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04.0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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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백과]

F-35의 개발사

21세기 최대의 스텔스 전투기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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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공군 F-35A 1호기 비행 영상<출처:유용원의 군사세계>
JSF(Joint Strike Fighter, 합동타격전투기) 사업은 21세기 최대의 국방획득사업이다. JSF 사업이 시작될 때에 그 누구도 이 사업이 이렇게 공룡같은 사업이 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미 공군, 해군, 그리고 해병대가 함께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도 이례적인 데다가, 영국을 비롯한 8개국이 참여하는 국제 공동사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F-35는 21세기 최대의 전투기사업으로 미국이 우방국에 제공하는 유일한 5세대 전투기이다. <출처: 미 공군>

역사상 각 군(軍) 또는 각국이 참여하는 무기체계의 공동개발사업이 제대로 진행된 예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공동개발사업이 활발히 추진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 이전에는 우후죽순과 같은 단일 획득사업이 서유럽과 미국에서 난무했지만 대량으로 채택되는 기종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공동개발사업의 역사

미 공군은 F-100으로부터 시작하는 센추리 시리즈를 통해 자군 전술기의 한계를 인식하고는, 황급히 미 해군의 F-4 팬텀II를 주력기로 채택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야심작인 F-104 스타파이터 전투기가 사실상 실패작이 되어 버리자, 미 공군은 이 기체를 동맹국에 대한 수출용 전투기로 돌려버리고 자신은 해군의 대형 방공전투기 F-4 팬텀II에 1960년대를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미 공군은 해군의 F-4 팬텀II를 도입하여 운용하며 전력의 공백을 메꾸었다. <출처: 미 국방부>
미 공군은 값 비싸고 성능 좋은 F-4 팬텀II는 자국 위주로 운용하고, 예산적 여유가 있는 동맹국과 우방국에는 F-104G 스타파이터를 면허생산을 하도록 했다. 한편 경제적 여유는 없으나 정치․외교적으로는 우대해 줘야 하는 요르단, 파키스탄, 대만과 같은 우방국에는 자국 공군이 사용하던 F-104A 전투기를 양도하였다. 또한 동맹국이자 우방국으로 형편이 어려운 한국과 같은 국가들에게는 F-5A/B 전투기를 공급했다. 동맹국에 대해서도 전력우위를 강조하는 미국의 전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F-4 팬텀 II는 애초에 미 해군/해병대의 전투기사업으로 엄밀한 의미의 공동개발은 아니었다. <출처: 미 국방부>
어쨌거나 미 공군의 F-4 팬텀II 도입은 요구조건이 다른 공군과 해군이 같은 전투기를 운용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미 해군/해병대용으로 개발·양산한 전투기를 공군이 자기 사양으로 개조하여 대량으로 도입, 운용한 것에 불과하였을 뿐이지 공동개발·획득사업은 아니었다.
미 공군은 공동개발사업으로 F-111 아드박 전폭기의 개발을 추진했다. <출처: Lockheed Martin>

F-4 팬텀II을 도입하여 여유를 찾은 미 공군은 1960년대 중반부터 새로운 기체의 개발을 시작한다. 맥나라마 장관의 엄격한 사업통제 속에서 미 공군은 타군과 함께 차기 전투기를 공동개발하도록 강요받았고, 공동개발사업으로 F-111 아드박(Aardvark) 전투폭격기의 개발을 추진하여 미 해군과 영국 공군을 끌어 들였다. 그러나 미 해군은 전투기라기보다는 장거리 공격기에 가까운 F-111을 항모에서 운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하고 정권이 바뀌자 곧바로 F-14 톰캣 전투기를 도입하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코랄 씨(USS Coral Sea) 항모에 착함시험 중인 미 해군의 F-111B 전투기. 해군은 F-111개발을 포기했다. <출처: 미 해군>

한편 영국 공군은 미 공군이 선택했던 것처럼 F-4 팬텀을 1970년대 주력 전투기로 선정하고 팬텀 쪽으로 획득사업을 바꿔버렸다. 결국 F-111은 해외수출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유일한 성과는 1970년대 영국을 대신하여 호주 공군이 동남아시아에서의 장거리 임무수행에 대비하여 도입을 결정한 사례 뿐이었다. 원대한 공동개발로 시작되었던 F-111 사업은 결국 미 공군만을 위한 사업으로 축소되어 공동개발이란 역시 어렵다는 선입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의 전투기 공동개발·획득사업

SEPECAT 재규어 공격기는 국제공동개발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칭송된다. <출처: Chris Lofting / WikiCommons>
한편 서유럽에서도 독자적인 공동개발·획득사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미라지(Mirage) 시리즈에 집중하여 수출에 주력하던 '독불장군' 프랑스가 영국과 함께 재규어(Jaguar) 공격기 개발을 공동사업으로 진행했다. 애초에 고등훈련 및 전환훈련용의 기체를 개발하려던 것을 장거리 차단 공격기로 개발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1968년 9월 8일에 처녀비행을 마친 재규어는 프랑스에서는 미라지 전투기를 보조하는 전력으로, 영국에서는 라이트닝 및 팬텀 전투기를 보조하는 전투공격기로 1973년부터 양국 공군에 배치되어 활용되었다.
파나비아 토네이도 전투기는 또다른 공동개발의 성공사례이다. <출처: Pinterest>
물과 기름 같기만 했던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개발․획득사업은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이후 민간분야에까지 확대되어 콩코드 초음속 여객기 공동개발에 좋은 사례가 되기도 했다. 재규어 전투기의 성공에 고무된 유럽 각국은 전투기의 공동개발·획득사업을 하나 둘씩 늘려가기 시작했다. 1969년 프랑스는 당시 서독과 아음속 훈련기 개발을 추진하였으며 영국은 서독, 이탈리아와 함께 토네이도 전투기 개발에 들어갔다.
미국은 하이로 믹스개념을 적용하여 F-15와 같은 고성능 전투기를 개발했고, 최근에는 F-15X 슈퍼이글도 제안되고 있다. <출처: Boeing>
토네이도 전투기의 성격은 본격 운용에 들어간 미 공군 F-111의 개념을 유럽의 전장환경에 맞게 도입한 모델로, 항공기 특성을 보아도 가변익 주날개로부터 2인승 기체인 점에 이르기까지 유사한 모양새를 갖추었다.  토네이도 개발로부터 거의 10여 년간, 즉 프랑스가 미라지 2000 전투기 개발을 공표했던 1976년까지 서유럽에는 전투기의 독자적인 개발·획득사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F-15E 전투기의 전천후 타격 능력을 극대화한 보잉 어드밴스드 이글 소개 영상<출처:유용원의 군사세계>
이처럼 서유럽 나토회원국들은 공동개발·획득사업으로 전투기를 조달하는 동안 미국은 1980년대 적용할 하이로 믹스(High-Low Mix) 개념을 도입하여 4개 기종을 조달하는 사업에 매달렸다. 그 기종들이 바로 지금의 주력 전투기로 운용되고 있는 미 해군의 F-14(2006년 퇴역)와 F/A-18, 그리고 미 공군의 F-15와 F-16이다. 
F-16 전투기는 우방국과 공동사용을 생각하고 개발되어 오늘날 블록 70형까지 이르고 있다. <출처: Lockheed Martin>

이 기체들은 F-16 전투기를 제외하고는 해외 국가들과의 공동사용에 비중을 두지 않고 만들어졌다. 자군 사용을 우선시하여 개발한 것이다. 다만 F-16만은 개발 당시부터 나토 회원국 4개국과 F-5E/F 전투기를 사용하는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므로 국제적인 전투기 획득사업의 성격이 엿보이기도 했다.


전술기 전력의 위기

미국의 국방예산에서 전술기(TACAIR) 예산, 즉 전투기와 공격기의 개발 및 생산에 들어가는 예산의 평균은 1960~1980년 사이의 약 20년간 18%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레이건 행정부 말에 가서는 군비증강에 따라 무려 국방예산의 25%까지 증강했다. 이렇게 예산의 압박 없이 제 각각의 획득사업을 벌이던 미국의 각 군과 유럽의 각국들은 국방획득사업에 있어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고야 말았다. 그 위기는 다름 아닌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구소련의 해체였다.

베를린 장벽 해체(사진)와 구소련의 붕괴는 세계 안보의 구도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출처: 미 국방부>
일련의 냉전체제 붕괴로 말미암아 국방소요는 예전과 달리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미군은 1991년 걸프전을 거치면서 냉전시절 비축해놓았던 각종 재고품들을 털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고도 남아있던 무기들을 중고로 염가판매하거나 스크랩 처리로 일신하면서 21세기를 향한 재무장이 재촉하고 있었다. 결국 무기체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기에 있어서도 새로운 기술과 개념을 적용한 기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냉전구도가 해체되면서 미 공군은 엄청난 군비감량의 압박을 받았다. 사진은 퇴역항공기를 보관하는 제309 항공우주 유지재생단(309th AMARG) '본야드(Boneyard)'에 치장된 군용기들의 모습이다. <출처: 미 해군>
구소련의 붕괴로 인해 미 공군은 엄청난 군비감량의 압박을 받았다. 남아있던 F-4E와 F-4G 팬텀기의 퇴역에 이어, F-15A가 퇴역했고, 그 뒤를 이어 F-16A, F-111A/D/E/G가 줄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B-52 폭격기도 상당수가 버려졌을 뿐만 아니라 B-2A 폭격기의 획득은 132대에서 60대로 줄어들었다가 결국 21대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미국의 전투기전력 감소는 대외정책의 제한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출처: 미 국방부>

현저히 감소한 항공전력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있어서도 제한요인이 되고 있었다. 일례로 발칸반도의 종교/인종분쟁의 경우 미군의 전방배치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효과적이고도 지속적인 항공전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기존의 기체 수명이 증가함에 따라 수명주기비용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백화점식 전투기 사업은 퇴출

때마침 경제 이슈에 민감했던 클린턴 행정부가 발족하여 국방예산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3년 3월 당시 국방장관인 레스 애스핀(Les Aspin)의 지시 아래 펜타곤은 방위력 전면검토(BUR; Bottom-Up Review)를 시작했다. 1993년 10월말 종료된 BUR에서는 당시까지 무려 20여 년간 사용해온 A-6 인트루더 공격기 등 구형 기종의 교체문제를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1. 스텔스 기술을 포함한 최신 항공기술을 적용한 항공기 가격이 기존에 비해 30~50%나 비싸지는 와중에 어느 정도의 기술을 신 기종에 적용해야 할 적정한 가격을 유지시킬 것인가?
 
2. 구소련의 위협이 끝난 지금 항공전력 구조를 감축하면서도 어떤 종류의 전투기를 얼마나 만들어야 할 것인가?
 
3. 항공전력 현대화의 요구가 높아지는 현실에서 미래의 현대화 작업에 여유를 주면서도 현재의 기체부족을 메우기 위해서는 어떤 사업을 우선적으로 추진할 것인가?
 
4. 해군에서도 공군만큼이나 많은 항공전력을 보유․개발하는 상황에서 공군과 해군의 각각의 요건에 맞는 공동개발·획득사업은 가능한가?
 
5. 전투기의 소요가 계속 줄어가는 상황에 항공업계를 적응시키면서도 항공업계에게 요구되는 설계 및 생산능력을 유지시키는 방법은 무엇일까?

결과 펜타곤은 F-22 사업과 F/A-18E/F 사업의 속행 및 A-6의 신속한 퇴역을 우선순위로 정했다. 반면에 해군의 A/F-X 사업과 공군의 MRF 사업을 모두 폐기시켜버렸다.

A-12 어벤져 II는 A-6를 대체할 스텔스 함재공격기로 계획되었으나 1991년 사업이 취소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A/F-X 사업은 A-12 어벤져Ⅱ 공격기 사업의 폐기 이후 그 뒤를 있는 차세대 미해군 공격기 획득사업이었고, MRF(Multi-Role Fighter; 다목적 전투기) 사업은 미 공군의 최대 전투기 세력인 F-16을 교체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각 군의 독자적인 주력타격기 개발․획득사업이 예산의 압박 아래 모두 격침된 것이다. 그리고 그 대신 펜타곤은 공동개발사업으로써 JAST(Joint Advanced Strike Technologies; 합동 차세대 타격기술) 사업을 시작했다. BUR은 JAST 사업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JAST 사업은 기술개념시연 항공기를 개발하여 장래 항공기에 적용될 수 있는 다른 기술들을 개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들 개념시연기들로부터 A-6, F-14, F-16 및 F-111을 대체할 차세대 항공기의 프로토타입을 개발한다."

이제 클린턴 행정부에서 최신예 전투기를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3군 통합사업 뿐이었다. 드디어 전투기 획득사업의 본격적인 "M&A(인수합병)"가 시작된 것이었다.


급격히 덩치를 불린 JAST 사업

1994년 1월 27일 JAST 사업국이 정식으로 발족되었지만 각 군간 합동사업의 성공사례가 희귀했으므로 JAST 사업 자체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죠지 뮤엘너(George K. Muellner, 1943~2019) 공군 소장이 JAST 사업국장으로 발령이 나면서 사업진행이 본격화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죠지 뮤엘너(중간) 장군이 취임하면서 JAST 사업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사진은 2014년 공군협회장 재직시 뮤엘너의 모습으로 왼쪽에는 데보라 제임스 공군성 장관이, 오른쪽에는 마크 월시 III 공군참모총장이 서 있다. <출처: 미 공군>
전투기 획득사업의 M&A라고 할 수 있는 JAST 사업이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항공업계에서도 활발한 M&A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선 ATF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끈 록히드는 1993년 3월에는 제너럴 다이나믹스를, 1994년 6월에는 마틴 마리에타를 합병하여 록히드 마틴이라는 거대 항공기업을 만들어냈다. (1994년 2월에는 록히드와 보잉의 합병설이 나돌기도 했다.) 1994년 4월에는 노드롭이 그루먼을 매입함으로써 노드롭 그루먼이 탄생했고 이후 LTV(Ling-Temco-Vought)도 노드롭 그루먼에 합병되었다.
록히드와 마틴 마리에타의 합병은 항공우주방위산업의 지각변동을 보여주는 대 사건이었다. 사진은 마틴 마리에타의 CEO인 노만 어거스틴(Norman R. Augustine)과 록히드의 CEO인 다니엘 텔럽(Daniel M. Tellep)이다. <출처: Lockheed Martin>
이렇게 항공업계가 급변하는 가운데 1994년 10월에는 이정표가 될 만한 사건이 JAST 사업에서도 일어났다. 국방예산의 삭감에 혈안이 되어 있던 미 하원은 DARPA(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의 CALF 사업을 JAST 사업에 합병시켜 버렸다.
보잉사의 CALF 제안모델 <출처: jsf.mil>
CALF(Common Affordable Lightweight Fighter; 공통 염가 경량전투기) 사업은 원래는 록히드 마틴의 제안으로 시작되었지만, 미 해병대, 영국 해군을 위한 수직이착륙형과 미 공군을 위한 일반형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기술과 개념을 개발하는 사업으로 그 규모가 확장되었다. 이제 CALF 사업까지 흡수한 JAST 사업은 더 이상 제동을 걸 수 없는 대세가 되어버렸다.
록히드마틴이 제안했던 CALF 후보기종
탄력을 받은 JAST 사업은 유례없이 규모가 커져가고 있었다. 개념탐색 및 설계연구(CDDR; Concept Definition and Design Research)에 관한 용역에 대해 방산업계는 무려 150여 건의 제안으로 화답했다. 수많은 제안들 가운데 오직 24건이 계약으로 연결되었다. 1994년 12월 22일 발표된 계약내용은 무기체계 개념, 항전장비, 기체 구조 및 재료, 추진장치 개념, 그리고 모델링/시뮬레이션/분석이라는 5개의 분야에 걸친 종합적인 무기체계 연구사업이었다.
JAST 후보 기종은 보잉, 록히드마틴, 맥도널 더글라스 등 3개 기종으로 압축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사안이 워낙 많다보니 계약관련문건 처리도 종이를 사용하지 않고 전자문서만을 사용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활용하였다. 전자문서의 활용 덕에 정부나 업체나 모두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24건의 계약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참가업체는 크게 3개 팀으로 볼 수 있었다. 즉 보잉, 록히드 마틴, 그리고 맥도널 더글러스/노드롭 그루먼/BAe 3개사 연합팀이 바로 그 주자들이었다.


JAST의 요구조건들

JAST 사업은 2008년부터 2020년대까지 모두 2,800여대의 최첨단 전투기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성취해야할 목표는 전투기의 가격을 최대한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즉 전투기를 싼 가격에 공동구매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물론 각 군이 원하는 기체가 다르므로 하나의 기체를 구매하는 것은 아니라 3개의 서로 다른 기체를 구매하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최대한 공통적인 기술이 적용되는 부분(당초 목표는 70~80%)을 늘려서 비용을 줄이겠다는 취지였다. 각 군의 핵심적인 요구사항은 아래와 같았다.

- 미 공군은 스텔스 기술과 차세대 항전장비가 적용된 공격기를 원했으며, 특히 낮은 운용주기 비용과 높은 신뢰성, 그리고 적정한 항속거리, 속도 및 무장운용능력을 갖춘 기체를 원했다.
 
- 미 해군은 기존의 함재기 요구조건에 더하여 저속의 함상착륙을 위해 넓은 주익과 강화된 랜딩기어 및 어레스팅 후크를 요구했다. 해군은 전통적으로 단일 엔진을 사용하는 단좌 함재기에 대해 깊은 불신을 표명해왔지만, JAST 사업국은 새로운 기체가 높은 생존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득하여 해군의 사업 참가를 끌어내었다.
 
- 미 해병대와 영국 해군이 참가하여 뛰어난 STOVL(Short Take Off Vertical Landing; 단거리 이륙/수직 착륙) 전폭기를 요구했다. 영국해군의 경항모나 미 해병대의 헬기 상륙모함 또는 최전방 작전기지에서 운용할 수 있는 수직이착륙기를 획득하려는 의도였다.

JAST는 사업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타격(Strike), 즉 폭격이 가능한 항공기를 획득하려는 것이었지만 물론 방공능력이 요구되었다. 적기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우군기까지 방어할 수 있는 능력까지 요구했던 것이다. ATF와 같은 초기동성(super-maneuver)을 요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성능이 높을수록 바람직했다. 따라서 타격작전에서 현존하는 F-16이나 F/A-18과 유사한 성능을 발휘할 것을 목표로 했지만 그 이상의 성능이 나오는 기체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최고속도는 마하 1.5 정도를 목표로 했다.

JAST(추후 JSF)를 위해서 프랫&휘트니는 F135 엔진을 개발했다. <출처: 미 국방부>

JAST에서는 특히 항전장비 쪽에서 상당한 자동화를 꾀할 뿐만 아니라 차세대 레이더와 광전자 및 적외선 장비를 채택하여 전천후 타격작전을 가능하게 할 것을 목표로 했다. 물론 비용절감이 우선 순위였으므로 모든 시스템이 아니라 적절한 시스템 통합이 요구되었다. 

또한 스텔스 기능을 요구했으므로 JAST는 무장을 내부에 탑재한 채로 운용해야만 했다. 제공권을 장악하기 전인 전쟁초기 단계에서는 스텔스 기능을 십분 활용하면서 타격작전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내부에 무장을 수납하고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요구되었다. JAST 사업국에서는 이 요구조건을 "개전초기 스텔스 성능(first day stealth)"라고 불렀는데, 이는 원래 A-12 어벤져Ⅱ에서 요구된 조건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JAST에서 JSF로

약 15개월간의 개념연구가 끝나고 JAST 사업의 윤곽이 잡히자 이제 사업은 기술연구단계를 벗어나 본격적인 획득사업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1995년 8월 펜타곤은 JAST 사업에서 이제 Technology라는 단어를 떼어버리고 "JSF(Joint Strike Fighter; 3군 통합타격기)"로 사업명칭을 변경하였다.

1995년 말에 몇 차례의 국방획득 심의회를 거친 JSF 사업은 1996년 3월 드디어 항공업계에 RFP(제안요구서)를 발송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7월 RFP에 응답한 업체는 치열한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은 인수합병전쟁에서 살아남은 록히드 마틴과 보잉, 그리고 맥도널 더글라스(노드롭 그루먼과 BAe와 팀을 이룸)의 3개사였다.

맥도널 더글라스의 JAST 제안모델 <출처: jsf.mil>
- 맥도널 더글라스는 노드롭 그루만과 BAe(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와 함께 수직미익이 없는 설계안을 제출했다. 수직이착륙형(STOVL)은 동체후미에 사이드 노즐을 장착한 메인 엔진을 갖추고 있어 수직 편향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도 20도까지 추력편향이 가능했다. 여기에 더하여 조종석 바로 뒤에 수직추력을 위한 "리프트 엔진"이 장착될 예정이었다. 공군 기본형(CTOL)은 리프트 엔진 대신 연료탱크가 장착되어 장거리 운용이 가능하도록 했으며, 해군의 함재기형(CV)은 넓은 주익에 랜딩기어가 강화되었다.
보잉의 JAST 제안모델 <출처: Boeing>
- 1930년대 P-26 피슈터(Peashooter) 이후에는 전술기를 개발한 바 없었던 보잉은 전투기의 상식에서 벗어난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었다. 델타 윙에 거대한 흡입구와 V자형 수직미익을 갖추는 진정한 스텔스 기체를 추구했지만 모양 자체는 도저히 전투기로 보아줄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못생긴 기종이었다. 수직이착륙형은 엔진추력을 가변 리프트 노즐 2개로 내보내며, 흡기구는 아래쪽이 튀어나와 단거리 이륙시 필요한 많은 양의 공기를 흡입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애초부터 F-22 랩터에 사용되는 PW의 F119 엔진을 채택하여 강력한 추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기본형과 함재기형은 모두 델타윙의 이점을 살려 많은 양의 연료를 탑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록히드 마틴의 JAST 제안모델 <출처: Lockheed Martin>

- 록히드 마틴은 요컨대 'F/A-22의 단발엔진형'이랄 수 있는 스텔스 설계를 제안했다. 수직이착륙형은 PW의 F119엔진에서 동력을 조달하는 리프트 팬, 주익 아래쪽에 위치하는 2개의 가변노즐, 그리고 수직편향식 메인 엔진을 통해 수직추력을 얻는 설계방식을 채택했다. 특히 록히드 마틴의 설계안은 리프트 팬(Lift Fan) 방식을 채택하여 뜨거운 배기가스가 다시 흡입되는 수직이착륙기의 고질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3개의 설계안을 평가한 결과 펜타곤은 1996년 11월 16일 보잉과 록히드 마틴에게 개념실증(Concept Demonstration) 단계에 참여를 허가했다. 맥도널 더글라스사 담당자들은 경쟁에 제외되면서 록히드 마틴의 팀 멤버로 합류했으며 노드롭 그루먼과 BAe가 이에 동참하였다. 재빠른 이합집산이었다.

그러나 이합집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7년 8월 4일 보잉이 맥도널 더글라스를 인수하면서 보잉은 적진에 떨어져 있던 맥도널 더글라스의 JSF 기술진들을 다시 데리고 오게 되었다. 치열한 인수합병 공중전에서 살아남은 2개의 거장, 록히드 마틴과 보잉의 진검 승부가 이제부터 펼쳐지게 되었다.


합리적 조달소요로 경쟁방식이 바뀌다

JSF는 국방부가 주도한 개발이 아니라 업체가 가진 기술력을 활용하는 ACTD 사업이었다. JSF의 개념실증은 성능비교비행(fly-off)과는 달랐다. 성능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 요구될 기술 수준에 맞추어 기체를 만들 수 있다는 점만 증명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개념실증과정에서 각 사가 제시한 기체, 즉 개념시연기(CDA; Concept Demonstration Aircraft)는 JSF로 만들어질 프로토타입이 아니었다.
 
성능비교비행이라면 요구된 제원보다 빠른 속도로 더욱 먼 항속거리를 날으면서 우수한 기동성을 과시해야 한다. 그러나 개념실증에서는 개념시연기가 ①장래 발전가능한 설계라는 점과 ②항모에 착륙하기 위한 저속 비행성능을 갖추었다는 점, 그리고 ③수직이착륙 개념이 실제로 유효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점만을 증명하면 될 터였다.

보잉의 전투기 제안설계의 변화과정 <출처: aerospaceweb.org>

무엇보다도 참가업체가 받아들여야 하는 점은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JSF 사업국이 요구하는 기체의 요구성능이 수시로 바뀐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전투기 획득사업이라면 업체는 고객(즉 수요군)이 미리 정해놓은 사양에 맞추어 제품을 제공하면 그것으로 끝이고, 아무리 가격이 올라가도 고객이 그 부담을 그대로 떠안아야 하는 처지였다. 예를 들어 F-111 사업에서는 마하 2.5의 최고속력을 내기 위하여 재설계를 거듭하면서 사업비용이 급상승했는데, 사실 저고도 폭격기에서 이런 정도의 속도는 실제로 필수불가결한 사양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맹목적으로 성능을 위해 비용을 쏟아 부을 수 없는 것이 펜타곤의 현실이 되었다. 오히려 비용에 맞추어 성능을 조절하는 것이 냉전이후의 요구였고 JSF사업은 주어진 예산을 지켜가면서 적절한 성능의 무기체계를 만드는 "경제적인 획득사업"의 선례를 남겨야 했다. 만약 특정부분에서 가격상승요인이 있다면 다른 부분에서 어떻게 서든 비용절감요인을 찾아내야만 했다.

록히드 마틴의 전투기 제안설계의 변화과정 <출처: aerospaceweb.org>

JSF 사업국이 원하는 사양은 JIRD(Joint Interim Requirement Document; 통합 잠정요구조건문서)를 통해서 업체에 전달되었다. 1995년에 제1차 JIRD가 제정되어 기체의 크기와 속도, 스텔스 성, 그리고 기체의 형상에 중점을 두고 사양을 설정했다. 1997년에 개정된 제2차 JIRD에서는 성능, 가격 및 정비성 사이의 조화라는 측면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 1998년 가을에 개정된 제3차 JIRD에서는 스텔스 기술의 실질성, 악천후 및 야간 운용능력, 그리고 임무계획 등에 대한 기준이 정해졌다.


JSF의 요구사양

공군과 해군은 JSF에게 뛰어난 공대공 능력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들은 각기 F-22와 슈퍼호넷이라는 주력 제공전투기를 개발 중이었기 때문에 공대공 능력 때문에 추가적인 예산을 들이기를 꺼려했다. 굳이 비율로 따지자면 JSF에서는 70% 정도를 공대지 능력에 중점을 두도록 요구되었다. JSF라는 사업명에서 알 수 있듯이 JSF 사업은 타격기, 즉 전투공격기를 획득하는 사업이었다.

JSF 사업국은 JSF에 개전 초 스텔스 성능을 요구함으로써 내부무장창은 필수가 되었다. <출처: 미 공군>

JSF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요건은 바로 "전쟁 초기 스텔스 성능(First Day Stealth)"이었다. 걸프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안된 이 능력은 적의 방공망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전쟁 초기단계에서 JSF는 외부 장착대에 무장을 달지 않은 클린 상태로 최대의 스텔스 성능을 유지하면서 적의 레이더를 피하면서 타격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적 방공망을 제압하면서 더 이상 스텔스 기능에 구애될 필요가 없게 되면 외부에 폭장을 하고 거의 2배가 되는 양의 폭탄을 적에게 투하할 수 있게 된다.

JSF는 타격작전을 위한 플랫폼이니 만큼 어떤 무장을 장착하고 투발할까 하는 것도 중요한 요건이었다. JSF가 실전 배치될 때가 되면 각군이 보유하던 재래식 비유도폭탄은 이미 소진될 터였고, 1996년 경에는 JDAM(Joint Direct Attack Munition; 통합직격탄)의 개발이 한참 진행중이었다. 즉 JSF는 JDAM을 운용하는 중요한 플랫폼이 되어야만 했다.

후보기종들에게는 스텔스 성능을 달성할 것이 요구되었다. 사진은 보잉의 X-32이다. <출처: jsf.mil>
JSF의 기존적인 요구조건들은 1996년이 되어서야 JIRD에 종합되면서 구체화되었다. 공군, 해군, 해병대 모두 JSF의 무장으로 AMRAAM 2발과 JDAM 2발을 요구했다. 해병대와 공군은 급유 없이 최대 500마일의 작전반경을 요구했지만 해군은 최소한 600마일의 작전반경을 요구했다.
 
최고속도와 비행성능에 관해서는 특정한 수치를 제시하지 않고 최신예 전투기와 근접한 수치를 만족하면 된다고 밝혔다. 미 공군은 내부적으로는 마하 1.5의 최고속도를 원했지만 개념시연단계에서는 이를 요구한 바 없었다.
록히드의 X-35는 F-22와 거의 유사한 형상으로 스텔스 성능을 구현했다. <출처: jsf.mil>

요구조건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다름 아닌 스텔스 성능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3군의 입장이 현저히 달라서 사업이 한참 진행되는 중에도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다. 어쨌거나 개념시연단계에서는 제시한 기체가 낮은 레이더 반사면적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 보여주면 될 터였다.


X 플레인의 전쟁

앞서 언급했듯이 개념시연단계는 플라이 오프, 즉 성능비교비행이 아니었으므로 개념시연기에는 YF라는 코드가 주어지지 않았다. 보잉의 JSF는 CALF 사업의 지정번호를 그대로 사용한 X-32로 명명되었고, 록히드 마틴의 JSF는 X-35로 명명되었다. 비록 플라이 오프는 아니었지만 X-32와 X-35 두 기종은 JSF의 자리를 놓고 이제부터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X 플레인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보잉의 X-32 시제기(좌)와 록히드 마틴의 X-35 시제기(우) <출처: jsf.mil>
록히드 마틴의 X-35는 이미 성공을 거둔 공군 ATF 사업기종인 F-22로부터 많은 부분을 차용해왔다. 분명 이 설계안에 대해 JSF의 주요고객 중의 하나인 공군도 만족을 표할 터였다. 동체는 미해병대 수직이착륙형의 항속거리 요구조건에 맞도록 크기를 맞추었다. 해군형에서는 리프트팬 대신에 연료탱크가 들어가므로 해군이 원하는 긴 항속거리가 가능할 것이었다. X-35는 이미 성공을 거둔 설계를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으로 인해 설계상의 위험을 최대로 줄일 수 있었다.
X-35는 이미 대성공을 거둔 F-22의 설계를 최대한 활용하여 만들어졌다. <출처: Lockheed Martin>
하지만 록히드 마틴의 설계안에서도 위험은 존재했다. 수직이착륙형에 채용될 리프트 팬의 설계가 가장 커다란 문제였다.  리프트 팬 방식은 야심찬 공학적 도전이다 못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위험한 접근이었다. 리프트 팬 방식에서도 엔진은 보통 전투기처럼 뒤에 장착된다. 그러나 조종사의 바로 뒤에 리프트 팬이라는 수직 추력장치가 장착되며, 이 리프트 팬은 엔진의 출력을 전달해주는 구동축에 의해 가동된다. 엔진의 편향추력과 리프트 팬의 수직추력을 동시에 사용하므로 X-35는 수직이착륙 시에 어느 기종보다 안정적인 추력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X-35의 리프트팬 엔진은 엄청난 추력을 구동축으로 전달하는 기술적 한계를 극복해야만 했다. <출처: 미 공군>

하지만 이 방식에도 문제점이 있었다. 즉 리프트 팬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엔진의 동력을 전달하는 구동축에 무려 2만 마력의 부하가 걸리게 된다. 해군의 구축함 한 척을 추진시키는 정도의 동력을 구동축을 통해 전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게다가 수직이착륙의 미묘한 균형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동력을 정확히 원하는 양만큼만 전달할 수 있도록 섬세한 제어가 필요했다. 리프트 팬 방식을 성공시킬 수 있느냐가 바로 록히드 마틴 X-35의 성공의 관건이었다. 수직이착륙형에 사업의 사활이 달렸던 것이다.


보잉 JSF의 모험

보잉 X-32 시제기의 시험비행 영상<출처:유용원의 군사세계>

반면 보잉의 JSF는 조금 다른 방면으로 설계의 방향을 집중했다. 보잉이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저가" 즉 낮은 생산가격과 수명주기비용이었다. 그러다보니 수직이착륙에서 록히드 마틴의 리프트 팬 같은 복잡한 방식보다는 단일엔진만을 이용한 직접분사방식을 선호했다. 실은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그 이외의 대안도 없었다.

보잉의 최초 설계안이었던 AVX-70은 여태껏 존재하지 않았던 형태의 전투기였다. 경량에 대형 내부연료탱크를 장착한 스텔스 설계안인 AVX-70은 델타윙을 채용하여 작은 크기에도 뛰어난 항속거리를 자랑했다. 단일 판형으로 만들어진 델타윙은 주익 치고도 두께가 두꺼운 편이지만 무려 55도에 이르는 앞전 각도로 인해 마하 1.0의 영역에서도 항력이 낮았다. 두께가 두꺼운 델타윙 덕분에 주익 내부에는 무려 18,000파운드의 연료를 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F-16 내부 연료탑재량에 비하면 2배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보잉의 델타윙 설계는 날개를 접는데 한계가 있었다. <출처: Boeing>

델타윙을 채용하였기 때문에 해군형에서 날개를 접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체의 크기를 작게 유지할 수 있다면 날개를 접지 않고도 델타윙이 차지하는 면적은 F/A-18 호넷이 날개를 접은 면적과 유사해질 수 있었다.

한편 엔진을 기체 후방이 아니라 중앙에 배치하여 안정적인 직접분사방식의 수직추력을 얻음으로써 수직이착륙형을 저렴하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중앙에 위치한 엔진에 충분한 공기를 보내기 위해서는 기체의 좌우에 공기흡입구를 만드는 대신 기체 중앙에 거대한 공기흡입구를 만들어야만 했다. 덕분에 보잉의 설계안은 거대한 델타윙에 비정상적으로 넓은 흡입구를 가지게 되어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라는 느낌보다는 "날으는 맹꽁이"같은 괴이한 형상이 되었다.

X-32는 엔진을 기체 중앙에 배치하여 안정적인 직접분사방식의 수직추력을 얻고자 했다. <출처: Boeing>

보잉의 설계안에서 문제점은 저렴한 직접분사방식이 의외로 복잡한 구조였다는 점이었다. 직하방으로 분사되는 뜨거운 배기가스가 전방의 거대한 공기흡입구로 역입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전방 동체 아래에 제트 스크린 노즐을 장착했다.

또한 거대한 공기흡입구를 만드는 것도 보잉 JSF 팀에게 주어진 도전 가운데 하나였다. 흡입구 덕트는 짧고 심하게 각진 형태로 정면에서 보더라도 엔진의 팬이 직접 보이지 않도록 되어 있어 어느 정도의 스텔스성은 확보되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목표한 RCS 수치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가변 흡입구 베인을 채택하여 순항시에는 최고의 스텔스성을 위해 최대한으로 흡입구의 노출을 막고, 이착륙시에는 최대한의 비행성능을 확보하기 위해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단순한 해리어의 가변 베인만 하더라도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보잉의 JSF 수직이착륙형에서 해결해야할 문제는 더욱 더 컸다.

X-32의 거대한 공기흡입구 설계도 보잉 JSF팀에게는 도전 과제 중 하나였다. <출처: 미 국방부>
게다가 해군은 전통적으로 함재기에서 델타윙을 기피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델타윙의 JSF 함재기형도 문제가될 소지가 다분했다. 델타윙의 단점은 우선 저속시에 기수들림 현상이 발생하여 시야확보에 불리하고, 수평미익이 없으면 리프트 부스팅 플랩을 장착할 수 없으며, 뒷전 엘러본(Elevon)만으로 피치 롤 제어를 동시에 해야만 하므로 함상 착륙시 기민성이 떨어졌다. 이런 이유로 F4D 스카이레이는 겨우 8년도 못 버티고 해군에서 퇴출당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잉의 함재기형 JSF는 앞전에 볼텍스 플랩(Vortex Flap)을 장착하였다. NASA가 주관한 초음속 연구와 1980년대 말의 F-106B 전투기의 시험결과를 바탕으로 개발된 볼텍스 플랩은 뒷전에 장착되어 위로 들리면서 날개 뿌리 위로 앞전 와류를 가두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양력을 증가시키기면서도 착륙진입 시에 뒷전을 숙이게 할 수 있었다.
보잉은 델타윙 설계를 변경하는 설계안을 제출했지만 개념시연기는 원래대로 제작했다. <출처: 미 국방부>

그러나 역시 델타윙이 문제가 되었다. 1998년에 발간된 제3차 JIRD에서 해군은 귀환무장탑재량을 8,000파운드에서 9,000파운드로 증가시켰고 함상착륙시 접근속도를 특정한 수치로 지정했다. 새로운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델타윙의 중량을 증가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면 보잉은 자신의 설계안의 가장 큰 약점인 중량증가라는 덧에 걸리게 될 터였다.

결국 보잉팀은 델타윙의 설계를 변경하여 수평미익을 장착하도록 변경하는 설계안은 JSF 사업국에 제출했다. 새 설계에 따르면 기체는 1,500파운드나 가벼워지면서도 기동성이 향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개념시연기가 한참 제작 중이었으므로 보잉팀은 원래 설계안대로 개념시연기를 제작하여 제출하되 JSF 사업의 최종제안서에 새로운 설계안을 포함시키기로 하였다.

X-32 시연기의 뒷모습. 독특한 엔진 배기구의 형상이 보인다. <출처: Boeing>

1999년말 드디어 X-32가 모습을 들어냈다. 팜데일의 한 격납고에서 티나 터너의 "심플리 더 베스트(Simply The Best)"라는 음악과 함께 보잉 JSF팀은 드디어 X-32의 모습을 대중에 공개했다. 놀라운 것은 모습을 드러낸 JSF는 X-32A와 X-32B 두 대였다. 보잉은 이미 록히드 마틴에 앞서 개념시연기 2대를 모두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막상 2000년 중반이 되도록 이 2대의 기체는 시험비행을 하지 못했다.


'공중전'이 시작되다

최초 비행은 보잉이 먼저 실시하였다. 2000년 9월 18일 보잉의 수석 시험비행사인 프레드 녹스(Fred Knox)의 조종으로 팜데일에서 출발한 X-32A는 50km의 거리를 비행하며 에드워드 공군기지에 도착하면서 성공적인 처녀비행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 비행에서 X-32A는 유압계통의 작동유 누수가 발생하여 비행시간을 단축해야만 했다. 그러나 X-32A는 무서운 기세로 시험비행을 실시하여 약 한 달의 기간 동안 17회의 시험비행을 기록하며 아직 시험비행조차 실시하지 못하고 있던 록히드 마틴을 긴장시켰다.

X-32는 X-35보다 먼저 시험비행을 실시하면서 록히드 마틴을 긴장시켰다. <출처: 미 국방부>

그러나 10월 24일 X-32A는 브레이크 고장으로 비상착륙을 하는 사고를 겪었다. 게다가 고장 수리 도중에 소프트웨어의 결함이 발견되어 X-32A의 비행은 한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그렇게 보잉의 노력에 제동이 걸리던 바로 그 날인 2000년 10월 24일,  록히드 마틴의 X-35A는 톰 모건펠드(Tom Morgenfeld)의 조종으로 팜데일을 스컹크웍스(Skunkworks) 연구소를 출발하여 에드워드 공군기지까지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다음날부터 공격적인 시험비행을 실시한 X-35A는 11월 22일 마하 1.05의 속도를 기록하며 JSF 사업국이 요구한 비행성능을 모두 충족시켰다. 겨우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내에 27회의 기록적인 시험비행을 실시하며 기본비행성능을 입증한 X-35A는 이제 팜데일로 돌아와서는 수직이착륙형인 X-35B로 개수되었다.

X-35는 11월 22일 최초로 시험비행을 실시하였다. <출처: Lockheed Martin>
한편 X-32A의 기본비행성능시험은 12월까지 계속되었으며 12월 18일 경에는 항모착륙 시험비행을 실시하였다. 이 시험비행에서 X-32A는 97회의 접근과 74회의 터치다운을 기록하며 JSF 사업국이 정한 기준들을 만족시켰다. X-32A는 12월 21일에 마하기록을 달성했고, 2001년 2월에 무장격실 테스트를 마쳤다. 이로써 X-32A는 총 66시간에 걸친 50회의 비행을 기록하며 시험비행을 종료하였다.
 
록히드 마틴의 2번째 기체인 X-35C는 2000년 10월 16일 시험비행사 조 스위니(Joe Sweeney)의 조종으로 처녀비행을 실시하였다. 2001년 2월 10일 메릴랜드 주의 퍼텍슨트 리버(Patuxent River)에 위치한 미 해군 항공체계 사령부에서 실전적인 항모착륙시험을 시작한 X-35C는 약 한 달간 항모접근 시험을 성공리에 실시하였다.
X-35C의 시험비행장면 <출처: 미 국방부>

이렇게 공군형과 함재기형의 시험이 모두 성공리에 끝나자 X 플레인 전쟁의 승부처는 다름 아닌 수직이착륙형에 달리게 되었다.


전투기를 들어올려라

수직이착륙형의 대결에서 비교적 유리한 쪽은 보잉이었다. 록히드 마틴의 경우 17톤짜리 비행기를 검증되지 않은 리프트 팬을 통해 수직으로 들어올려야 했다. 그러나 보잉은 비교적 가벼운 13톤짜리 기체를, 역사를 통해 검증된 직접분사방식으로 들어 올리면 그만이었다.

X-32B는 신뢰성 높은 직접분사방식을 채용하여 진작에 수직이착륙능력을 시연하는데 성공했다. <출처: 미 국방부>

보잉의 수직착륙형인 X-32B는 2001년 3월 29일 시험비행사 필 오도나휴(Phil O'Donoughe)의 조종으로 약 50분간 처녀비행을 실시했다. 아직 록히드 마틴의 X-35B가 이륙도 못하고 있는 사이 이미 여러 차례의 호버링 테스트를 마친 X-32B는 2001년 5월 11일 수직이착륙시험을 위해 퍼텍슨트 리버로 비행하였다. 워싱턴의 정책결정자들의 코앞에서 수직이착륙 능력을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승승장구하던 X-32B도 잠시 난관에 봉착했다. 공중 급유시에 급유 바스켓과 시험용 센서가 부딪힐 위험이 발생한 데다가 급유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연료가 엉뚱한 곳으로 뿌려졌다. 결국 X-32B에 대한 공중급유 시험은 중단되고 말았다.

X-32B는 공중 급유시험에 실패하면서 약점을 보이기도 했다. <출처: Boeing>
2001년 6월 27일 X-32B는 정상적인 비행을 하다가 감속하여 수직착륙을 실시하며 X-32B의 안정적인 수직이착륙능력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7월 28일 단거리 이륙시험을 마지막으로 X-32B는 58회의 시험비행을 통해 펜타곤이 요구한 모든 시험을 마쳤다.
X-35B는 리프트 팬 시스템의 추진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어려운 기술적 난관을 극복했다. <출처: 미 국방부>
록히드 마틴사의 수직착륙형인 X-35B는 2001년 6월 23일에 이루어졌다. 팜데일의 스컹크웍스에서 BAe의 시험비행사 사이먼 하그리브스(Simon Hargreaves)의 조종 아래 X-35B는 수차례의 호버링 비행을 성공리에 마쳤다. 역사상 가장 복잡한 항공기 추진장치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리프트 팬 시스템이 성공을 기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항공기 역사상 가장 복잡했던 추진장치를 가진 X-35B의 첫 수직이착륙 시험비행 영상<출처:유용원의 군사세계>

그리고 이런 역사적인 시스템의 성공에 고무된 록히드 마틴은 회심의 일타를 날릴 기회를 노렸다. 2001년 8월 6일 X-35B는 기체의 모든 특성을 한 번에 과시할 수 있는 엄청난 비행에 나섰다. 게다가 이 비행은 모든 시험비행을 마치고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부터 팜데일까지 돌아가는 마지막 비행이었기 때문에 실패가 용납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조종은 록히드 마틴의 베테랑인 톰 모건펠드가 맡았다.

500피트의 거리 내에서 단거리 이륙에 나선 X-35B는 음속을 돌파하고 무려 6차례의 공중급유와 6차례의 터치-앤-고(Touch & Go)를 반복하다가 수직착륙을 하면서 비행을 종료했다. 기체의 성능을 마음껏 과시하고 비행을 종료하기 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3.7시간이었다.

X-35B가 비행을 마침으로써 X플레인 간의 대결은 종료되었다. <출처: 미 국방부>

이렇게 X-35B도 66회의 비행을 마침으로써 X 플레인의 대결은 종료되었다. 록히드 마틴과 보잉 양 사 모두 JSF의 요구조건을 충족시켰지만, 항공기의 전반적인 성능은 록히드 마틴이 우수하였다. 그러나 보잉은 저렴한 가격이라는 또 다른 결정적인 히든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JSF의 선정을 더욱 어려워 질 수밖에 없었다.


승자는 록히드 마틴

2001년 10월 26일. 치열한 5년간의 경쟁이 끝나고 JSF 사업의 결과가 발표되었다. 승리한 것은 다름 아닌 록히드 마틴이었다.

"강점과 약점, 그리고 사업상 위험성이란 요소들을 최고 가치(Best Value)의
기준으로 판단하여, 록히드 마틴을 합동타격전투기의 사업자로 발표합니다."

X-35는 결국 JSF 사업의 승자가 되었다. <출처: Lockheed Martin>

미 국방부 획득기술군수지원(AT&L)차관보인 에드워드 앨드리지 주니어(Edward C. "Pete" Aldridge Jr.)의 발표에는 JSF 사업자를 발표하며 말한 내용이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최고 가치(Best Value)"라는 말이다. 단순히 비용이 저렴한 전투기를 사겠다는 것이 아니라 3군의 요구를 만족할 수 있는 우수한 전투기를 구매하겠다는 것이었다.

JSF의 사업을 발표하기 직전 9/11테러가 발발하여 미국은 혼란스러웠다. 특히 9/11 테러의 영향으로 항공업계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특히 민간항공업계의 공룡인 보잉은 큰 타격을 받았다. 거기에 더하여 JSF 사업의 결과발표는 보잉을 한층 더 궁지로 몰았다. 정치권에서는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winner takes all) JSF 사업방침을 바꾸어 보잉에게도 JSF의 생산을 일부 나누어주는 방안까지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펜타곤은 JSF 사업자 선정발표를 3~4개월 정도 미룰 것을 검토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른 사업자를 끼워 넣게 되면 시간과 비용이 더욱 상승하게 되고 사업의 취지가 무색해질 터였다. JSF 사업국은 곧바로 사업자 발표를 마치고 사업을 속행시키기를 바랬다. 도움은 엉뚱한 곳에서 날아왔다.

JSF 사업의 공동개발국인 영국에서 미국 측에게 연락을 한 것이었다. 아마도 윌리 바크(William Stephen Goulden "Willy" Bach, Baron Bach) 국방조달차관(Parliamentary Under-Secretary of State for Defence Procurement)이 전화를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요지는 배짱을 가지고 사업을 밀어붙이자는 것이었다. 영국으로써도 더 이상 사업을 지연시킬 수 없었다. 결국 JSF 사업자는 록히드 마틴으로 선정되면서 개발 및 시범(SDD)단계가 시작되었다.

에드워드 앨드리지 주니어 미 국방차관보(좌)와 윌리 바크 영국 국방조달차관(우) <출처: Public Domain>

이렇게 제식사업으로 바뀌었으므로 X-35는 이제 X자가 빠지고 F자가 들어가야만 했다. 원래 X-35는 미 공군의 분류법에 따르면 F/A-24로 불리어야 옳았다. 왜냐하면 가장 최근에 명명되었던 전투기가 YF-22와 YF-23 2가지 였으므로 이제 24라는 숫자가 나설 차례였기 때문이다. 또한 JSF는 전투기이자 공격기이므로 F(Fighter)라는 명칭과 함께 A(Attacker)라는 명칭이 붙어야 여태까지의 논리에 맞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군체계사령부에서도 F-24라는 명칭을 제안했지만 X-35라는 유명한 이름 때문에 2002년 6월 결국 모델명은 F-35로 결정되었다.


F-35의 등장

X-35가 사업기종으로 선정됨에 따라 이제 JSF 사업은 개념시연단계를 넘어 체계개발 및 시연단계(System Development and Demonstration; SDD)로 넘어가게 되었다. 시연기였던 X-35는 실전 기체인 F-35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여전히 작업이 필요했다. 우선 록히드 마틴의 풍동시험 결과에 따라 기체의 크기를 약간 키우기로 했다. 전방 동체를 13cm 가량 늘려 항전장비를 탑재할 공간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수평꼬리날개도 5.1cm 뒤에 장착되며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 기체는 중앙으로 2.5cm 정도 높아졌다. 또한 F-35B의 내부무장창의 크기를 키워 다른 두 종류의 버전과 동일한 크기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F-35의 풍동시험 모델 <출처: 미 국방부>
이에 따라 2003년 11월부터 F-35의 첫 시제모델의 제작이 시작되었다. X-35 시연기에서는 내부무장창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F-35에서 통합작업이 필요했는데, 이는 이후 기체의 중량증가에 영향을 미쳐 중요한 기술적 제한으로 극복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로 했다. 특히 F-35B는 중량이 무려 1톤이나 증가하여 기체의 요구성능을 만족하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F-35B는 내부구조의 변경과 중량감소에 엔진출력까지 늘렸음에도 충분치 못하여, 결국은 내부무장창의 크기를 줄여야만 했다. 특히 JSF 사업국은 F-35로 진화시킴에 있어 CTOL인 A형, STOVL인 B형, 그리고 CV인 C형 사이에서 최대한 부품과 규격이 공유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2004년 9월에 이르러 기체 재설계가 끝났을 때 F-35B는 무려 1.2톤의 중량을 감소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재설계비용으로 무려 62억불이 쓰였으며, 사업기간은 무려 18개월이나 증가했다.
F-35A 라이트닝 II와 P-38 라이트닝 <출처: Heritage Flight>
2006년 7월 7일에는 개발사업의 주무부서인 공군이 F-35에 "라이트닝 II(Lightning II)"라는 이름을 명명했다. 라이트닝은 2차대전 당시 록히드의 쌍발 전투기인 P-38의 이름이었을 뿐만 아니라 공동개발국인 영국의 라이트닝 전투기에도 붙었던 이름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다. 또한 이 시기동안 F-35에는 신형 AN/APG-81 AESA 레이더, AN/AAQ-37 DAS(Distributed Aperture System, 분산개구장비), AN.AAQ-40 EOTS(Electro-Optical Targeting System, 광전자 조준장비) 등이 통합되면서 이전 세대의 전투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인식능력을 갖게 되었다. 한편 F-35의 개발에는 미국과 영국이외에도, 이탈리아, 네덜란드, 터키, 캐나다, 호주, 덴마크, 노르웨이 등이 참가하여 본격적인 국제사업이 되었다. F-35A의 첫 시제기인 AA-1은 2006년 12월 15일 초도비행을 실시했다.
초도비행에 나선 F-35A AA-1 시제기의 이륙장면 <출처: 미 공군>
2008년 12월 19일 록히드마틴은 최초의 양산표준형 F-35A 시제기인 AF-1호기를 출고했다. 2009년 1월까지 6대의 시제기가 만들어졌지만 계획이 예상보다 늦어짐에 따라 로버트 게이츠(Robert Gates) 국방장관은 F-35의 양산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앞으로 수십년간 새롭게 구매할 수 있는 유일한 전투기가 F-35가 됨에 따라 각군의 다양한 능력을 F-35에 요구했고 개발은 더욱 지체되었고 실전배치 스케쥴은 늦어지고 사업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정부회계감사국과 미 상원 국방위원회는 계속적으로 국방부를 압박하면서 빠른 배치를 요구했다.
완전무장을 장착하고 시험비행중인 F-35A AF-01 양산시제기 <출처: 미 국방부>
결국 SDD사업의 완료는 예정보다 수년이 늦어지게 되면서 2010년 당시 국방부 획득기술군수지원 차관보였던 애쉬튼 카터(Ashton Carter)는 F-35  사업구조를 개편하고 F-35 획득예산 가운데 28억불을 개발예산으로 돌렸다. 이에 따라 초도작전능력 선언시기도 각군별로 3~4년 가량 늦어지게 되었다. 2012년이 이르러서는 대당획득가격이 애초에 예상했던 비용에 2배에 이를 것이라는 추정까지 나왔다. 그러나 개발이 안정되고 가격이 내려가면서 2013년 제7차 저율생산(LRIP-7)분부터는 획득가가 1천만불 이하로 내려갔고, 2018년 제11차 저율생산(LRIP-11)에 이르러서는 F-35A는 892만불까지 떨어졌다.
대한민국 공군용 F-35A 1호기(AW-1)가 록히드 마틴 공장 상공을 비행중이다. <출처: Lockheed Martin>

획득일정도 수년간 지연되었지만, 우선 해병대의 F-35B가 2015년 7월에 IOC(Initial Operational Capability, 초도작전능력)에 다달았음을 선언했고, 공군의 F-35A는 2016년 8월에 IOC에 이르렀다. 해군의 함재기형 F-35C는 2019년 중에 IOC를 선언할 예정이다. 아직은 저율생산단계이지만 미군은 3가지 버전을 합쳐 모두 2,443대를 도입할 예정이다. 해외국가 가운데 파트너 국가인 영국이 138대를 구매할 예정으로 가장 많은 도입국이었지만, 2018년말 일본이 2019~23년 '중기 방위력 정비계획'(중기방) 발표로 A형과 B형을 합쳐 142대의 도입의사를 밝혀 최대 도입국이 될 전망이다. 대한민국은 2014년 F-35A 40대의 도입을 결정하였으며, 대한민국 공군 1호기(AW-1)가 2018년 3월 출고식을 마쳤으며, 2019년 3월말에 초도기 2대가 한국에 인도될 예정이다.


저자 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본 연재인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 중동지역에서 교육훈련과 보안업무를 수행하는 등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하다 일선에서 물러났다. 현재는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WMD 대응센터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남대와 신안산대 등에서 군사전략과 대테러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방위사업청, 해·공·육군 정책자문위원, 민주평통 국제협력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