 전차여단으로 구성된 총 5만여 명이었다. 이들을 막을 핀란드군은 1만여 명에 불과한 제9사단이었다.

만일 소련군이 수오무살미를 통과하여 오울루까지 점령한다면 만네르하임선 뒤로 향하는 공간을 확보함과 동시에 핀란드와 스웨덴을 연결하는 통로를 차단하여 상당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 남쪽의 카렐리아 지협 일대의 방어가 우선이었던 핀란드군 입장에서 보면 오울루는 방어 우선순위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핀란드군은 어떻게든 소련군을 막아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수오무살미로 향하는 북쪽 도로로 제163사단이, 남쪽의 라아테(Raate) 가도로는 제44사단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사실 도로라곤 하지만 숲 속의 약간 넓은 오솔길 정도에 불과한 작은 소로였다. 핀란드군 지휘관 시일라스부오(Hjalmar Siilasvuo) 대령은 두 부대 간의 간격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앞서 다가오는 제163사단을 수오무살미로 유인하여 먼저 격파하기로 결심하였다.

12월 7일, 제163사단은 도시에 입성하였지만 혹한과 핀란드군의 지연전에 막혀 대열이 무려 20km나 늘어진 상태였다. 감청을 통해 예상보다 상황이 나쁘다는 사실을 파악한 핀란드군은 곧바로 공세로 전환하여 측면을 조금씩 격파하여 나갔다. 단지 덩치만 컸을 뿐인 제163사단은 추위 속에서 굶주린 채 서서히 부서졌다. 그들을 구할 제44사단이 속도를 내어 30km 후방까지 다가오자 이들의 합류를 막기 위해 1개 대대의 핀란드군이 출동하였다.

수오살미의 기적

12월 14일, 가장 먼저 투입된 350명의 핀란드군이 소련군 제44사단의 진격로인 라아테 가도를 틀어막았다. 도로가 좁아서 쉽게 봉쇄할 수는 있었지만 저항 의지가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임무였다. 그들은 백병전까지 벌여가며 축차적으로 투입된 제44사단을 무려 열흘 이상 저지하는 괴력을 발휘하였다. 소련군이 앞으로 나아가려면 대안을 모색하여야 했지만 대숙청 당시 고속 승진한 사단장 비노그라도프(Alexei Vinogradov)는 능력이 부족하였다.

제44사단은 소련 남부의 우크라이나 일대를 담당하던 키예프 군관구(Kiev Military District) 소속이었다가 핀란드 침공 직전에 서둘러 전개된 부대였다. 당시 소련군 최정예였지만 동계 전투용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지휘관의 능력도 부족하였다. 비노그라도프는 라아테 가도 좌우의 눈 덮인 숲 속으로 우회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무조건 좁디좁은 도로로만 일렬로 늘어서서 돌파하려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 투입된 핀란드 증원군이 뒤로 돌아가 1월 7일, 배후를 절단하는 데 성공하자 제44사단은 순식간에 보급로가 끊어졌다. 제163사단을 구하기 위해 전진하던 제44사단도 똑같은 상황에 봉착한 것이었다. 라아테 가도에 길게 늘어서서 혹한에 노출되고 보급로가 차단된 상태로 그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자 기습 침투한 핀란드군의 공격이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악천후를 방패 삼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핀란드군이 반격을 시작하자 소련군은 병력의 반 이상이 눈보라에 쓰려져 갔고 나머지는 공격을 받아 전멸당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수오무살미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던 제163사단이었다. 이들을 격멸하기 위해 라아테에서 대승을 거둔 핀란드군이 쉬지도 않고 뒤로 돌아 달려갔고 자신들보다 먼저 사라진 증원군을 애타게 기다리던 제163사단도 곧바로 제44사단을 쫓아 지상에서 사라져 갔다.

겨울 고슴도치의 신화

그렇게 1월 8일 수오무살미 전투가 막을 내렸다. 제163사단, 제44사단이 궤멸된 소련군의 피해는 총 사상자와 포로가 3만에 이르렀다. 더불어 중화기를 핀란드군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치는 망신을 당하였는데, 43대의 전차를 비롯해 노획한 무기가 핀란드군이 모두 운용할 수 없을 만큼 많아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은 현장에서 즉시 폐기하였을 정도였다. 더 이상 소련 제9군은 오울루로 향한 진격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비하여 핀란드군의 사상자는 소련군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않는 2,000명 정도였고 상당한 전리품을 획득하여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더불어 오울루의 점령을 막아 생명선과도 같은 스웨덴과의 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말로만 도와주겠다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당시 스웨덴은 중립국임에도 각종 물자와 가장 많은 자원병까지 파병해 준 거의 유일한 후원 세력이었다. 그만큼 승전의 효과는 컸다.

설령 전략적 효과를 제외하고 단지 전술적인 측면만 놓고 보더라도 수오무살미 전투는 핀란드 역사는 물론 세계 전쟁사에도 찬란하게 기록될 엄청난 대승이었다. 이 전투는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무턱대고 전쟁을 시작한 소련군이 고슴도치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핀란드군에게 참변을 당한 겨울전쟁의 상징이 되었다. 그만큼 소련은 단지 병력 수만 믿고 대책 없이 무모한 침략전을 벌였던 것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소련군에게 핀란드군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혹한이었다. 추위를 잊기 위해 보드카를 마시고 취해서 동사하는 이들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이처럼 겨울전쟁 내내 소련군의 피해는 비전투손실이 전투손실과 맞먹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쉽게 승리를 기대한 것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혹한을 중요한 무기로 삼았던 소련의 입장에서 본다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던 형국이었다.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