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징병제도의 역사
군대문화 이야기(8) 백만대군 양병의 첫 걸음
  • 윤상용
  • 입력 : 2018.09.04 08:51
    신병 훈련 중인 대한민국 육군 제 6사단 신병교육대의 모습 <출처: 대한민국 국군 플리커>
    신병 훈련 중인 대한민국 육군 제 6사단 신병교육대의 모습 <출처: 대한민국 국군 플리커>

    일국의 군대를 형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병력, 즉 ‘사람’이다. 인류가 집단을 이루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목적으로 생겨나게 된 군대도 부락 단위의 집단이 국가로 커짐에 따라 함께 팽창하고 전문적이 되었다. 하지만 군대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적의 기습에 대응하여 국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본적으로 상설 군대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노동력과 생산력을 포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결국 고대의 여러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군대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중국 한(漢)나라 대에 시행된 둔전제(屯田制), 그리고 수(隨) 나라 대에 등장한 부병제(府兵制)다. 둔전은 변방 국경을 수비하는 병력이 직접 평시에 경작을 실시하여 자급자족하는 방식으로, 가급적 군대의 식량 소비가 민간 생산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실시했다. 부병제는 노동력이 있는 남성을 3명 당 1명 꼴로 돌아가며 3년 단위로 징집하되, 평시에 징집대상인 남성에게 일정량의 토지를 하사하는 대신, 징집자는 스스로의 식량과 군장을 책임지게 하는 제도였다. 서양에서는 주로 시민권이 있는 시민이거나 귀족에 대해서만 군무를 부과한 경우가 많으며, 재력을 갖춘 지방 영주가 군을 양성하는 형태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흔히 오늘날과 같이 전 국민에 대해 차별 없는 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징병제’가 정착하게 된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인 1790년대 프랑스 대혁명 때부터였다.


    고대에서 출발한 징병제의 기원

    고대 바빌론은 일쿰(ilkum)이라 부른 독특한 징병제도를 운영했다. 모든 노동자는 바빌론 국왕으로부터 땅을 하사 받는 대신 국왕을 위해 일정 기간 병사로 복무해야 했다. 일쿰에 대한 조항은 함무라비 법전에도 등장한다. 물론 징집을 회피하는 방법도 존재했는데, 이를 위해 대신 복무할 이를 고용하는 방법을 통해 의무 복무를 거래했다. 이것조차 용이하지 않은 이들은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이사를 가버리는 경우도 흔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직 신원이나 거주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던 시절이라 가능했을 것이다.

    오스만이 정복지의 기독교 노예 아이들을 모아 근위병으로 구성한 카프쿨루 시파히(Kapıkulu Sipahi) 병사들이 비엔나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의 복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오스만이 정복지의 기독교 노예 아이들을 모아 근위병으로 구성한 카프쿨루 시파히(Kapıkulu Sipahi) 병사들이 비엔나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의 복장.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중세 시기의 유럽도 비슷한 제도를 운영했다. 봉건제가 정착되어 있던 중세 유럽에서는 농부가 봉건 군주로부터 일정 면적의 토지를 하사 받게 되면 그 가족 내에서 한 명이 군역을 수행해야 했다. 이 시기에 중동에서 가장 흔한 징병방식은 노예를 활용하는 것으로, 최초의 사례는 약 820년경에 성립된 압바스 왕조의 투르크계 노예 병사들이다. 이 방식은 곧 중동지역에서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 되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흔한 징병방식이 되었고, 마물루크 왕조나 오스만투르크도 채택하여 19세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14세기경 오스만 왕조의 무라드 1세는 정복지의 기독교 아이들을 모아 카프쿨루(Kapıkulu)라는 근위 기병대를 구성했으며, 이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전사로 양성했다. 의외로 이 방식으로 투르크 군에 들어가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경우들도 꽤 있는데, 재상까지 오른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Pargalı Ibrahim Pasha, 1495~1536)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Sokollu Mehmed Pasha, 1506~1579)가 대표적이다. 이 ‘카프쿨루’는 최대 규모인 1600년대에 약 100,000명까지 팽창했다. ‘마물루크’도 납치하거나 노예로 구입해 온 이란계 비(非) 무슬림이나 투르크계 아이들을 개종시켜 병사로 양성한 부대인데, 이들은 용맹성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한 때 카스트 제도의 ‘전사’층을 차지했고, 심지어 1250년대부터 1517년까지는 이집트를 통치하기도 했다.

    만주에서 촬영된 러시아 병사들의 모습. 시기는 1882년~1936년 사이로 불확실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만주에서 촬영된 러시아 병사들의 모습. 시기는 1882년~1936년 사이로 불확실하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제정(帝政) 러시아의 경우는 농노에게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여 19세기 초까지 25년의 의무 복무 기간을 두었다. 러시아는 1834년경 농노의 의무 복무 기간을 20년으로 줄였으나,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함에 따라 1874년부터 일반 국민에 대한 징병제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훗날 소비에트 혁명이 터질 때까지 20세가 되는 모든 남성은 6년간 의무적으로 군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오늘날 징병제도의 기원이 된 프랑스 대혁명

    한편, 사회적 신분에 관계없이 청년 남성이라면 동등하게 병역의 의무가 부과되는 오늘날의 징병제도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원으로 삼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면서 봉건제가 무너진 프랑스는 구 왕정 체제를 복구하기 위해 침공해 온 주변 국가들의 대대적인 위협을 받게 된다. 이에 새롭게 구성된 프랑스 공화국 정부는 최초로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leveé en masse)를 도입했으며, 이에 따라 미혼의 건강한 18세~25세 사이의 남성은 모두 병역의 의무를 부과받았다.

    1798년 2월 15일자로 로마에 입성한 프랑스 육군을 그린 기록화. 르꽁트 이폴리트 (Lecomte Hippolyte, 1781~1857) 작. (출처: Wikimedia Commons>
    1798년 2월 15일자로 로마에 입성한 프랑스 육군을 그린 기록화. 르꽁트 이폴리트 (Lecomte Hippolyte, 1781~1857) 작. (출처: Wikimedia Commons>

    이 근거가 된 1798년 9월 5일 법안은 장-밥티스트 주르당(Jean-Babtiste Jourdan, 1762~1833) 원수에 의해 입법되었으며, 그 첫 머리에는 “모든 프랑스 남성은 병사이며, 조국을 지킬 의무를 갖는다”라고 명시하여 ‘국민’이 ‘국가’를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 처음으로 명문화했다. 특히 국민개병제의 실시를 통해 프랑스는 일순간에 26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확보했는데, 이는 전문적인 직업군인 위주로만 군대를 운영하던 대부분의 유럽국가의 병력 수를 압도하고도 남는 숫자였기 때문에 훗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을 석권하는데 큰 보탬이 되었다.

    남북전쟁 중에 운영된 신병 모집소를 묘사한 삽화. <출처: Public Domain>
    남북전쟁 중에 운영된 신병 모집소를 묘사한 삽화. <출처: Public Domain>

    미국은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 때 처음 북군에서 의무 징병제를 실시했다. 연방 의회는1863년 내전 징병법을 통과하면서 20세에서 45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신원을 등록하도록 했으며, 이 등록자를 기준으로 국가가 징집대상자를 가려 징병을 실시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주로 빈민층의 징집률이 높았다. 이는 사실 아직 신원 확인이 어렵던 시절을 악용한 사례가 많았기 때문인데, 부유층 자제들이 징집대상자로 걸리면 자신의 이름으로 대신 복무할 이를 고용한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돈인 약 $300달러(1860년대 화폐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8,670달러다)를 내고 처음부터 징집을 면제받는 경우도 있었다.

    불합리한 징병제도에 항의하며 발생한 뉴욕 징병 폭동의 스케치. <출처: Wikimedia Commons>
    불합리한 징병제도에 항의하며 발생한 뉴욕 징병 폭동의 스케치. <출처: Wikimedia Commons>

    하지만 이런 불합리성 때문에 뉴욕에서는 1963년 7월에 징집 폭동이 발생해 3일 동안 119명이 사망했다. 이 폭동은 주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주축이 되어 발생했지만 딱히 징집의 불합리성 때문에만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전쟁기간이 길어지면서 발생한 인플레와 줄어드는 일자리, 그리고 당시 미국 내에 만연하던 인종차별 문제가 누적되던 중 징병 문제가 방아쇠로 작용한 것이다.


    현대 징병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

    프랑스와 러시아의 징병제가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소극적인 징병 제도의 시초였다면, 1차, 2차 세계대전은 그 범위가 훨씬 확장된 대규모 징병제도를 자리잡게 한 계기였다. 참전국 대부분이 총력전을 펼친 사상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약 17만 명에서 20만 명 규모였던 미군은 4백만 명의 대군으로 급속 확장해야 했기 때문에 체계적인 징병 제도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1917년 선발징병청(SSS: Selective Service System)이라는 독립기관을 설치하고 징병 제도를 수립하게 되었다.

    1917년, 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선발징병청 등록 카드. <출처: Wikimedia Commons>
    1917년, 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된 선발징병청 등록 카드. <출처: Wikimedia Commons>

    선발징병청은 미국이 1917년 4월 6일자로 독일에 선전포고를 실시하자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명령으로 징병에 들어갔으며, 6주 안에 백만 명 징집을 최초 목표로 삼았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21세에서 3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명부에 등록하도록 했으며, 복무 기간은 12개월을 기준으로 잡았다. SSS는 등록된 남성을 1~5 등급으로 분류하여 숫자가 높아질수록 징집 대상에서 멀어지도록 구분했지만, 기간 내에 결국 백만 명을 채우기가 힘들어진 SSS는 중도에 대상 연령을 45세까지로 상향했다. SSS는 종전과 함께 1920년부터 징병을 중단했으며, 1차 세계대전이 종전한 1918년 11월을 기준으로 선발징병청에 등록한 남성의 수는 2,400만 명이었고, 종전 당시 미군의 숫자는 2,810,296명이었다. 미군은 종전과 동시에 동원령을 해제하고 전쟁 이전 숫자로 서서히 감군했으며, 기존 전통에 따라 전쟁 중 가(假)진급했던 장교들도 원래 계급으로 다시 환원시켰다.

    기본적으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선발징병청의 주도로 필요 병력을 징병했지만, 여군 보조대를 비롯한 자원병 위주의 부대도 운영했다. <출처: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 Public Domain>
    기본적으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중 선발징병청의 주도로 필요 병력을 징병했지만, 여군 보조대를 비롯한 자원병 위주의 부대도 운영했다. <출처: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 Public Domain>

    이후 20년간 징병 방식을 점검한 SSS가 다시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은 1940년 2차 세계대전 때였다. 진주만 공습에 따라 미 정부가 일본 및 독일을 상대로 선전포고 하면서 다시 한 번 병력을 확장한 미군은 유럽과 태평양 두 곳에서 싸워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에 이번엔 20만 명까지 감군했던 군대를 1,600만 명까지 증원했다. 이미 18세에서 64세 사이의 모든 남성 시민권자 명부를 갖고 있던 SSS는 6주 단위로 백만 명씩 징집을 목표로 삼았으며, 21세~37세 사이의 남성을 대상으로 하여 18개월 복무기간을 두고 추첨제를 실시했다. SSS는 등록하는 모든 대상 연령 남성에게 생년월일과 거주지, 등록 순서 기준으로 번호를 부여하며, 대통령이 동원령을 선포하면서 필요한 병력 숫자가 확정되면 SSS 측이 선발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추첨 방식을 선택했다. 미군은 1945년 종전 당시 10,110,104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최초에는 흑인을 징병대상에 넣지 않다가 1943년부터 징병대상에 포함했지만, 흑인이 전투원의 자격을 얻기까지는 다시 또 긴 세월이 필요했다.

    영국 울버햄튼(Wolverhampton)에 설치된 망명 네덜란드 육군에 입대한 신병이 입대 물품을 수령받은 후 안내받고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영국 울버햄튼(Wolverhampton)에 설치된 망명 네덜란드 육군에 입대한 신병이 입대 물품을 수령받은 후 안내받고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본격적인 현대전의 시대와 미국의 징병제도

    선발징병청(SSS)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천만 명 단위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제 하면서 집으로 돌려보냈고,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들도 상당수 군문을 떠났다. 하지만 미국은 불과 5년만에 다시 한 번 동원령을 내려야 할 상황에 직면한다. 바로 6·25전쟁 때문인데, 미 육군은 1948년 이후부터 99만 명 이하까지 감군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긴급하게 징집을 실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SSS는 이에 징병 대상자를 18.5세~26세로 하한선을 낮췄고, 복무기간도 기존 21개월에서 24개월로 늘렸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징병대상에 포함되자 말없이 징병에 응한 ‘스타’들의 존재다. 필라델피아 필리스(Philadelphia Philles) 소속 2선발 좌완 투수였던 커트 시몬스(Curt Simmons, 1929~)는 1947년에 입단하여 1950년 시즌에 17승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고, 심지어 필리스가 20세기 들어 처음으로 내셔널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시즌 종료를 불과 한 달 남기고 영장을 받았다. 그는 월드시리즈에 올라간 팀을 뒤로하고 1950년 6월자로 입대했으며, 1951년 한 해 동안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이듬해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1952년 시즌부터 다시 마운드에 올랐지만 2년 동안의 공백이 무색하게 14승 달성에 방어율 2.82를 기록했다. 이렇게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지구 위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잡으며 6·25전쟁에서 33,686명이 전사했다. 휴전이 시작된 1953년 7월 27일 기준으로 미 육군의 병력 규모는 1,529,539명이었다.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M24 전차에 탑승해 전선을 사수 중인 미 제 24사단 병사들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Sgt. Riley>
    1950년 8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M24 전차에 탑승해 전선을 사수 중인 미 제 24사단 병사들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Sgt. Riley>

    다시 한 번 미국에 대규모 징병의 필요성이 대두된 시기는 베트남 전쟁 때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 참전과 함께 다시 징병을 실시해 군을 최대 185만 명까지 확장했다. 미국이 현대에 치른 전쟁 중 가장 처절했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15,058명이 전사하고 109,527명이 부상을 입었다. 전비는 연간 단위로 $250억 달러가 지출되었으며, 월 단위로 4만 명씩 징병이 실시되기 시작하면서 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전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전사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병역 기피를 시도했고, 일부는 선발징병청에 신원을 등록하지 않거나 캐나다나 영국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징병 기피는 중범죄로 분류됐기 때문에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징병을 회피해 기소된 사람은 21만 명에 달한다.

    미 해군 신병 훈련 사령부(RTC)에서 첫날 밤 이발 중인 신병의 모습. (미 해군/Scott A. Thornbloom)
    미 해군 신병 훈련 사령부(RTC)에서 첫날 밤 이발 중인 신병의 모습. (미 해군/Scott A. Thornbloom)

    베트남 전쟁의 여론이 계속 악화되는 가운데, 1968년 미 대선 후보로 출마한 리처드 닉슨(Richard M. Nixon) 후보는 공약으로 징병제 폐지를 내걸었다.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전면 모병제 전환을 고려했지만, 여전히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던 중이었기 때문에 미 국방부의 반대가 심해 보류했다. 대신 전 국방부장관인 토머스 게이츠(Thomas S Gates)를 위원장으로 한 게이츠 위원회를 설치해 모병제 전환 문제를 검토하게 했으며, 게이츠 위원회는 1971년 6월부터 징병제를 중단할 것을 권유했으나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하는 충격을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에 따라 1973년으로 연기됐다. 이때부터 미군은 모병제 전환 준비에 들어가며 군인의 급여를 크게 올렸고, 1972년 12월에 1952년생의 징집을 끝으로 전면 징병제를 폐지했다.

    미 육군의 징집제도를 통해 징병된 최후의 인물인 제프 멜린저 원사. 그는 2007년 미 육군 주임원사 물자사령부 주임원사를 지낸 후 2011년에 전역했다. <출처: 미 육군>
    미 육군의 징집제도를 통해 징병된 최후의 인물인 제프 멜린저 원사. 그는 2007년 미 육군 주임원사 물자사령부 주임원사를 지낸 후 2011년에 전역했다. <출처: 미 육군>

    징병제로 징병된 마지막 인물은 제프 멜린저(Jeff Mellinger)였으며, 그는 미 육군 물자사령부 주임원사까지 오른 후 2011년에 전역했다. 미국은 1980년 지미 카터(Jimmy Carter) 대통령 때부터 다시 18세에서 25세까지의 미국 국적을 가진 모든 남성에 대한 선발징병청 등록 의무를 되살렸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가가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가용 인원을 파악할 목적일 뿐이며, 지금까지 두 번 다시 이 명단을 사용한 적은 없다.


    의무 복무제에서 직업 전문성을 중시하는 모병제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가 의무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다. 하지만 안보상황에 따라 제한적인 징병제나 의무 징병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도 적지 않은데, 현재 18개월 이상 의무복무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33개국이며, 여성까지 복무의 의무가 부과되는 국가는 이스라엘, 북한, 스웨덴을 비롯한 7개국이 있다. 한편 인구가 제한적이거나, 국방권을 주변 국가에 위임하여 아예 군대 자체가 없는 국가도 13개국에 달한다.

    신병들을 줄세워 놓고 교육 중인 이스라엘 방위군(IDF) 기바티(Givati) 여단의 모습. 기본훈련 과정의 시작일에 촬영한 것이다. <출처: Israel Defense Forces/Public Domain>
    신병들을 줄세워 놓고 교육 중인 이스라엘 방위군(IDF) 기바티(Givati) 여단의 모습. 기본훈련 과정의 시작일에 촬영한 것이다. <출처: Israel Defense Forces/Public Domain>

    최근에는 냉전이 종식되면서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해체되고, 공동방어, 공동대응을 원칙으로 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기대면서 감군을 실시중인 유럽국가들도 상당수가 모병제를 채택했다. 1993년에 모병제로 전환한 벨기에, 2001년에 전환한 프랑스, 2004년에 전환한 이탈리아, 2007년에 전환한 구 유고연방과 불가리아, 2009년에 전환한 폴란드, 2011년에 전환한 독일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국가는 냉전의 종식 뿐 아니라 2000년대 말 유럽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국방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전투기와 전차 등도 크게 처분했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한 환경의 변화다. 2010년대부터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고, 2014년부터는 ISIS가 중동지역을 장악하고 나섰으며, 같은 해에는 크림 반도와 동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러시아와 충돌이 격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이들 국가는 뒤늦게 다시 군비확충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한 번 줄어든 병력과 장비를 다시 늘리는 것은 어렵다는 점이 이들 국가가 최근에 안고 있는 고민이다. 심지어 중립국을 표방하는 스웨덴은 2010년에 모병제로 전환했다가 러시아의 위협이 고조되자 2017년부터 다시 징병제를 부활시켰다.

    베트남 전쟁의 피로와 회의감이 담겨있는 한 참전 병사의 지포 라이터. 전쟁 말엽인 1970년~72년 경에 촬영된 사진으로, 라이터에는 ">
    베트남 전쟁의 피로와 회의감이 담겨있는 한 참전 병사의 지포 라이터. 전쟁 말엽인 1970년~72년 경에 촬영된 사진으로, 라이터에는 "비록 내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골짜기를 지나게 되더라도, 내가 그 골짜기의 가장 악랄한 놈일 것이기에 어떤 악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리라"라고 적혀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의무복무제에서 모병제로의 전환은 현실적인 부분에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대표적인 예는 미군의 모병제 전환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베트남 철군과 함께 1972년부터 모병제로 전환한 미국은 112만 명 수준이던 군대를 80만 명으로 급격하게 줄였는데, 이는 베트남 전쟁 종전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모병제로 변경함에 따라 상승한 전군의 인건비 부담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군은 모병제로 전환함과 동시에 바깥 사회와 인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에 따라 일정 수의 모병률을 유지할 수 있는 다양한 인센티브를 군에서 제공하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AAFES(Army, Air Force Exchange Service)를 앞세운 복지혜택, 교육지원제도, 주거지원제도, 각종 수당, 연금, 시민권 획득 지원, 전역 후 취업지원, 병사/부사관의 장교계급 진출 지원 등이다. 특히 조종사나 해군 잠수부, 잠수함 승조원 등 전문적이거나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해야 할 인재를 잡기 위해 조종장려수당(최대 $25,000달러), 잠수부 수당(최대 월 $240 달러), 잠수함 승조원 수당(장교는 최대 $835달러, 병사는 $425달러), 격오지 근무수당(월 $300달러), 특수임무 보상수당, 장기 전개 수당, 위험지역 수당, 법무/군의 복무연장 수당, 외국어 능력 수당 등이 책정되어 있고, 교육지원의 경우 본인 뿐 아니라 가족에게까지 범위가 확대되어 혜택이 주어진다.

    포트 미드(Fort Meade)에서 신병들의 선서를 받고 있는 마크 에스퍼(Mark T. Esper) 미 육군장관. <미 육군/Staff Sgt. Brandy N. Mejia>
    포트 미드(Fort Meade)에서 신병들의 선서를 받고 있는 마크 에스퍼(Mark T. Esper) 미 육군장관. <미 육군/Staff Sgt. Brandy N. Mejia>

    결국 이 문제는 국방 및 복지예산 문제와 직결되며, 바깥 사회의 실업률 문제도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통상 사회의 실업률이 올라가면 모병률이 알아서 증가하고, 실업률이 떨어지면 모병률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또한 2003년 이라크 전쟁 후부터 전사자가 1,000명 이상 단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징병률이 급감했던 적도 있는데, 이는 인센티브의 문제로 해결이 되지 않아 미군 당국이 입대 기준을 크게 낮춰서 모병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때 모병된 병력은 재계약률이 낮게 나와 병력의 '질'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징병제도와 그 미래
     
    건국 이래 의무 복무제를 채택해 온 대한민국은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겪은 625 전쟁뿐 아니라 항시 1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해 온 북한의 직접적인 위협 때문에도 항상 대규모 병력 유지의 부담을 안아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속적인 인구감소 문제 때문에 징병제도를 처음부터 검토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섣부른 감군이나 모병제 전환은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미군이나 스웨덴 군의 사례에서 보듯, 주변의 안보상황이 안정되고 군이 사회와 경쟁할 준비가 되어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대만 역시 내내 의무 복무제를 실시하다가 중국과 양안(兩岸)관계가 좋아지던 2008년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총통이 모병제 도입을 시작해 2018년을 기점으로 징병제를 완전히 철폐했었는데, 이는 병력 수를 줄여 인건비를 줄이는 대신, 그 비용으로 신무기를 도입해 전력을 충원한다는 계획에 바탕한 것이었다. 문제는 2013년부터 단계별로 모병을 시작했을 때 충원율이 30%도 나오지 않아 오히려 병사 1인당 급여를 기존의 네 배까지 올렸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양안관계가 지금은 좋은 편이지만, 2010년대 중국의 해양영토 확장에 따라 대만과 충돌했던 사실을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 국제환경과 안보상황이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국가의 위상과 경제력이 달라진 시대이니만큼 군복을 입은 모든 이들이 충분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충분한 대우와 환경, 그리고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어 줄 의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스웨덴 군은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했었으나, 주변 안보의 위협이 증가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 <출처: Irish Defense Forces>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근무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 중이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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