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미니에 라이플
소총의 첫번째 게임체인저
  • 홍희범
  • 입력 : 2020.02.06 08:39
    M1851 미니에 라이플 <출처: Public Domain>
    M1851 미니에 라이플 <출처: Public Domain>


    총기의 역사에는 판세를 완전히 바꾼 ‘게임체인저’가 시대마다 존재한다. 그리고 그 게임체인저가 19세기만큼 짧은 기간에 집약적으로 나온 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 100년도 채 안되는 시간 사이에 사실상 그 이전 300~400년 동안 발생한 변화를 월등히 뛰어넘는 엄청난 변화들이 줄줄이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들 중 첫 번째 ‘게임체인저’가 바로 미니에 라이플이다.

    미니에 라이플은 간단하게 말해 미니에탄을 쓰는 강선총이라는 뜻이다. 그 이전의 시대에는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에 사용하던 머스킷, 즉 강선이 없는 활강 총열에 구슬 모양의 납 탄환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총기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 머스킷 중에서도 격발 방식이 부싯돌 격발식, 즉 수석식의 머스킷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전장의 ‘왕’으로 자리 잡았으며, 19세기 중반 무렵에 격발 방식이 뇌관식으로 서서히 바뀌던 무렵에도 총열의 주력이 활강식이라는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영국의 P42 머스킷. 아직 강선이 군용 소총에 보편화되기 직전의 총이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의 P42 머스킷. 아직 강선이 군용 소총에 보편화되기 직전의 총이다. <출처: Public Domain>

    군용 소총 총열이 압도적으로 활강식인 이유는 일단 18세기 말~19세기 초반 무렵까지 강선이 파인 총열을 대량으로 생산하기가 수월하지 않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 문제가 산업혁명으로 어느 정도 개선된 다음에도 강선식 총열이 대량으로 보급되지 못한 이유는 발사 속도의 문제였다. 사실 강선 자체는 19세기에 이미 수백 년 간 그 효과가 알려진 존재였고 일부는 전장에서 사용되어 효용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발사 속도였다.

    강선총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탄이 강선과 빈틈없이 맞물려야 한다. 그래야 강선에 의한 회전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어 사거리와 명중률이 증대된다. 문제는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절대다수의 소총은 탄환과 화약을 총구에서 밀어 넣는 전장총이었다. 아직 믿을만한 후장총이 개발되기 이전의 시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전장총은 탄이 강선과 빈틈없이 맞물리면 당연히 총탄을 약실까지 밀어 넣는데 힘이 들고 시간이 걸린다. 해결책으로 기름 먹인 가죽으로 탄을 감싸는 등의 아이디어는 있었으나 전통적인 방식, 즉 종이로 만든 탄약포를 찢어 화약을 총열에 넣은 다음 그 탄약포의 종이로 탄환을 대충 감싸 약실까지 쑤셔 넣는 -당연히 총열의 밀폐 수준은 썩 좋지 않은- 에 비하면 여전히 압도적으로 발사 속도가 느렸다. 특히 조금 쏘다 보면 총열 안의 화약 찌꺼기가 정말 탄의 장전을 방해할 정도로 쌓이는 흑색 화약 시대에는 이 문제가 강선총에서 특히 심각하게 두드러졌다.

    앙리-귀스타브 델비뉴(좌)와 클로드-에티엔 미니에(우)의 노력으로 미니에 탄환이 완성될 수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앙리-귀스타브 델비뉴(좌)와 클로드-에티엔 미니에(우)의 노력으로 미니에 탄환이 완성될 수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1830~40년대의 프랑스인들이 발명한 미니에(Minié )탄, 그리고 그 탄을 사용하는 미니에 라이플이다. 사실 대부분의 발명이 그렇듯, 이것이 그전에는 없다가 갑자기 천재 한 명의 기가 막힌 발상으로 뽕! 하고 튀어나온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미 1820년대부터 기본이 되는 아이디어가 몇몇 나라에서 계속 연구되고 있었고, 1830년대에는 미니에탄의 기본이 되는 형태의 탄환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에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고 현실의 총탄으로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프랑스였고, 그중에서도 앙리-귀스타프 델비뉴(Henri-Gustav Delvigne)와 클로드-에티엔 미니에(Claude-Etienne Minié)였다.

    프랑스의 1849년형 라이플 머스킷. 미니에탄을 사용. <출처: Public Domain>
    프랑스의 1849년형 라이플 머스킷. 미니에탄을 사용. <출처: Public Domain>

    특히 프랑스 육군 현역 장교로서 단순히 총탄의 연구뿐 아니라 그것을 쓰는 총기의 개발 및 생산 등 많은 부분에 깊이 관여하고 현역 도입의 중요한 계기를 만든 미니에가 가장 지명도가 높았고, 그의 이름이 최초로 전군 제식화된 강선총 및 그 탄환을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특징

    미니에 소총은 사실 총 자체보다는 탄약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사실 총 자체, 즉 강선이 파인 총열이 달려있고 뇌관 격발 기구가 설치된 총이라는 존재 자체는 미니에탄이 존재하기 전에도 주로 수렵용으로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니에탄은 강선총을 만들어낸 것도, 처음 보급시킨 것도 아니고 “세계적인 군용 소총의 표준으로 이끌어 낸” 존재라는 점에서 정말 의의가 크다.

    다양한 형태의 미니에탄.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출처: Public Domain>
    다양한 형태의 미니에탄.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출처: Public Domain>

    미니에탄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다. 일단 그 이전까지 탄환의 표준이던 ‘구형’이 아니라 ‘원추형’이다. 원추형이라기 보다는 끝이 둥근 원통에 가깝지만, 어쨌든 총탄은 당연히 ‘굵직한 구슬’이라고 생각하던 수백 년의 상식을 완전히 깨뜨린 것은 사실이다.

    스프링필드 1861(위)와 엔필드 P53(아래)의 기관부 비교. 대부분 큰 차이는 없다. <출처: Public Domain>
    스프링필드 1861(위)와 엔필드 P53(아래)의 기관부 비교. 대부분 큰 차이는 없다. <출처: Public Domain>

    이런 모양이 된 가장 큰 이유는 탄을 팽창시키기 위해서다. 미니에 탄환의 지름은 사용되는 총의 총구 지름보다 아주 약간 작다. 물론 안까지 밀어 넣으려면 꽂을대로 쑤셔 넣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빽빽하기는 하지만 말이다(안 그러면 약실 안에 머물지 않고 흘러내릴 것이다). 하지만 납으로 된 재질의 탄환은 발사될 때 생기는 화약의 폭발 가스 압력으로 아래가 부풀고, 그러면 간단하게 강선과 맞물려 회전 효과가 충분히 발휘될 뿐 아니라 단단하게 총열이 밀폐되므로 그만큼 에너지가 확실하게 탄환을 밀어준다.

    미국에서 개발한 미니에탄 개량형. 뒤를 비운 것이 성능을 개선했다. <출처: Public Domain>
    미국에서 개발한 미니에탄 개량형. 뒤를 비운 것이 성능을 개선했다. <출처: Public Domain>

    사실 초기의 미니에탄은 탄 뒤쪽에 빈 공간이 있고 그 안에 나무 플러그가 끼워져 있어 그 플러그가 밀리면서 납이 퍼지는 효과를 노렸고, 조금 뒤에는 탄 뒤쪽의 빈 공간 가운데에 플러그 모양의 부분이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하지만 1850년대에 미국 하퍼스 페리 조병창의 제임스 H. 버튼(James H. Burton) 대위는 뒤쪽의 빈 공간에 뭘 채우지 않고 그야말로 텅 비우는 편이 가스에 의한 팽창 효과가 더 클 뿐 아니라 생산 단가까지 낮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당사국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등 다른 나라들에도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실용화되었다.

    총열 안으로 탄을 밀어 넣는 꽂을대의 단면도와 꽂을대 끝부분의 사진. <출처: Public Domain>
    총열 안으로 탄을 밀어 넣는 꽂을대의 단면도와 꽂을대 끝부분의 사진. <출처: Public Domain>

    미니에탄의 또 다른 장점은 원추형이기 때문에 공기역학적으로도 기존의 구슬형 탄환보다 압도적으로 우수하고, 또 구형 탄환이 가지던 부피와 무게의 제약에서도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구형 탄환은 공기역학적으로도 그렇지만 무게를 늘리려면 지름을 늘리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당시에 대량으로 사용 가능한 거의 유일한 중금속이 납으로 한정된 상황에서는 특히 그랬다. 그러나 원추형 탄환이 되면서 굳이 지름을 늘리지 않고도 무게가 적잖이 늘어났다. 여기에 탄속까지 늘어나면서(밀폐 효과가 높아졌기 때문에) 총기의 위력이 일정 수준 늘어나는 효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총열 안으로 탄을 밀어 넣는 꽂을대의 단면도와 꽂을대 끝부분의 사진. <출처: Public Domain>
    총열 안으로 탄을 밀어 넣는 꽂을대의 단면도와 꽂을대 끝부분의 사진. <출처: Public Domain>

    이로 인해 미니에탄이 사용된 총기들은 그 이전 세대의 총기들보다 총의 구경이 약간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굳이 지름을 옛날과 동일하게 유지하지 않아도 충분한 탄 질량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도 처음 미니에탄을 사용한 P51에서는 구경이 .70(0.7인치, 약 17.8mm)이었지만 2년 뒤에 나온 P53은 .577(15mm)이다. 이로써 19세기 내내 이어지는 소총 구경의 축소 경향이 본격적인 스타트를 끊게 된다.


    운용의 역사

    미니에탄을 쓰는 소총, 일명 미니에 총의 시작은 1849년에 프랑스군이 미니에탄을 쓰는 1849년형 소총(Mle1849)을 채택한 것이었다. 프랑스군이 이 총을 도입한 이유는 재미있는데, 다름 아닌 식민지 전쟁 경험이었다. 알제리에서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군은 현지인들이 방어용으로 사용하던 매우 긴 총열의 머스킷이 가진 사거리에 고전했다. 문제는 방어하는 쪽에서는 얼마든지 총열이 아주 긴 총을 쓸 수 있지만 공격하는 쪽은 그러기 어렵다는 것. 그런 와중에 사거리와 명중률을 크게 늘려준다는 물건이 나왔으니 금방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채택하자 영국이 뒤따르고 오스트리아가 뒤따르고... 이런 식으로 1860년 무렵까지 거의 전 유럽과 미국을 석권하게 된다.

    사실 발사 속도라는 면에서 미니에 소총은 그다지 대단하지는 않았다. 뇌관식 격발 기구는 이전의 수석식 격발 기구에 비하면 발사 준비가 빠르고 불발률은 낮지만 그렇다고 수석식 총기보다 발사 속도가 아주 빠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발사 속도라는 면, 즉 양적인 화력에서 미니에탄과 총이 결정적인 장점을 가진 것은 아니다.

    1851년형 미니에 총으로 무장한 프랑스 병사. <출처: Public Domain>
    1851년형 미니에 총으로 무장한 프랑스 병사. <출처: Public Domain>

    반면 사거리와 명중률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이는 영국군의 테스트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영국군은 10인치 x 10인치 (25x25cm)의 표적에 대해 기존의 활강식(강선이 없는) 머스킷과 비교 평가를 해 보았다. 그 결과 200야드(약 180m)에서는 활강식 머스킷이 약 42~48%를 명중시켰고 300야드(약 270m)에서는 18%를 명중시켰다.

    반면 미니에탄을 쓰는 강선식 머스킷은 300야드에서 46~58%를 명중시켰다. 게다가 주목할만한 것은 500야드(약 450m)였다. 이 거리에서도 18%의 탄이 표적에 명중했다. 사거리와 명중률의 증가는 누가 봐도 명백했고, 여기에 발사 속도가 기존의 활강식 머스킷과 큰 차이가 없다면 선택은 무엇이 될지 당연했다.(사실 활강총의 시대에만 해도 가늠자-가늠쇠는 대충 총구의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 정도에 불과했지만, 미니에총의 시대에는 정말 제대로 조준하기 위한 도구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수한 총기가 아닌 대량 생산된 일반 군용 소총의 가늠자가 사거리에 따라 조절이 가능해진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다.)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미니에 총 중 하나인 영국의 P53. <출처: Public Domain>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미니에 총 중 하나인 영국의 P53. <출처: Public Domain>

    물론 여기에 또 하나의 조건이 있다. ‘강선이 파인 총열의 대량 생산’이다. 사실 총열에 강선을 파는 작업은 소량이면 모를까 대량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산업혁명의 여파로 공작 기계가 발달하면서 강선이 파인 총열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미니에탄과 총의 보급이 단기간에 빠르게 진행된 것도 이런 산업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전장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을까. 사실 사거리와 명중률의 장점이 제대로 발휘되었는지는 그야말로 “케바케”다. 전원이 비교적 잘 훈련된 병력으로 구성된 영국군의 경우 원래부터 사격 훈련에 적잖은 투자를 하던 군대 -나폴레옹 시대에도- 였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크림전쟁(1853~1856)에서 비교적 잘 활용됐다. 숙련도가 높은 병사들로 구성된 부대들의 경우, 엔필드 P51이나 P53등의 미니에탄 사용 총기로 기존의 활강식 총기 기준으로는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300야드는 물론이고 600야드 밖의 적 밀집 대형에 대해서도 큰 피해를 입혔다. 활강총에만 익숙하던 러시아군은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원거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적의 흰자위가 보일 때까지” 육박해서 집중 사격을 날리는 나폴레옹식 전술이 먹히기 힘든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관통된 전사자의 뼈. 남북전쟁 당시의 부검 유물 중 하나. <출처: Public Domain>
    관통된 전사자의 뼈. 남북전쟁 당시의 부검 유물 중 하나. <출처: Public Domain>

    반면 미니에탄과 총기가 어느 전쟁보다도 대량으로 조달되어 사용된 남북전쟁에서 그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는 못했다. 사실 숙련된 사수가 사용하면 400-500야드 밖의 사람도 맞추는 그야말로 저격총같은 존재로 사용될 수 있던 미니에 총이지만, 전쟁 초반의 남북 양측 지휘관들은 여전히 나폴레옹 시대의 전투 교리를 신봉하던 사람들이라 여전히 “적의 흰자위가 보일 때까지 쏘지 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번에는 이 총을 쓰는 병사들이 자기 총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 엄청난 병력 소모로 인해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신병들이 대거 투입되었고, 이들 상당수, 특히 북부에서 징집된 병력 상당수는 총과 사격에 무지했다. 결국 좋든 싫든 이들의 사격이 효과를 보려면 근거리까지 적을 접근시켜 집중 사격을 시키는 나폴레옹식 발상을 대체로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사거리와 명중률을 살리지 못해도, 맞은 뒤의 효과는 확연히 그 이전과 달랐다. 구슬형 탄환의 경우 인체를 뚫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고, 또 뼈와 근육에 의해 코스가 바뀌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미니에탄은 관통력이 좋고, 또 뼈나 근육에 의해 코스가 변하는 경우도 적었다. 뼈가 가로막을 경우 종종 그대로 뼈를 박살 내고 통과하곤 했다. 따라서 사지 절단에 이르는 경우가 이전보다 훨씬 많았고, 또 출혈 과다로 사망하는 경우도 늘었다. 여기에 밀집 대형으로 돌격하던 당시에는 앞사람을 뚫고 뒷사람을 맞추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다 보니 사상자가 이전의 전쟁보다도 대량으로 발생했다. 남북전쟁이 지금에 비하면 훨씬 원시적 화기로 수행되었음에도 미국 역사상 치러진 그 모든 전쟁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을 뿐 아니라 전투당 사상자 숫자도 상당한 이유도 일정 부분 미니에탄 탓이다(다만 이 시대에도 사상자는 총탄보다 포탄이 더 많이 발생시켰다).

    남북전쟁 당시의 부상자를 묘사한 그림. 총상에 의한 팔다리의 절단은 이 시대 전쟁에 특히 자주 보이는 양상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남북전쟁 당시의 부상자를 묘사한 그림. 총상에 의한 팔다리의 절단은 이 시대 전쟁에 특히 자주 보이는 양상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다만 미니에탄과 이것을 쓰는 전장식 소총이 전선을 지배하는 시대는 길지 않았다. 1850년대 중반부터 1860년대 중반 사이에는 전장의 주역으로 각 주요국의 전쟁에서 대활약 했지만, 1860년대 후반부터 구식화의 길을 걷기 시작해 1870년대 초반에는 순식간에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발사 속도 문제는 물론 은/엄폐 문제까지 해결한 후장식 소총이 주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의 총기 격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모든 군대가 이 격변을 실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어서, 일부 국가들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이 총을 적잖이 사용했다.


    총기 종류

    원조가 된 프랑스의 1849년형 머스킷이나 1851년형 머스킷은 격발 기구가 뇌관식이고 강선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 형태는 조금만 떨어져 보면 그 이전의 수석식 머스킷과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간단한 격발 기구와 총열로 구성되어 있고 총구로 탄을 밀어 넣는 전장식 총기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총기들도 대체로 큰 차이가 없었다. 실제로 프랑스에 대항해 실용화된 영국의 엔필드 P53이나 미국의 스프링필드 M1861은 프랑스의 ‘미니에 총’과 형태상으로도 결정적인 차이는 없다. 총열과 목제 스톡을 고정하는 밴드의 숫자 차이나 기타 디테일은 물론 다르지만 말이다.

    오스트리아의 로렌츠 미니에 총 <출처: Public Domain>
    오스트리아의 로렌츠 미니에 총 <출처: Public Domain>

    대표적인 총들은 앞서 언급한 프랑스의 Mle1851(1851년형 미니에 머스킷)과 영국의 P53, 미국의 스프링필드 M1861 및 오스트리아의 로렌츠(Lorenz) 등이다. 하지만 워낙 구조와 형태가 단순하다 보니 카피도 여러 나라에서 많이 만들어졌고, 특히 후진국들의 사제 총기로는 20세기까지 만들어지는 사례가 보인다.

    미국 남북전쟁은 앞서도 언급했듯 막대한 양의 미니에탄 사용 소총들이 제작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전쟁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해당 총기들 중 무려 세 종류가 한데 뒤엉켜 싸웠다는 것이다. 미국의 스프링필드 M1861이야 당사국의 총기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수년 사이에 100만 정이라는,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속도의 대량 생산 달성), 문제는 이걸 만드는 연방(북부) 조차 소총 부족에 시달렸고 자체적인 총기 생산 능력이 크게 부족하던 남부동맹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남북전쟁 당시 대량으로 사용된 스프링필드 M1861 <출처: Public Domain>
    남북전쟁 당시 대량으로 사용된 스프링필드 M1861 <출처: Public Domain>

    그러다 보니 남북 모두 영국의 P53과 오스트리아의 로렌츠 역시 대량으로 수입했는데, 이 두 총 모두 M1861과 구경이 같아 탄 호환성까지 있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수량 역시 P53의 경우 약 90만 정이 수출되어 M1861 바로 다음가는 인기를 구가했다.

    이 시기의 미니에탄 사용 소총들은 앞서 언급했듯 186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원 개발국들에서 도태되기 시작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은 해당 총기를 엄청나게 쌓아두고 있었기 때문에 후장식 소총의 시대가 다가오자 새로운 총을 당장 도입하지 못하고 기존의 미니에탄 사용 전장식 소총을 후장식으로 개조한 스나이더-엔필드나 스프링필드 트랩도어 등을 만들었다.

    독일 뷔르템베르크, 바덴, 에센 공국에서 사용했던 1857년형 미니에 총 <출처: Public Domain>
    독일 뷔르템베르크, 바덴, 에센 공국에서 사용했던 1857년형 미니에 총 <출처: Public Domain>

    그러고도 남게 된 대량의 전장식 총기들은 다른 나라들로 수출되었는데, 특히 이 시기에 내전에 시달리던 일본은 이 총들을 대량으로 수입해 사용했다. 다만 일본도 일단 내전이 정리되고 신정부군의 본격적 정비가 시작되자 전장총들은 빠르게 도태시키고 후장총을 주력으로 재편성하게 된다.


    제원(가장 대표적인 영국의 엔필드 P53기준)

    엔필드 P53 <출처: Public Domain>
    엔필드 P53 <출처: Public Domain>

    구경 : .577(약 15mm)
    길이 : 1.4m
    총열 길이 : 99cm
    무게 : 4.3kg
    장탄 수 : 1발
    격발 방식 : 뇌관식


    저자 소개

    홍희범 | 군사전문지 편집장

    미니에 라이플

    1995년 월간 플래툰의 창간 멤버로 2000년부터 편집장으로 출간을 책임지고 있다. 2008년부터 국군방송 및 국방일보 정기 출연 및 기고를 하고 있으며, <세계의 총기백과>, <밀리터리 실패열전> 등을 저작하고 <2차세계대전사>, <컴뱃 핸드건>, <전투외상 응급처치>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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