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중반을 넘어서면서 독소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끝날 것이 확실해졌다. 더구나 6월 6일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서부 유럽에도 전선이 구축되면서 전쟁의 흐름이 바뀔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소련 땅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벌인 바그라티온 작전(Operation Bagration)의 개시 일을 일부러 3년 전에 독일이 침략을 개시한 6월 22일에 맞추었을 만큼 소련은 여유가 있었다.

바로 이때부터 소련은 전쟁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였다. 지금은 공동의 적인 나치 독일을 상대로 미국, 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지만 종전 이후에도 이들과 계속 친구가 될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전쟁 전 소련에게 자본주의 종주국을 자부하던 미국, 영국은 독일 못지않게 적대적인 대상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이들과의 대립이 다시 시작될 것이 틀림없었다.

덕분에 전쟁의 끝이 가까워졌음에도 보다 강력한 새로운 무기에 대한 열망은 오히려 더욱 커졌다. 그 중에는 제2차 대전을 기점으로 확고하게 지상전의 왕자의 위치를 차지한 전차도 있었다. 이때 소련은 이후 전차 개발 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는 T-54를 종전 직전인 1945년 3월에 만들어내었다. 이전까지 목적에 따라 작전을 벌이던 중(重)전차, 중형(中型)전차의 임무를 하나의 전차로 수행할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행동은 당연히 서방을 자극하여 M47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이에 소련이 T-55를 선보이자 미국은 M48로 즉시 대응에 나섰다. 사상 최대의 전쟁이 끝났지만 더욱 격렬한 대립이 계속 이어진 냉전시대의 자화상이었다. 상대보다 더 좋은 전차를 가지려는 의지는 당연하지만 쉽게 이루기 어려울 만큼 욕심이 지나쳤던 경우도 있었다. 시대를 선도하였다고 평가 받지만 현실에서는 어정쩡해졌던 T-64전차가 바로 그러했던 경쟁의 산물이었다.

꿈의 전차

지난 제2차 대전의 경험으로 전차 분야에 대해 나름대로 앞섰다고 자부하였지만 M47과 M48처럼 생각보다 빠른 미국의 대응은 소련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처럼 조금씩 기존 전차의 성능을 개량하는 장군 멍군 방식으로 우위를 확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소련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차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T-55가 이제 막 양산을 개시한 1958년부터 개발에 착수하였다.

모로조프(Alexander A. Morozov)가 이끄는 KMDB 설계국이 주도한 제430계획(Object 430)의 핵심은 전차의 3대 요소인 공격력, 방어력, 기동력 모두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신예 전차의 개발이었다. 먼저 대전차 전투 시 명중률과 화력을 높이기 위해 날개안정분리철갑탄(APFSDS탄)을 사용하는 대구경 활강포를 채택하기로 하였다. 지금은 강선이 없는 활강포가 전차포의 대세가 되었지만 당시 만해도 획기적인 시도였다.

여기에 더해 별다른 부가 장비 없이 주포를 이용하여 한창 개발 중에 있던 대전차 미사일의 발사할 수 있는 방법도 고려하였다. 또한 기존 소련 전차들이 사용하던 목측식(目測式) 대신 영상합치식 광학 거리측정기를 탑재하여 전투 효율을 높이고자 하였고 켈로젤(Carousel) 방식의 자동장전장치를 장착하여 3인으로 전차를 운용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이러한 공격력 못지 않게 방어력과 기동력도 시대를 앞선 기술을 적용하기로 하였다.

성형작약탄(HEAT탄)의 공격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는 강력한 복합장갑을 채택하여 방어력을 대폭 향상시키기로 하였고 터보 차저(Turbo Charger)를 설치하여 출력을 향상시킨 신형 디젤 엔진과 개선된 주행 장치를 장착하여 기동력 향상도 이루고자 했다. T-64는 제2세대 전차로 취급 받지만 위와 같은 앞선 사상 때문에 제3세대 전차의 효시로 보기도 한다. 한마디로 꿈의 전차였다. 하지만 문제는 적용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기술이 그때까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진 개발

이미 미국 전차들이 사용하는 앞선 거리측정기, 로드 휠, 서스펜션, 캐터필러처럼 쉽게 카피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핵심인 대전차미사일, 자동장전장치, 복합장갑, 신형엔진처럼 기대를 모으고 있던 핵심 기술들이 언제 실용화될지는 미지수였다. 개발 2년 만인 1960년 제430계획의 시제 전차가 만들어졌지만 기존에 T-55가 주포로 사용하는 100mm 구경의 D-54TS 전차포를 우선 탑재하였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곧바로 제432계획(Object 432)이 시작되어 마침내 복합장갑 설치가 구현되었고 115mm 구경의 D-68 활강포와 자동장전장치가 설치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 미국이 105mm 구경의 L7 전차포를 탑재한 M60을 실전 배치하자 소련은 D-68로 대응이 힘들다고 보고 곧바로 125mm 구경의 활강포 제작에 착수하였다. 이처럼 소련의 움직임 못지않게 미국의 대응도 기민하였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신형 전차는 T-64라는 제식명을 부여 받고 1964년부터 생산이 개시되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초도 물량을 운용하였던 일선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한마디로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처음으로 구현된 기술이 많다 보니 툭하면 고장이 발생하였는데, 서둘러 개발한 엔진에 특히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초기 5TD 디젤 엔진은 수명이 200시간에 불과할 만큼 신뢰성에서 극악한 평가를 받았다.

또한 최초 예정보다 더 큰 구경의 주포를 장착하느라 터렛의 구조가 바뀌면서 자동장전장치를 비롯한 많은 부분에서 말썽을 부렸다. 이처럼 문제가 많았던 이유는 사실 냉전 당시의 치열했던 경쟁과 군부의 조급증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존재하던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개념의 전차의 개발에 착수하여 불과 6년 만에 생산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불가능한 엄청난 개발 속도다.

어려웠던 이상

하지만 정작 당시 소련 군부는 T-64의 개발이 지지부진 하다며 그새를 못 참고 T-55 차체에 115mm 활강포를 장착한 T-62를 제작하여 배치하고 있었다. T-64의 본격 양산 이전에 발생한 전력 간극을 메우기 위한 임시적인 조치였지만 당연히 이런 군부의 행동은 T-64 개발팀에게 압박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둘러서, 그것도 아직 구현도 되지 않은 많은 기술을 접목한 T-64 초기형의 신뢰성이 부족하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생산과 동시에 계속하여 개선과 개량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1969년에 이르러서야 본격 대량 생산에 발을 디뎌 1987년까지 약 13,000대가 생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같은 시기에 함께 활약한 T-55, T-62, T-72에 비하면 적은 숫자다. 주포를 이용한 대전차 미사일 발사 능력 확보도 거의 20년 가까이 된 1976년에 성공하였을 만큼 처음 구상 당시 계획을 실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T-64의 문제점이 계속 드러나면서 T-55의 대체가 지지부진해지고 T-62가 어떨결에 주력 전차가 되어버리자 소련 군부는 T-64 포탑을 T-62 차체에 장착한 전차를 1971년 제작하여 보급하였는데 일선에서 의외의 호평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T-72로 성능은 T-64와 비슷하면서도 제작비는 저렴하였다. 결국 T-64는 애초 이상과 달리 요구 수준을 달성하는데 시간이 걸리면서 양산에 성공한 T-62와 T-72 사이에 껴버린 고가의 어정쩡한 전차가 되었다.

T-64B에 이르러 모든 결함이 해결되었지만 이미 T-72와의 경쟁에서 밀린 상태였다. 기술 유출을 우려한 소련 시절에는 대외 판매를 금하였을 만큼 애지중지하였지만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50대의 중고 T-64를 수출한 것을 보면 이제는 어느덧 과거의 전차가 되어 버렸다. 한마디로 T-64는 너무 과한 이상을 실현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전차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원

중량 41.5톤 / 전장 9.53m / 전폭 3.59m / 전고 2.19m / 항속거리 460km / 최대속도 60km/h/ 승무원 3명 / D-81TM 125mm 활강포 1문, 12.7mm NSVT 기관총 1정, 7.62mm 기관총 1정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