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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일 “천안함, 좌초라면 양심선언 없었겠나...명예회복 나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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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1.03.21 14:08

천안함 폭침 11주기 맞아 첫 인터뷰
“끝까지 천안함장으로 남겠다”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이 지난 19일 오전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30년 군 생활을 마치고 최근 전역한 그는 "나는 영원한 천안함장으로 남을 것"이라며 "천안함 용사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인생 2막을 살겠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천안함 폭침사건은 경계의 실패가 아니라 정보의 실패이자 우리 경비구역에서 기만 당한 작전의 실패다. 정부의 대북정책 실패이기도 하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 함장이었던 최원일(53·해사 45기) 예비역 해군 대령은 지난 19일 용산의 한 사무실에서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지난달 28일 전역해 34년간의 군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그는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왔다.
‘최원일’ 이름은 해군 수병(水兵) 출신인 아버지가 초대 해군참모총장인 고(故) 손원일 제독(1909~1980)과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며 지은 것이다. 한때 대양해군의 지휘관을 꿈꿨지만 ‘패장(敗將)’ 멍에가 씌워졌고, 인사 때마다 진급에 탈락하다 군 생활을 마감했다.
최 전 함장은 전역사에서 “사회에서 다시 천안함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긴 항해를 시작하려 한다”며 “현역의 신분으로 천안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힘들었던 부분들을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했다. 오는 26일 천안함 폭침사건 11주기를 앞두고 만난 그는 “영원한 천안함장으로 남겠다”며 그동안 가슴에 담아왔던 얘기들을 처음으로 털어놨다.
다음은 일문일답.

◇ “피격 직후 ‘적(敵)이 공격했구나' 생각”
2010년 4월 24일 인양된 천안함 함수가 바지선에 실려 평택 해군2함대로 옮겨지고 있다. /조선일보DB

- 민간인 신분으론 처음으로 맞는 천안함 11주기인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올 3월 26일은 금요일로 공교롭게도 폭침 사건이 있었던 그날과 요일이 똑같다. 1987년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한 뒤 34년만에 군복을 벗었다. 아침에 체조도 하고 운동도 하며 현역 때와 비슷하게 산다. 아직 군인티를 벗지 못했지만 표현과 행동의 자유가 있음을 느낀다. 페이스북도 만들었고, ‘포에버(forever) 772’라는 이름의 블로그도 개설했다. 천안함에 대한 음모론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제 할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날의 기억이 선하다고 하던데.
“그날은 평화로운 금요일 밤이었다. 24시간 근무를 서는 함정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 야식까지 네 끼를 먹는다. 오후 8시30분쯤 함미(艦尾)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대원들이 수제비를 먹는 것을 보고 ‘맛있게 먹으라’고 말해줬다. 원·상사 식당에서도 부사관들이 야식을 먹고 있었고, 후미에선 수병들이 운동을 하고 있더라. 보통 때 같으면 잠시 앉아 수다도 떨지만 파도가 많이 치는 날이었다. 함교(艦橋) 아래에 있는 함장실로 돌아와 기상 정보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났다. 몸이 50cm 정도 뜨면서 왼쪽으로 쓰러졌다. 1~2분 정도 기억을 잃은 것 같다. 그게 오후 9시22분쯤이다. ‘적(敵)이 공격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당시 배가 두동강 나 아수라장이 됐을텐데….
“승조원들이 소화기로 함장실 문을 부수고 나를 소화 호스에 매달아 꺼냈다. 갑판으로 나와보니 피를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함미의 대원들이 바다에 떠서 구조 요청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배 안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인 모 상사가 ‘함장님 함미가 없습니다’라고 울며 소리 치더라. 부함장에게 인원 파악을 지시하니 숫자가 58에서 멈췄다. 천안함 승조원은 104명인데 58명 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 당시 포술장이 밤 9시28분 2함대 상황실에 좌초라고 보고한 것이 알려져 좌초설의 빌미가 됐다.
“함장실에서 나오니 당직사관, 작전관, 부함장 등 장교들 모두 ‘어뢰 같다’고 입을 모았다. 나도 분명히 수중 무기라고 생각했고, 백령도 기지국에 어뢰라고 얘기했던 것이 녹음돼 언론에 보도됐다. 포술장의 보고가 나중에 음모론자들의 빌미가 됐는데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침몰’이라는 단어가 생각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 초급 장교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빨리 구조해달라는 말이 입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 “천안함 폭침은 경계 실패가 아닌 정보, 작전, 정부의 실패”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이 지난 19일 오전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34년 군 생활을 마치고 최근 전역한 그는 "나는 영원한 천안함장으로 남을 것"이라며 "천안함 용사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인생 2막을 살겠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 상급 부대들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엔 2함대 상황실에서조차 ‘장난치지 말라’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전시도 아니고 평시에 이런 일이 있을 수는 없는 거니까. 나를 포함해 전역한 사람이 34명에 이른다. 좌초였다면 누구 하나 양심 선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겠나. 두 사람 중 하나가 잘못해도 학교 폭력으로 논란이 되는 시대인데 비밀이 있을 수가 있나.”
- 군 안팎에서 ‘결국 경계의 실패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우리가 잠을 잤거나 근무에 태만했다면 모르겠는데 그런 부분이 없었기 때문에 억울하다. 몇 번을 복기해봤지만 당시 배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다한 것 같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게 승조원들이 자신들이 살려고 했던 게 아니라 더 다친 사람들을 챙겼다. 이함(離艦)할 때도 이병 먼저, 아픈 사람 먼저 옮긴 다음에야 자신들이 내리더라. 천안함 폭침은 정보의 실패고, 작전의 실패고, 정부 정책의 실패였다.”
- 사건 당시 아쉬웠던 점들은?
“공황 상태에 있었던 우리에게 부표 설치를 지시하는 등 상급 부대에 아쉬웠던 점들이 많다. 처음 겪는 일이라 그랬겠지만 구조에 대한 정확한 절차도 없었다. 또 당시 정부는 물밑에서 대북 접촉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국방장관과 2시간 동안 면담을 했고 어뢰 같다고 했다. 다음 날 국회에서 국방장관이 어뢰 피격 가능성을 언급하니 ‘VIP가 불편해 한다’는 쪽지가 날아왔다고 한다.”

◇ “적 복수할 기회만 기다렸지만 기회 주어지지 않아”
지난 2010년 4월7일 천안함 생존 장병들이 경기도 성남 국군수도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폭침과 관련해 제기된 여러 의문점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모습. "실종된 동료들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한 생존 장병들이 환자복을 입고 회견에 임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는 반응 등이 나왔다. /조선일보DB

- 여러 번 전역을 결심했었다고 들었다.
“폭침 이후 4월쯤 전역 지원서를 냈는데 조사 중인 사람은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 나중에 징계 유예 조치를 받고 전역하려는데 내가 나가버리면 남아있는 이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다. 또 많은 국민들이, 심지어는 교도소 재소자까지도 국민 신문고를 통해 손편지를 써서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역으로 좀더 있자고 결심한 게 시간이 흘러 10년이 됐다. 해군은 대령으로 진급해야 다시 배를 탈 수 있는 구조다. 사무실 벽에 ‘권토중래, 와신상담’ 글자를 붙여 놓고 전우들을 위해 적(북한)에게 복수하기만을 기다렸는데 끝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 2010년 4월7일 국군수도병원에서 생존자 58명이 환자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을 한 데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당시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돌이켜보면 군이 장병들을 ‘패잔병'으로 만든 것이다. 공황 상태에 있는 이들을 돌봐주지는 못할 망정 카메라 수백 대 앞에 그대로 노출시켰다. (한 생존자는 ‘기자회견이 아니라 청문회 같았다’고 회고했다) 나만 군복을 입혔는데 책임질만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함장 너는 전우들 다 죽이고 아직도 살아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우리를 이용했다고 본다.”

◇ “생존장병 58명 중 상이 유공자 인정은 12명뿐”
지난 17일 오후 제6회 서해 수호의 날을 앞두고 국립대전현충원 천안함 46용사 묘역에서 의전 단원들이 ‘천안함가’와 ‘꽃 피는 날’ 등을 부르며 추모연주를 하고 있다. 국립대전현충원은 서해 수호의 날을 맞아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사건, 연평도 포격 전사자 각 묘역에서 용사들의 넋을 달래주고 추모하기 위해 연주를 한다고 밝혔다. /신현종 기자

- 그동안 천안함 생존 장병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대우가 미흡했던 것 같다.
“군에서조차 한동안 우리들을 회피했다. 천안함 출신이 배를 타면 ‘재수없다’ ‘가까이 가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존 장병 상이(傷痍)로 국가유공자 인정을 받은 건 지난 11년 동안 34명 중 12명 밖에 안 된다. 그마저도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지만 급수에 따라 나눌 정도로 정책적인 배려도 없었다. 그렇게 큰 사고를 당했는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정신과 진료도 받지 못했는데 군에서는 병원 진료기록이 없으니 유공자 신청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전우가 있다면.
“부모가 없는 부사관과 아버지가 없는 수병이 특히 기억난다. 붙임성 있게 저를 아버지처럼 대해줬는데 안타깝다. 모 원사는 육지로 발령이 났는데도 ‘함장님이 좋고 천안함이 좋다’며 인사과에 사정해가며 배 타는 기간을 연장하기도 했다가 변을 당했다. 덩치가 유난히 컸던 의무장은 당시 갓난 아기가 있었는데 ‘다칠까봐 손을 못 만졌다’고 자랑했었는데.... 아빠 없이 자란 그 아이가 이제 11살이 됐다. 폭침 이후 가장 먼저 전역한 전준영(천안함생존자예비역전우회 회장)은 동기 넷이 모두 전사했다. 전역 후 제주도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는데 결국 혼자만 갔다. 유족들을 찾아 뵙고 ‘살아서 죄송하다’라고 울었다.”

◇ “생존 장병들은 패잔병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영철(왼쪽)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25일 강원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폐회식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영철(왼쪽)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평창올림픽 폐회식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조선일보DB

- 2018년 평창올림픽 때 ‘천안함 폭침 사건의 주범’으로 알려진 김영철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방남해 국빈급 대우를 받았었는데...
“당시 합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항의의 표시로 두번째 전역을 결심했다. 그런데 동기 한 명이 ‘잠깐이고 이 또한 지나갈 테니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말리더라. 생존 장병들도 들끓었는데 나는 ‘이렇게 해서 평화가 온다고 믿지는 않지만, 참고 견뎌보자’라고 얘기했다. 술을 참 많이 먹었고, 나쁜 생각도 들었다. 분통이 터져 잠 못 든 날들이 많았지만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기대하며 견디고 또 견뎠다.”
- 생존 장병들끼리 만나면 어떤 얘기를 하나.
“생존 장병들을 보면 이상한 습관 같은 게 있다. 식당에 가면 구석에 앉으려 하거나 작은 일에도 쉽게 주눅이 든다. 우리는 방이 있는 식당에서만 모임을 가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너희는 패잔병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는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패잔병으로 남는다는 건 용납이 되지 않는다.”

◇ “전사자, 생존장병의 부모와 자녀들이 천안함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야”
- PTSD로 고생하지 않았나.
“지금도 병원에 다시 다니고 있다. 3월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많아서 2011년까지 다니고 그뒤 안 다녔었는데. 병원에서 PTSD라고 하더라. 군에 있을 때 술을 많이 마셨는데 갑자기 극단적으로 생각이 바뀔까봐 전역 후 술을 끊었다. 지금은 무감각한데 예전에는 음모론자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몹시 억울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나는 13년째 천안함장이다. 해군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함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천안함장 최원일’로 남을 것이다. 혹자는 참고 견디면 역사가 나중에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고 하는데 나는 죽고난 뒤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 참으면 병 밖에 생기지 않는다. 명예회복이라는 게 딴게 없다. 전사자와 생존 장병들의 부모, 자녀들이 천안함 사건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으면 된다.”
최원일 전 천안함 함장이 천안함 폭침을 기록한 수첩. 2021. 3. 19 / 장련성 기자

그는 실종자 수색을 위해 독도함에 탑승한 2010년 3월30일부터 매일 수첩에 일기를 썼다. “경황이 없었지만 누군가는 기록을 안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는 “천안함을 기억하고, 음해하는 모두에게 고맙다”고 했다. “나에게 살아갈 힘을 줬다”는 게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