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7.0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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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슈퍼 에이스들의 신화를 만든 전투기

메서슈미트 Bf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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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초계 비행 중인 JG27 소속 Bf 109E

전투기 조종사 중에서 5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시킨 이들을 흔히 에이스(Ace)라고 부른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정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본격적인 공대공 전투가 시작된 제1차 대전 당시부터 에이스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5는 그다지 커다란 느낌을 주지 않는 숫자지만, 이 정도로도 에이스의 칭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공대공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가 힘들다는 의미다.


슈퍼 에이스를 배출한 뛰어난 전투기


마치 전자오락처럼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부터 레이더로 적기를 포착하여 미사일을 날리는 현대의 공중전과 달리 독파이팅(Dog Fighting)이라 부르는 근접전으로 전투를 벌이던 예전에는 조종사들의 능력이 승패를 많이 좌우했으므로 에이스는 조종술이 뛰어난 파일럿을 이르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행기는 기계이므로 전투기의 성능이 좋아야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많았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조종사라도 제1차 대전 당시 복엽기로 현대의 최신 전투기를 상대하여 이길 수는 없다. 굳이 이 정도의 전제가 아니고 같은 시대에 활약한 전투기라도 승패를 쉽게 좌우할 만큼 격차가 컸던 경우는 부지기수다. 따라서 만일 어떤 특정 전투기가 에이스들을 많이 배출하였다면 당연히 성능이 뛰어난 전투기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메서슈미트 Bf 109 전투기(이하 Bf 109)는 이런 가정에 가장 부합되는 전투기다.


무려 100기 이상을 격추한 슈퍼 에이스만도 108명이나 배출한 독일 공군은 가히 에이스들의 보고였다. 역사상 1위부터 154위까지 격추왕 중 124위를 차지한 핀란드의 유틸라이넨(Ilmari Juutilainen)을 제외하고 모두 독일 공군 소속이었다. 그런데 유틸라이넨을 포함하여 이들 모두가 사용한 주력기는 Bf 109였다. 한마디로 슈퍼 에이스들의 신화를 만든 애기라고 할 수 있다.


최고의 전투기를 제작하라

1923년 소련 리페츠크 기지에서 독일군이 포커 D.XIII로 전투기 조종사 양성 훈련 중인 모습. 이처럼 독일은 히틀러의 재군비 선언 이전부터 비밀리에 군비를 증가하여 왔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1935년 히틀러가 재군비 선언을 하면서 독일의 재무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는 정치, 외교적으로 그러하였다는 것뿐이지 독일군의 팽창은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 왔었다. 제1차 대전 패전 후 군비를 제한 받던 독일은 1922년 소련과 비밀 조약을 맺고 연합국 감시를 벗어난 소련 땅에서 무기 개발 및 훈련을 진행하였다. 국내에서도 레저용 글라이더를 만든다며 전투기 관련 기술을 습득하는 식으로 교묘하게 감시망을 피해나갔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1933년이 되어서는 정식 선언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베르사유 조약에서 개발과 보유를 금지한 중화기들도 대놓고 개발에 나섰을 정도였다. 전투기 또한 마찬가지여서 바로 그 해 각 항공기 제작사를 대상으로 차세대 주력 전투기 사업을 실시하였다. 군부가 요구한 세부적인 사양은 많았는데,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당대 최고의 전투기를 만들어 내라는 것이었다.


차세대 전투기는 복엽기나 캔버스를 덧씌운 과도기적 형태의 단엽기가 아니라 고속 비행에 적합하도록 동체 전체를 금속으로 제작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을 만큼 당시 독일의 움직임은 경쟁국보다 빨랐다. 결국 이런 앞서 발걸음 덕분에 제2차 대전 초기에 하늘의 패권을 먼저 잡을 수 있었다. 경쟁에는 독일 유수의 4개 제작사가 사업에 참여하였는데, 바이에른 항공사(Bf: Bayerische flugzeugwerke)도 그 중 하나였다.

(좌) 제2차 대전 당시 독일 조종사를 제외하고 최다 격추 기록을 세운 핀란드의 일마리 유틸라이넨. 그는 총 94기의 적기를 격추하였는데, 그 중 58기는 Bf 109G를 조종하여 얻은 결과다. 이처럼 Bf 109는 슈퍼 에이스들의 애기였다. (우) Bf 109의 개발을 주도한 빌리 메서슈미트. 이후 그는 나중에 Bf사를 인수하였는데 이 때문에 Bf 109를 Me 109라고도 많이 부른다. 하지만 정식 명칭은 메서슈미트 Bf 109가 맞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후발주자였던 Bf는 유명 엔지니어인 빌리 메서슈미트(Willy Messerschmitt)와 로베르트 루저(Robert Lusser)를 스카우트하여 개발에 착수하였는데, 그들의 모토는 작고 가볍고 단단하게였다. 한마디로 전투기가 고속으로 비행하고 급격한 기동을 충분히 견뎌내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이었다. 기체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문제는 엔진이었다. 탑재를 예정하였던 융커스 유모(Junkers Jumo) 210 엔진의 개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영국에서 도입한 롤스로이스 케스트럴(Rolls-Royce Kestrel) 엔진을 시제 1호기인 Bf 109V1에 장착하여 1935년 5월 29일 초도 비행에 성공하였다. 이후 전쟁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Bf 109의 최초 심장이 영국제라는 사실은 아이러니라 할 수 있는데 이때의 인연은 마지막에도 반복된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개발에 성공한 Bf 109는 1936년에 각종 시험 끝에 여타 경쟁기를 제치고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채택되었다.

시제 1호기인 Bf 109V1의 지상 실험 모습.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제 롤스로이스 케스트럴 엔진을 달고 비행에 성공하였다. <출처: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자신감을 불어온 뛰어난 성능


나치의 선전 매체는 독일이 세계 최고의 전투기를 개발하였다고 대대적으로 공표하였다. 기본 성능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행위였지만 정작 내부적으로는 시험 비행 중 드러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생하고 있었다. 전투기는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고 실험을 통해 드러난 문제들을 해결한 후 양산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독일은 조급하였다.


그 동안 아무리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군비를 강화하고 있었더라도 베르사유 조약의 골이 너무 깊어 주변국과 비교하여 공군력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독일은 추후 전쟁에서 공군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Bf 109를 양산하여 배치함과 동시에 운용하며 드러난 문제점을 개선하는 방식으로 전력 확충에 나섰다. 초기 모델인 A~D형의 생산량이 그다지 많지 않고 활동 기간도 짧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좌)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콘돌 군단 소속의 Bf 109C의 일러스트. 아직도 여러 부분에서 개선이 이루어지던 중이었지만 독일의 위력을 과시하고 성능을 테스트하기 위해 참전이 이루어졌다. <출처: (cc) B. Huber at wikipedia.org> (우) 1939년 9월 폴란드 전선에 투입 된 Bf 109B. 3정의 MG17 기관총을 탑재한 초기형으로 총 341기가 생산되었다. <출처: German Federal Archive>

이런 조급함은 대외 침략에 대한 나치의 적극적 의지이기도 했다. 독일은 Bf 109의 위력을 과시하고자 1937년 스위스에서 개최된 항공대회에서 성능을 홍보하였다. 하지만 무기는 아무리 매체를 통해 선전하거나 시범 비행을 펼친다 하더라도 실전 결과 없이 그 성능을 완벽히 입증하기는 어렵다. 결국 독일의 넘치는 자신감과 침략 야욕은 Bf 109의 실전 데뷔를 앞당겼다.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는 의용군이라는 명분으로 공군을 파견하였는데 처음에는 Ju 52같은 수송기를 보냈다. 이듬해 전쟁이 격화되자 전투부대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24기의 Bf 109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다. 스페인 상공에 나타난 Bf 109들은 독일 수송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던 소련의 I-15, I-16 전투기들을 압도하며 그 동안 입이 마르도록 자랑해온 성능이 결코 허언이 아님을 입증하였다.


독일 공군의 자부심이 되다

초기 양산형인 Bf 109E는 전쟁 초기에 독일 공군의 우세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Bf 109는 실전 결과를 바탕으로 이후 개량이 계속되었고 1938년에 이르러 제2차 대전 초기 독일의 전성기를 이끈 E형이 등장하였다. 이들은 1939년 폴란드 침공전, 1940년 프랑스 침공전에서 독일 폭격기들이 마음 놓고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도록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하였다. 적어도 그때까지 이들을 상대할 전투기는 없었다. 독일 매체들의 선전대로 Bf 109는 가히 천하무적이었고 독일 공군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부심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막을 내렸다. Bf 109와 떼어놓고 언급하기 어려운 일생의 라이벌인 스핏화이어(Spitfire)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독일이 영국의 필살기를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의 승전에 도취되어 자만하고 있다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강적을 마주하며 자신들 못지않은 강력한 전투기가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Bf 109에 대한 믿음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제2차 대전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전투기들이 등장하여 하늘에서 자웅을 겨루었던 시기인데, 그것은 성능이 뒤진 전투기는 쉽게 도태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전투기가 수시로 데뷔하였다는 말과 같다.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이런 변화는 당연한 수순인데, 그런 점에서 볼 때 Bf 109는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최고의 전투기 중 하나라는 지위를 놓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걸작이다.

후기형인 Bf 109G. 고공으로 침투하는 연합군 폭격기를 요격하기 위한 용도로 많이 투입되었다. <출처: (cc) Kogo at Wikipedia.org>

다시 말해 Bf 109는 전쟁 후기에 등장한 P-47, P-51 같은 강적들과도 계속하여 맞설 수 있었을 만큼 뛰어났다. 34,000여기의 생산량은 소련이 생산한 IL-2 공격기 다음이고 전투기 분야에서는 역사상 최대다. 초기형과 후기형은 전혀 다른 전투기라고 평가 될 만큼 성능 차이가 컸지만 Bf 109가 전쟁 내내 최고의 전투기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기본이 잘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쉽게 말해 좋지 않다면 그렇게 많이 만들 일도 없다.


신화를 썼던 이들의 전투기

처음 언급한 것처럼 Bf 109는 항공 전사에 영원히 기록될 격추 기록을 남긴 대부분의 독일 슈퍼 에이스들이 탔던 애기였다.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최고의 에이스는 64기의 적기를 격추시킨 소련 공군의 이반 코체더브(Ivan Kozhedub)인데, 그의 기록은 독일 공군에서 겨우 공동 229위에 불과한 수준이다. 국적 불문하고 랭킹 340위 이내의 에이스 중에서 독일 이외 참전국 조종사는 단지 11명 일 뿐이다.

Bf 109G의 칵핏 모습. 조종석이 상당히 좁아서 조종사들의 근무 여건이 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대부분의 독일 에이스들은 동부전선에서 격추 기록을 작성하였다. 쉴 새 없이 교전이 벌어졌을 만큼 싸움의 규모가 컸던 탓도 있었지만 초기 소련제 전투기들이 Bf 109에 대적하기 곤란할 만큼 성능이 뒤졌던 것도 이유였다. 후기에 LaGG-3, YAK처럼 소련도 좋은 전투기들을 개발하여 투입하였지만 전쟁 초기에 주력기였던 I-15, I-16 같은 경우는 단지 움직이는 표적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수 십기 이상의 적기를 격추 시킨 슈퍼 에이스들의 실력은 결코 폄하될 수 없다. 이런 에이스들의 기록은 독일 조종사들의 뛰어난 실력을 입증하는 자료로 언급되기도 하지만 사실 고통의 산물이다. 특정 출격 횟수나 전과를 기록하면 제대하거나 지상 근무로 옮길 수 있었던 연합군 조종사들과 달리 독일의 조종사들은 죽지 않는다면 전쟁이 끝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계속 출격을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전쟁 후반기인 1944년 이후 등장한 연합국의 신예기들에게 Bf 109가 밀리기 시작한 것으로 언급하는 글이 많지만 이는 일종의 착시다. 당시 독일은 일단 물량에서 도저히 연합국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조종사를 비롯한 전쟁 자원이 부족하여 제 때 작전을 펼치기도 곤란하였다. 부족한 전력으로 독일 본토를 공습하는 연합군 폭격기가 최우선 목표다 보니 폭격기를 호위하는 연합군 전투기와 적극적으로 상대할 수 없었다.


그들은 폭격기 요격 못지않게 다음을 위해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였다. 그래서 전쟁 초기처럼 호위기들과 공중전을 펼치지 못하고 회피한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결코 성능이 뒤져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연합군의 최신 전투기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을 만큼 Bf 109는 여전히 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스페인, 이스라엘처럼 종전 후 몇몇 국가에서 계속하여 주력 전투기로 삼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영화나 행사에 Bf 109의 대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HA-1112. Bf 109G에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을 탑재하여 엔진 배기구가 카울링 상부에 나와 있다. <출처: Kogo at Wikipedia.org>

현역에서 활동한 마지막 Bf 109는 전후 스페인에서 생산한 HA-1112다. 스페인은 Bf 109G를 면허 생산하려 하였지만 DB605A 엔진을 공급받지 못하고 종전이 되었다. 이에 스페인은 Bf 109의 맞수였던 스핏화이어의 심장인 롤스로이스 멀린(Rolls-Royce Merlin)엔진을 장착하여 전투기를 완성하여 1965년까지 사용하였다. 덕분에 롤스로이스의 엔진은 Bf 109의 1번 기와 마지막기의 심장이 되었다. 재미있는 인연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원(G-6)

전장 : 8.95m / 전폭 : 9.92m / 전고 : 2.60m / 최대이륙중량 : 3,148kg / 최고속도 : 640km/h / 전투행동반경 : 850km / 상승한도 : 12,000m / 무장 : 13mm MG131 기관총 2문, 20mm MG151 기관포 1문


Bf 109는 독일 이외 많은 나라에서도 사용하였다. 핀란드 공군이 사용 중인 Bf 109G
1941년 Ju 87 급강하폭격기를 호위하는 Bf 109E. 이처럼 Bf 109가 제공권을 장악하였기에 마음 놓고 폭격을 가할 수 있었다. <출처: (cc) Bundesarchiv at Wikipedia.org>
전쟁 말기인 1944년 편대 비행 중인 Bf 109G <출처: German Federal Archive>


글 남도현 | 군사 저술가[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 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