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적극방어전략(Active Defense)
1970년대 중반 군사혁신의 시발점에 섰던 미 육군의 전략적 몸부림
  • 양욱
  • 입력 : 2021.01.20 08:16
    미국의 적극방어전략은 소모전에서 기동전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등장한 재래전 교리였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미국의 적극방어전략은 소모전에서 기동전으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등장한 재래전 교리였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방어가 강한가 공격이 강한가, 소모전이냐 기동전이냐는 군사교리에 있어서 오랫동안 논쟁의 화두가 되어왔다. 현대적인 문명국가라면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을 전제로 하는 군사교리를 내세우는 경우는 없으며,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방어를 공식적인 군사전략으로 내세운다. 냉전시절 미군의 재래전 전략은 주로 유럽과 한반도 등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특히 1970년대 후반에 등장한 적극방어전략은 당대까지 미군의 재래전 교리 가운데 가장 통합적이고 논란이 큰 것이었으며, 추후 공지전투가 등장하는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교리 발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배경

    미국은 냉전 시절 소련과의 군사경쟁 속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꾸준히 군사력을 건설해왔다. 냉전이 시작되던 시기 트루먼 행정부는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전략으로 핵능력을 추구했다.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뉴룩(New Look) 전략을 채용하여 핵무기, 특히 전술핵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케네디 행정부에서는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전략이 제시되었고, 소련의 선제공격에 대한 생존과 보복을 위한 제2격 능력이 강조되면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가 핵 전략의 핵심사고로 자리잡았다.

    미소 핵균형이 이뤄지고 상호확증파괴가 핵전략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더 이상 핵무기를 강압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사진은 원자폭탄 투하로 초토화된 히로시마의 모습. <출처: 미 국방부>
    미소 핵균형이 이뤄지고 상호확증파괴가 핵전략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더 이상 핵무기를 강압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사진은 원자폭탄 투하로 초토화된 히로시마의 모습. <출처: 미 국방부>

    냉전시절 미국은 서구 유럽의 방어를 핵심적 국익으로 파악하고 NATO를 결성하여 소련에 대항해왔다. 재래전력에 있어서 유럽주둔 미군을 포함한 NATO전력은 소련에 비해 명백한 열세였으며, 이를 위해서 핵전력에 의한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가 주축이어왔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핵전력마저 소련이 우위를 보이게 되면서 NATO는 유연반응(Flexible Response) 전략을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유연반응전략이란 다양한 적 도발에 대해 그 수준에 맞는 대응을 하는 것으로, 재래식 도발에는 재래식 대응으로 대항해야 하며, 이런 과정에서 전진방어(Forward Defense) 전략이 채택되었다.

    핵전략으로 서구유럽의 보호가 어려워지자 미국은 유연반응전략과 전진방어전략으로 재래전 위협에 대응했다. 사진은 NATO 방어의 최전선인 서독의 연방군이다. <출처: Public Domain>
    핵전략으로 서구유럽의 보호가 어려워지자 미국은 유연반응전략과 전진방어전략으로 재래전 위협에 대응했다. 사진은 NATO 방어의 최전선인 서독의 연방군이다. <출처: Public Domain>

    전진방어전략은 1967년 이스라엘의 6일전쟁(6-day war,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일부 영감을 받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소련의 기동전을 분쇄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전진방어란 국경이나 영토 주변지역에서 침공을 거부·분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전진방어전략의 채택은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했는데, 애초에 재래전력의 열세에 더하여 이를 타계하기 위하여 NATO 회원국들이 재래전력 확충에 적극적인 투자를 할 의도나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당시 미국이나 NATO군은 아직 결국 전진방어라는 개념만으로는 부족하며, NATO의 지상전 전략은 좀 더 구체화될 필요가 있었다.

    미국은 전진방어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해 6일전쟁(사진)과 욤-키푸르 전쟁 등의 전훈을 연구했다. <출처: Public Domain>
    미국은 전진방어 전략을 구체화하기 위해 6일전쟁(사진)과 욤-키푸르 전쟁 등의 전훈을 연구했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미국은 1960~70년대 베트남전쟁의 패배를 통해 모병제를 채용하는 등 국방의 변혁을 겪었으며, 더욱 적은 병력으로 싸워야만 했다. 베트남전쟁으로 대분란전에 천착해있던 당시 전략적 사고를 극복하고자 하는 전략가들은 기동전을 통하여 소련군을 압도하는 전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1973년 욤-키푸르 전쟁(Yom-Kippur War, 제4차 중동전쟁)은 새로운 기동전 모델을 수립하는데 커다란 자극이 되었고, 그리하여 훗날 공지전투(AirLand Battle)로 불리게 될 기동전 교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바르샤바조약군의 기갑전력은 NATO 전력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미국은 그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 <출처: Public Domain>
    바르샤바조약군의 기갑전력은 NATO 전력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미국은 그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 <출처: Public Domain>

    새로운 교리는 서유럽 전선의 소련군 재래전력 공세라는 매우 특정한 위협을 상정하고 개발된 교리였다. 1970년대 중반 NATO의 전력은 기술적으로는 우위에 있었지만, 소련군의 수적 우위를 상쇄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러한 전략적 열세를 해결할 새로운 기동전의 구상에 앞서 미군이 먼저 실시한 것은 욤-키푸르 전쟁에 대한 전훈 분석이었다. 1973년 창설된 미 육군 교육사령부(TRADOC)는 이를 통하여 현대적 무기체계의 치명성 향상, 지형과 위장의 활용, 진격로의 설정, 제병협동의 효율성 등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워게임에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리의 발전

    새로운 전투개념의 교리화를 가열차게 추구한 것은 당시 교육사령관인 드푸이(William Eugene DePuy) 대장이었다. 에이브람스 대장의 요청에 따라 욤-키푸르 전쟁의 분석을 지시한 드푸이는 이미 1974년 7월부터 휘하 7개의 학교와 센터로 하여금 새로운 교리를 부분적으로 적용하도록 독려하여 '어떻게 싸울 것인가(How to fight)'는 교육사령부의 화두가 되었다. 특히 드푸이 장군은 1974년 10월 1일부터 2일사이 포트 녹스에서 중대-포대급의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옥토버페스트(Octoberfest, 10월 축제)'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세미나에서는 감시하 전진과 제병합동 극대화 등 새로운 전술의 미래가 그려졌다.

    새롭게 창설된 미 육군 교육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인 드푸이 장군은 베트남전 패전 이후 침체기를 거치던 미 육군에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면서 지성적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출처: 미 국방부>
    새롭게 창설된 미 육군 교육사령부의 초대 사령관인 드푸이 장군은 베트남전 패전 이후 침체기를 거치던 미 육군에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면서 지성적 활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출처: 미 국방부>

    새로운 교리에서 주목한 것은 전차의 취약점이었다. 욤 키푸르 전쟁에서 목도된 바와 같이 현대적 대전차 미사일의 등장은 보병의 방어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고, 이는 수적으로 절대우위에 있는 바르샤바 조약군에도 적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드푸이는 화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는 무기체계로 중사단을 무장하고자 했다. 화력의 비약적 증강으로 최초의 몇차례 교전 만으로도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욤-키푸르 전쟁(사진)에서 현대적 무기체계의 치명성을 확인한 미군은 이를 교리에 적용하고자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욤-키푸르 전쟁(사진)에서 현대적 무기체계의 치명성을 확인한 미군은 이를 교리에 적용하고자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새로운 교리는 1975년 FM 100-5 '작전' 교범의 선행판으로 만들어져 육군 지휘부의 평가를 먼저 거쳤다. 드푸이 장군은 1975년 10월 유럽육군 사령관인 블랜차드(George S. Blanchard) 대장에게 새로운 교범을 제공하면서 NATO의 새로운 지상전 태세를 제안했다. 또한 동년말까지 신 교범의 선행본이 주요사령부와 육군부, 육군 지휘관회의 등에서 배포되었다. 그리고 현장의 의견을 반영하여 드디어 1976년 7월 육군야전교범 100-5의 완정개정판이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지형적 이점과 현대적 무기체계를 십분 활용했던 욤-키푸르 전쟁의 대기갑전은 적극방어의 교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Public Domain>
    지형적 이점과 현대적 무기체계를 십분 활용했던 욤-키푸르 전쟁의 대기갑전은 적극방어의 교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출처: Public Domain>

    새로운 교리는 베트남전 패배 이후 미육군의 통렬한 현실인식과 솔찍한 불안감이 반영되었다. 현대적 무기체계의 치명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었으며, 미군뿐만 아니라 적군도 이러한 무기체계를 보유할 수 있음을 가정했다. 위협의 상정도 가정적이고 이론적인 차원을 벗어나 현실적인 위협을 제시했다. 특히 준비태세와 효율성이 극히 강조되었는데, 무엇보다도 개전 초에 다수의 병력을 전장으로 전개하는 것이 당시로서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병력을 최대한 동서독 국경지대에 가깝게 배치해야만 했다. 이는 기존에 적용되고 있던 전진배치전략과 같은 맥락의 사고이기도 했다.

    적극방어전략은 유럽 내의 제한된 재래전력으로 바르샤바 조약군을 막기 위해서는 방어의 강점을 십분 활용해야한다는 소모전적 사상에 기반하고 있었다. <출처: 미 국방부>
    적극방어전략은 유럽 내의 제한된 재래전력으로 바르샤바 조약군을 막기 위해서는 방어의 강점을 십분 활용해야한다는 소모전적 사상에 기반하고 있었다. <출처: 미 국방부>

    그러나 FM 100-5가 가진 명백한 한계도 있었다. 최초의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엄청난 병력을 자랑하는 바르샤바조약군은 대규모의 후속부대와 똑같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1976년 당시로서 미군은 전술핵 이외에는 후속부대를 격파할 수단이 부족했다. 이에 따라 이후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은 적 후속부대를 탐지할 수 있는 공중센서, 대규모 증원부대를 격멸할 수 있는 토마호크나 ATACMS와 같은 정밀타격무기 등의 개발에 나서면서 상쇄전략을 내세우게 되었다.

    적극방어전략은 적군의 제2파와 3파 등 후속공격에 대한 충분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이는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맨 좌축)으로 하여금 상쇄전략을 추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적극방어전략은 적군의 제2파와 3파 등 후속공격에 대한 충분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이는 해롤드 브라운 국방장관(맨 좌축)으로 하여금 상쇄전략을 추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출처: US National Archives>

    요컨데 드푸이의 새로운 교리는 새로운 무기체계의 화력에 중점을 두었으며 아직 본격적으로 기동전을 결합하지 못했다. 그 결과 NATO의 적극방어전략을 세우는데 기여하는 차원에서 그쳤다. 그러나 드푸이의 시도는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미 육군이 사고를 전환해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교리 속의 적극방어

    1976년판 FM 100-5 교범은 여러 면에서 이전의 교범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과거에 "야전복무규정 - 작전(Field Service Regulations - Operations)'이라던 이름이 '작전(Operations)'으로 바뀌었고, 이전 교범들과는 달리 그림, 도해, 도표 등이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글자 폰트도 여러가지였고, 글자에 색깔도 들어갔다. 주요한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박스 설명이나 불릿 기호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더욱 독특했다.

    1976년판 FM 100-5 교범은 여러 면에서 이전의 교범들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우선 표지부터 달랐다. <출처: Public Domain>
    1976년판 FM 100-5 교범은 여러 면에서 이전의 교범들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우선 표지부터 달랐다. <출처: Public Domain>

    우선 1976년판 작전 교범은 기본적으로는 기동전 보다는 소모전의 사상에 바탕을 두었다. 적군의 섬멸과 지리적 중요지점의 방어를 핵심적인 목표로 제시하며, 적군의 전투의지를 무너뜨리는 것을 부차적 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전력비(force ratio)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근거를 제시하면서, 교환비(exchange rate)를 중요한 전술적 판단가치로 삼는 것은 전형적인 소모전 사상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화력을 기동보다 우선했다. 과거 교범에서는 화력과 기동의 균형을 추구했지만, 1976년판 교범에서는 기동은 화력을 집중하기 위해서 의미를 가지며, 기동 그 자체만 가지고는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바라보았다.

    FM 100-5 교범의 1976년판은 다양한 도해와 도표 등을 제시하며 기술적인 접근을 중시했다. <출처: Public Domain>
    FM 100-5 교범의 1976년판은 다양한 도해와 도표 등을 제시하며 기술적인 접근을 중시했다. <출처: Public Domain>

    여전히 전투원 자체를 결정적 요소로 바라보던 이전 교범들과는 달리, 신 교범은 우수한 무기체계의 확보와 이를 능숙히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전장의 효율성을 좌우한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한 최초의 교범이 되었다. 예를 들어 전차지휘관에게 2천미터 이상의 거리에서는 대전차 미사일과 직접 교전을 회피하라고 권고하는 등 전투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제공했다. 또한 공격에 비해 방어가 싸울 장소를 선택하고 은폐와 엄폐에 더하여 지형적 이점과 무기체계의 최대사거리를 능력껏 활용할 수 있다면서, 신 교리는 방어의 장점을 역설했다.

    FM 100-5 교범 1976년판은 유럽전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출처: Public Domain>
    FM 100-5 교범 1976년판은 유럽전선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출처: Public Domain>

    방어에도 기술적 디테일이 세세히 삽입되었다. 우선 과거 교범들에는 기동방어와 지역방어의 2가지 방어형태를 제시했지만, 신 교범에서는 오직 적극방어 1개의 종류만을 제시했다. 또한 지형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방호 및 엄폐수단으로 지형을 활용하여 화력을 극대화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이러한 지적은 유럽 전구에 특화된 것으로, 교범의 제13장을 "NATO에서의 작전(Operations Within NATO)"으로 명명하고 중앙유럽의 지형을 활용하여 바르샤바 조약군을 격퇴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적극방어 전략의 세부

    지형의 특성상 대규모의 기갑부대가 진격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군의 주요공격축선은 풀다 간격(Fulda Gap), 북독일 평원(North German Plain), 호프 회랑(Hof Corridor), 괴팅겐 회랑(Gottingen Corridor)등으로 파악하였다. 적극방어는 이러한 지형적 특성을 활용하여, 전장을 크게 엄호부대 지역, 주전투지역, 후방지역의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방어선을 형성하도록 했다.

    바르샤바조약군의 주요 공격축선 <출처: J. Mearsheimer ">
    바르샤바조약군의 주요 공격축선 <출처: J. Mearsheimer "Conventional Deterrence", 필자 번역>

    엄호부대 지역(covering force area)은 적의 주공과 최초로 맞붙는 최전방 지역이다. 주전투지역(main battle area)은 엄호부대 지대 이후의 지역으로 적극방어가 강조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결전이 이뤄지는 장소가 된다. 후방지역(rear area)은 주전투지역 배후의 지역으로 주전투지역에 대한 군수지원과 통신 등을 담당하며, 적의 공중강습이나 공수 작전으로부터 지켜내야만 하는 지역이다.

    적극방어 작전은 엄호부대, 지역 방어선, 그리고 역공의 3단계로 구성된다. 과거에는 적군이 국경을 돌파해오면 최대한 지연전을 벌이는 것이 기존의 전술이었지만, 적극방어에서는 전차와 기계화 전력으로 증강된 엄호부대가 적군 선봉의 최대한 저지하여 진격의 속도를 줄이고 재편성하도록 한다. 엄호부대의 임무는 적군 주공의 공격 위치와 방향, 그리고 전력규모를 드러나게 하고, 아군 방어주력의 위치를 알 수 없도록 기만하며, 적의 방공능력을 감소시키거나 엉뚱한 방향을 방어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엄호부대 작전의 핵심은 아군의 주된 병력을 위해 시간을 벌어주는 것으로, 공간을  시간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된다.

    적극방어 전략은 수적 우위에 있는 막강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기갑전력에 대응하여 정교한 방어전략으로 대응할 것을 요구했다. <출처: Public Domain>
    적극방어 전략은 수적 우위에 있는 막강한 바르샤바 조약군의 기갑전력에 대응하여 정교한 방어전략으로 대응할 것을 요구했다. <출처: Public Domain>

    그 사이 구역방어부대가 최초 교전 지역에서 20~30km 지역에 강력한 방어선을 펼치면서 주전투지역을 준비한다. 여기서 이들부대는 사전에 준비해둔 지뢰지대나 대전차방호벽 등 인공장애물이나 자연적 지역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군의 침공을 저지시킨다. 과거의 위치방어(positional defense)전술과 유사하지만 적극방어는 상대적으로 행동의 자유를 허용하여 방어선의 조정을 허용하였다. 이렇게 방어선을 유연하게 함으로써 적의 공격주력을 인지하고 예비대 등으로 대응함으로써 효율적으로 공격을 저지할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첨입해들어오던 적 공격이 좌절되면 이는 오히려 적 전열의 약점으로 바뀌며, 이제 마지막 단계인 역공 단계로 넘어 간다.

    적극방어전략의 제1단계는 엄호부대가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주공을 정확히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출처: 미 육군>
    적극방어전략의 제1단계는 엄호부대가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주공을 정확히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출처: 미 육군>

    적의 병력집중도가 분산되고 군수지원이 늘어지는 사이 적의 측면은 취약해진다. 바로 이러한 측면을 공격하여 침공부대를 분단시키고 포위된 전력을 섬멸하는 것이 바로 역공단계의 핵심임무이다. 또한 이 단계에서 적의 후방으로 파고 들며 핵심 방공체계, 포병지원과 군수지원체계를 파괴하는 것도 부수적 임무가 된다. 역공단계는 과거의 기동방어와 유사하지만, 적극방어에서는 반드시 측면 공격과 포위만으로 정형화하지 않고 침공해오는 적에 대한 정면공격을 가하는 방법으로 역공을 수행할 수도 있다. 핵심은 적의 제2파가 도착하기 전까지 제1파를 무력화하거나 섬멸하는 것이다.

    주전투지역에서 적군의 주공이 꺾이면 과감한 역공으로 제1파를 신속히 무력화/섬멸하는 것이 적극방어전략의 핵심이다. <출처 : 미 육군>
    주전투지역에서 적군의 주공이 꺾이면 과감한 역공으로 제1파를 신속히 무력화/섬멸하는 것이 적극방어전략의 핵심이다. <출처 : 미 육군>

    한편 이러한 과정에서 공지전력의 합동성은 어느때보다 중요해졌다. 애초에 전진방어전략 시절부터 NATO는 적에 대항하는 재래전 화력의 상당수를 근접항공지원에 의존해왔었다. 문제는 1970년대에 걸쳐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군의 항공전력이 급성장했고 기계화부대의 지대공 역량이 상당히 향상되었다는 점이다. 새로운 교리에서는 따라서 육군과 공군의 협업을 중시했으며, FM 100-5 교범 1976년판에는 별도의 장으로 공지전투(Air-Land Battle)를 다루기까지 했다.


    전략적 OODA 루프

    한편 1976년 전투기 마피아로 유명했던 존 보이드 대령은 "분쟁의 패턴(Patterns of Conflict)"이라는 일련의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전략적 비전을 제시했다. 일찌기 보이드 대령은 OODA 루프라는 개념을 통해 전투기 조종사의 교전과정을 가시화하면서 전투의 기본원칙을 제시한 바가 있다. 그는 이러한 OODA루프가 단순히 전술적 행동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전략적 차원에서도 적용되고 있음을 이 연구를 통해서 구체화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적군의 OODA 루프를 무너뜨림으로써 적을 혼란에 빠뜨려 승리를 거둬온 것이 전쟁의 본질이라는 것이었다.

    보이드가 제시했던 OODA 루프 모델 <출처: 필자>
    보이드가 제시했던 OODA 루프 모델 <출처: 필자>

    이러한 OODA 루프 붕괴 사례는 지상전, 특히 기동전의 대명사인 전격전에서도 목격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벌지 전투에서 연합군은 기갑부대의 약점을 찾아 예봉을 꺾고 전진을 방해하면서 기동능력을 상실시킴으로써 뮤즈강 앞에서 돈좌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방어선이 종심 깊이 전개해야만 하며, 벌지전투때는 연합군이 수적 우위에 있었지만 바르샤바 조약군에 대해서는 오히려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보이드 대령이 전역 후에 수행했던 연구 ">
    보이드 대령이 전역 후에 수행했던 연구 "분쟁의 패턴"은 미래전쟁에 대한 사고의 바탕을 제공했다. <출처: Public Domain>

    이에 대하여 보이드는 "반-전격전(Anti-Blitz)"을 제안했다. 기동성 높은 소규모 부대를 배치하여 적 진격선을 따라 일련의 매복기습공격을 반복하면서 적의 속도를 줄인다. 이 과정에서 별도로 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지역에 얽매임 없이 점대점 교전을 계속한다. 이러한 공격은 전격전의 기동능력을 저지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어떠한 반격이 진짜이고 어떠한 것을 무시해도 되는지 전장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러한 교전형태는 사실 무기체계보다는 지휘능력이 더욱 중요한데, 미군의 지휘통제능력이 소련보다 더욱 유연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드는 보았던 것이다.

    보이드 대령은 소련의 기갑전력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반전격전을 제안했다. <출처: Public Domain>
    보이드 대령은 소련의 기갑전력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반전격전을 제안했다. <출처: Public Domain>

    보이드의 반전격전 사상은 지역방어를 중시하는 적극방어에 비하여 훨씬 더 기동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고정지역에서 방어에 집중하는 적극방어와는 달리 제한적이나마 일련의 공세적 기동이 가능했다. 또한 예비대가 곧바로 일선에 투입되는 적극방어와는 달리, 반전격전은 예비대가 준비되는대로 합류하게 된다. 적에 대해 일전으로 승리를 추구하는 적극방어와는 달리 반전격전은 계속적으로 적을 공격하고 압박함으로써 승리를 추구하였다. 매우 효율적인 방안이었으나 당시로서는 급진적이기도 한 보이드의 전략은 미 육군의 기동전 교리로 곧바로 채용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전략적 사고의 틀을 바꾸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적극방어전략의 의의

    적극방어 자체는 미국이 당시까지 가지고 있던 소모전 사상을 여전히 반영하고 있다. 현대적 무기체계의 치명성을 지형적 장점과 결합하여 방어의 강점을 최대화하여, 화력중심의 선형전을 현대적 교리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문제는 적극방어가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적의 제1파 공격에 대한 것이고, 후속되는 제파공격를 좌절시키는 것은 적극방어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소련군의 종심작전교리인 작전기동군(Оперативная маневренная группа) 개념에 따라 후속부대로 돌파구를 형성하여 후방으로 진출하면 전선이 붕괴될 수 있다는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

    적극방어 전략은 소련의 작전기동군에 대응하기는 부족한 교리였지만, 추후 교리발전의 토대를 제공했다. <출처: 미 국방부>
    적극방어 전략은 소련의 작전기동군에 대응하기는 부족한 교리였지만, 추후 교리발전의 토대를 제공했다. <출처: 미 국방부>

    미 육군 교육사령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1976년판 FM 100-5 '작전' 교범도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었다. 과거 기동전과 소모전, 공격과 방어 등에서 나름 균형감을 유지했었던 기존 교범들과는 달리 소모전과 방어에 방점을 두면서 오히려 시대를 역행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논리의 개발을 위해 이전 교범과는 달리 구체적인 수치와 통계, 도표 등을 적극 활용했지만, 논리와 사례가 작위적이라는 비판들도 뒤따랐다. 무엇보다도 드푸이 대장에 대해 육군 곳곳에 펼쳐져 있던 반감이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드푸이 장군의 접근은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새로운 교리는 교육사령부의 존재의미를 강하게 어필하였다. 사진은 웨스트모어랜드 대장에게 브리핑하는 제1보병사단장 시절의 드푸이 장군. <출처 : 미 육군>
    드푸이 장군의 접근은 논란의 대상이었지만, 새로운 교리는 교육사령부의 존재의미를 강하게 어필하였다. 사진은 웨스트모어랜드 대장에게 브리핑하는 제1보병사단장 시절의 드푸이 장군. <출처 : 미 육군>

    그러나 이러한 교리 논쟁은 미 육군이 다시 한 번 스스로를 돌아보고 미래의 방향을 그려나가는 지적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 1973년 최초로 사령부로 승격되어 창설된 교육사령부는 신교범 창간을 계기로 미 육군에게 지적 화두를 제시하고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비록 당시에는 크게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1976년판 작전교범에 별도의 장으로 포함되었던 공지전투가 부각된 것도 드푸이와 교육사령부의 과감한 접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로 볼 수 있다.


    저자소개

    양욱 | 군사학 박사(군사전략)

    적극방어전략(Active Defense)

    중동지역에서 군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했으며, 현장에서 물러난 후 국방대에서 군사전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의 수석연구위원이자, 각 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의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또한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과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전략과 국방정책 등을 가르치고 있다. 본 연재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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