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재무장을 선언한 이후 독일은 더 이상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급속히 군비를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1930년대 말이 되자 관영 매체들은 이제 독일군이 세계 최강이라고 선전하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잘 아는 독일 군부 스스로가 이런 선전을 믿지 않았다. 그 동안 전력이 대폭 증강된 것은 맞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았고, 특히 육군은 프랑스에 비해 심각하게 뒤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단시간 내 병력의 증강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무기였다. 1차 대전 후, 체결 된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오랫동안 최신 무기의 개발과 보유에 제한을 받아왔다. 재군비 선언 후 개발에 나서기는 했지만 출발이 주변국에 비해 늦다 보니 선전과 달리 독일군이 보유한 무기의 질이 떨어졌다. MG34 기관총처럼 비밀리에 개발한 무기도 있었지만 엄중한 감시를 피하여 만들기 곤란하였던 중화기는 상당히 미약하였다.

그 중에는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전차도 있었다. 흔히 독일 축구팀을 '전차 군단'이라 할 만큼 독일의 전차와 기갑부대가 역사에 남긴 발자국은 크다. 하지만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독일의 전차는 보잘것없었다. 시작이 늦은 만큼 성능이 뛰어난 전차를 만드는데 독일은 많은 애를 먹었다. 이때 독일이 처음 제식화한 전차가 1호, 2호 전차였는데 사실 전차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다.

구데리안(Heinz Guderian) 같은 독일의 소장파 장성들이 전차를 주축으로 하는 새로운 전술을 구상하고 있었지만, 성능이 미약한 1호, 2호 전차로는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전쟁이 바로 코앞에 다가왔는데 마땅한 전차가 없어 전전긍긍 하던 독일의 눈에 갑자기 걸작 하나가 등장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ČKD社에서 제작한 LT vz. 38(LT-38), 이른바 38(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경전차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약소국의 의지

지금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체코슬로바키아(이하 체코)는 1차 대전 후인 1918년에 독립한 중부 유럽의 약소국이다. 독립 전에 체코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기계 공업의 요충지였는데, 품질 좋은 각종 총기로도 유명할 만큼 군사 분야와 관련해서도 명성이 높았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했던 체코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암흑기를 겪고 있던 1930년대에 이미 뛰어난 전차를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1935년 체코의 슈코다(Skoda)社에서 제작한 LT vz. 35(LT-35) 경전차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도 수출이 되었을 만큼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실전에 대량 배치되어 운용에 들어가자 생각보다 기동력에 문제가 많고 장갑 능력이 약하다는 몇몇 단점들이 대두되었다. 더불어 호전적인 나치의 팽창으로 전운이 고조되자 체코 당국은 1937년 이를 대체할 새로운 후속 전차 개발에 착수하였다.

슈코다와 LT vz. 35를 함께 생산하였던 ČKD는 시간이 촉박한 점을 고려하여 새로운 전차를 개발하기보다 기존 전차를 개량한 형태가 좋다고 판단하였다. 37mm 구경의 슈코다 A7포와 2문의 7.92mm 기관총을 장착하고, 2차 대전 이전에 등장한 대부분의 전차들처럼 장갑을 리벳으로 붙였다. 엔진을 차체 후방에 탑재한 것도 전작과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다. 가장 커다란 차이는 주행 안정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이었다.

ČKD는 야지에서의 기동력을 향상하기 위해 많은 소련 전차에 적용되어 유명해진 크리스티 서스펜션(Christie suspension)과 유사한 방식의 현가장치를 사용하였다. 지지륜(Return Roller)이 없이 커다란 4개의 보기륜(Road Wheel)을 채택하여 구조를 단순화하였는데, 이후 이는 실전에서 상당히 뛰어난 안정성을 자랑하였다. 1938년 체코 당국은 이를 LT vz. 38이라 명명하고 150대를 생산할 것을 지시하였다.

엉뚱한 인생

내수 시장이 작다 보니 LT vz. 38은 개발 당시부터 대외 판매도 고려하였는데 양산 전에 페르시아, 스웨덴, 스위스, 페루, 라트비아 등과 약 150여대의 구매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만큼 새로운 전차에 대한 평가가 뛰어났다. 하지만 본격적인 양산과 배치는 당국의 의지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조국을 지키는데 사용할 LT vz. 38이 양산되기 직전인 1939년 3월, 체코는 독일의 침략으로 패망한 것이었다.

대부분 자료에서 제2차 대전이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것으로 보지만, 독일의 침략은 히틀러의 집권과 더불어 시작된 것과 다름없다. 군대를 기습 진주시킨 1936년 라인란트(Rheinland) 점령은 자국 영토에서 벌어진 일이라 예외로 친다고 해도, 1938년 외교적 모략으로 성공한 오스트리아 합병과 주테덴란트(Sudetenland) 할양으로 개시된 체코 점령은 단지 실전이 벌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명백한 침략이었다.

이때 초도 제작 물량인 9대의 LT vz. 38을 독일이 노획하여 시험해 돌입하였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독일이 선전 필름에 자랑스럽게 등장시킨 1호, 2호 전차보다 성능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크기는 1호, 2호 전차와 비슷하지만 성능은 한창 개발 중에 있던 3호 전차와 맞먹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전차를 자신들이 점령한 약소국이 생산하고 있었으니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독일은 좋은 무기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자존심은 다음 문제로 생각하였다. 독일에게 오스트리아나 체코는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앞으로 예정된 프랑스, 영국, 소련과의 대결을 위해 당장 좋은 무기가 더 많이 필요했다. 그 해 5월, 독일은 LT vz. 38에게 Panzerkampfwagen 38(t)라는 새로운 독일 제식명을 부여하고 ČKD에게 애당초 계획된 물량을 즉시 양산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독일은 노획한 LT vz. 35도 35(t)라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이후로도 이어진 명성

결국 체코를 지키기 위해 탄생하였던 LT vz. 38은 엉뚱하게도 침략자인 독일이 대량 사용하면서 38(t)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독일제 전차로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렇게 독일군의 제식 무기가 된 38(t)은 1939년 폴란드 침공전, 1940년 서유럽 침공전에서 맹활약하였다. 특히 프랑스 전역에서는 롬멜(Erwin Rommel)이 지휘하여 이른바 유령 사단으로 명성이 드높았던 제7기갑사단의 주력 전차였다.

독소전 초기인 1941년에도 38(t)은 침공전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지만 3호, 4호 전차가 대량 사용되고 T-34같은 뛰어난 소련 전차가 등장하자 1,500여대 생산을 끝으로 1942년 여름부터 2선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기계적 신뢰성이 좋아 정찰 전차나 점령 지역 경계용으로 계속 사용되었고 차체를 이용한 Marder III 돌격포, Flakpanzer 38t 방공포의 플랫폼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전쟁 말기인 1944년부터 무려 2,500여대가 생산 된 Hetzer 구축전차는 38(t)의 파생형이 아닌 별개의 전차로 인식 될 만큼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였고 전후 스웨덴 S전차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재미있는 점은 전쟁 중임에도 체코가 합병 당하기 전에 계약을 맺은 외국에도 수출이 이루어졌고, 스웨덴에서는 220여대가 라이선스 제작되기까지도 하였다.

38(t)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스위스 등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 주력전차로 사용되었다. 그만큼 뛰어난 전차였지만 정작 개발국인 체코에서는 가장 필요하였을 때 사용되지 못하고, 그들을 점령하여 수탈하였던 독일이 또 다른 침략 전쟁을 수행하는데 요긴하게 이용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었다. 때문에 기록으로 특별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지만 체코인들이 38(t)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결코 자랑스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제원 (Ausf. A-C 형)
중량 9.5톤 / 전장 4.61m / 전폭 2.14m / 전고 2.40m / 승무원 4명 / Skoda A7 37.2 mm 전차포 (적재탄수 90여발) / 7.92mm 기관총 2정 / 항속거리 200km / 최대속도 56km/h

글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