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전투복의 역사
군대문화 이야기(5) 전사의 목숨과 권위를 지키는 갑옷
  • 윤상용
  • 입력 : 2018.05.03 20:53
    합동 훈련 중인 미 육군과 리투아니아 육군의 모습. 리투아니아군의 진녹색 전투복이 인상적이다. <출처: 미 국방부/Staff Sgt. Megan Leuck>
    합동 훈련 중인 미 육군과 리투아니아 육군의 모습. 리투아니아군의 진녹색 전투복이 인상적이다. <출처: 미 국방부/Staff Sgt. Megan Leuck>

    오늘날 군인을 알아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상대방이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현대의 군대는 국가를 막론하고 모두 동일하게 제작된 ‘군복’을 입고 있으며, 이를 통해 소속 국가, 소속 군, 소속 부대, 병과, 이름 등을 식별할 수 있다. 군인 외에도 경찰이나 소방관, 준군사조직 등이 동일한 ‘유니폼(uniform)’을 착용하는데, 이는 운동선수들이 유니폼을 입는 이유처럼 소속감을 분명히 할 목적뿐 아니라 활동에 편안하도록 하여 임무를 수행하는데 의복이 지장을 주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현대의 전투복은 이렇듯 기능성과 멋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경향이 강하지만, 고대 시절부터 ‘군인’들이 착용해 온 전투복은 목숨을 지키기 위한 방호력과 내구성에 중점을 둔 경향이 강했다. 전투복의 우선 목표는 우선 적과 아군을 식별하고, 애대심을 고취하며, 부대의 통일성을 달성하는 것이다. 물론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고, 추위를 막으며, 잔 부상을 최소화 하는 것 또한 실용적인 관점에서의 전투복의 역할이다.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전투복

    스파르타 군의 장갑보병. <출처: Warner Bros. / 네이버 영화>
    스파르타 군의 장갑보병. <출처: Warner Bros. / 네이버 영화>

    최초의 전투복을 도입한 것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군락이 형성되고 부족국가가 만들어 졌을 무렵부터 수렵행위를 하고 부족의 재산을 지킬 전투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투원’들 만의 특정한 방어구나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가의 군대”가 전투복을 입은 기록은 고대 문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스파르타(Sparta) 군의 장갑보병이 착용한 적색 의상도 있었고, 한니발(Hannibal, 247~138 BC)이 이끌던 카르타고 군 또한 백색 튜닉(tunic)을 착용한 기록이 있다. 한편 동양권에서도 고조선이나 하, 은나라 유적 등에서 갑옷이나 청동 무기가 발견된 바가 있고, 진(秦)나라의 병마용에서도 통일된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병마용 병사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도 약 일곱가지의 형태가 발견되기 때문에 진나라 군이 통일된 군장을 채택했던 것으로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진(秦)왕조의 병마용. 모두 갑옷을 입고 있으나 약 일곱 가지의 각기 다른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출처: Wikipedia.org / Tomasz Sienicki>
    진(秦)왕조의 병마용. 모두 갑옷을 입고 있으나 약 일곱 가지의 각기 다른 갑옷을 착용하고 있다. <출처: Wikipedia.org / Tomasz Sienicki>

    오늘날 군제의 기원의 하나가 되는 로마 제국군은 비교적 통일된 복식과 갑옷, 무장을 채택했다. 로마는 국가가 설치한 공장에서 갑옷을 제작했기 때문에 비교적 모양이 균일한 편이었으나, 이 또한 생산 지역별로 다소간 차이가 있어 오늘날처럼 ‘완벽하게 통일된’ 형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시기의 갑옷은 요란한 치장과 장식을 달아 적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목적도 강했다. 초기 로마군은 소속 부대를 표시하기 위해 방패에 부대별 색상과 문양을 넣기도 했으나 이는 로마 후기로 가면서 동일한 색상의 투구 털 장식을 다는 형태 등으로 변했고, 허리에 두르는 ‘페코타리온(pekotarion)’이라는 띠의 색상을 다르게 하여 계급을 표시하기도 했다.

    로마 병사의 재현 모습. 하얀 튜닉 위에 갑옷을 걸쳤으며, 계급을 상징하는 '페코타리온'을 허리에 두르고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로마 병사의 재현 모습. 하얀 튜닉 위에 갑옷을 걸쳤으며, 계급을 상징하는 '페코타리온'을 허리에 두르고 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하지만 고대에서 중세까지는 아직 군장류가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아니고, 장비의 제작 시간이 길고 단가도 높았기 때문에 국가 단위의 군이 전형적인 한 디자인의 장비를 착용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던 듯 하다. 이 시기에도 물론 부대의 통일성과 피아구분, 그리고 지휘관의 지휘에 따르는 군기가 중요했지만 이러한 목적은 주로 수신호나 부대 깃발, 팔에 두르는 식별 띠 등으로 달성한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무기 체계의 진화와 국가 형성에 따른 전투복의 변화

    전투복의 혁신이 본격화 된 시기는 통상 16세기 말~17세기 초로 본다. 이유인 즉, 이 시기부터 초창기 단계의 머스켓 라이플이 등장했기 때문에 대열의 집중사격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초창기 총기가 관통력은 우수하지만 명중률이 낮고 재장전 시간이 길다는 단점에 기인한 것으로, 개개인의 머스켓을 한 집단으로 묶어 순차적으로 사격을 실시하면 낮은 명중률과 재장전의 문제를 상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총기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주요 전투원들을 보호하던 두꺼운 갑옷 같은 방어장구도 17세기 중반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주무기로 대검을 사용하는 기병병과 등에 의해 가벼운 형태로 변화한 ‘갑옷’이 20세기 초까지도 살아남은 경우가 있다. 대신 초창기 머스캣 병들은 총기 장전을 위한 화약과 연초, 탄약주머니, 심지 줄, 청소도구, 근접전을 위한 대검 등 자잘하게 소지할 물건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전투복 역시 소소한 주머니와 수납공간이 늘어나는 형태로 변화해갔다.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과 프랑스가 격돌한 1813년 하나우(Hanau) 전투의 모습. 청색 군복을 입은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백색 군복을 입은 프랑스 근위 기병대에게 돌진하는 모습이다. <출처: Public Domain>
    오스트리아/바이에른 연합군과 프랑스가 격돌한 1813년 하나우(Hanau) 전투의 모습. 청색 군복을 입은 오스트리아군 기병대가 백색 군복을 입은 프랑스 근위 기병대에게 돌진하는 모습이다. <출처: Public Domain>

    또한 이 때부터는 개개인 단위의 전투력보다는 집단의 전투력이 중요해졌기 때문에 부대의 통일성과 애대심이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에 부대단위의 ‘전투복’을 착용하는 것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 군 조직 자체가 계급과 제대 단위 등이 정비되면서 체계화 된 점도 전투복의 정착과 관련이 깊다. 또한 16세기 이전의 군대는 ‘국가’나 ‘국왕’에게 충성하기보다는 지방 영주나 부대를 유지할 재력이 있는 개인이 꾸린 경우가 많았는데, 30년 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을 기점으로 국가의 권위와 국경의 의미가 강화됐기 때문에 군대 또한 상설군으로 변화하고 국가가 통제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프랑스나 영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같은 국가들은 각각의 상징색을 사용한 군복 디자인을 통일한 후 병사들에게 입혀 애국심과 애대심을 고취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는 연회색과 백색, 프러시아는 군청색, 바이에른은 하늘색, 러시아는 녹색, 영국은 적색을 선택하는 식이었다. 참고로 프랑스의 경우는 부르봉 왕가 시절에 연회색과 백색을 채택했던 것인 것인데,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진 뒤에 설립된 프랑스 공화국은 청색 계열로 전투복 색상을 바꿨다.


    외양에 목적을 두어 오히려 불편했던 군복

    뉴욕 오크데일(Oakdale)의 라살(La Salle) 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기병대의 '샤코' 모자. <출처: Wikipedia.org>
    뉴욕 오크데일(Oakdale)의 라살(La Salle) 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기병대의 '샤코' 모자. <출처: Wikipedia.org>

    하지만 이 화려한 제복은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면 태양 빛에 바래고, 비와 눈에 젖어 색깔이 빠져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장기 행군을 하다 보면 원통형 모자인 “샤코(shako)”나 장식 술 등은 거추장스러웠고, 장화는 혹한이나 혹서기후에서 오래 걷기에 불편했다. 또한 울(wool) 재질로 만든 옷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위를 막기에 애매해 결국 각자 위에 덧입는 오버코트(overcoat)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실용적인 측면’의 문제점이 전투복에 제대로 반영되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가 다 되어서 였다.

    16세기~18세기 말까지의 전투복은 효용성보다는 휘황찬란한 장식효과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목적의 전투복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실제 전투에서는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스톡(Stock)”이라고 불린 목부위의 칼라(collar)다. 오늘날로 치자면 마치 와이셔츠를 목부분까지 꽉 끼게 잠근 듯한 모습을 하게 만드는 것이 이 ‘스톡’인데, 이 부분은 계급장이나 장식을 다는 용도로 많이 활용됐으나 목을 돌리기 힘들게 해 주변 상황 인지를 어렵게 했고, 무엇보다 옷 내부의 통풍을 어렵게 해 체온 조절이 잘 되지 않게 했다. 전투복의 재질도 지나치게 고급 천을 써서 혹독한 전장 환경에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예를 들자면 7년 전쟁 당시 프러시아 군이 입었던 전투복은 물을 흡수하면 무거워지고 천이 쪼그라드는 경향이 있어 행동을 어렵게 했고, 심지어 비라도 맞게 되는 경우에는 버튼을 잠글 수 없어 추위를 막기도 힘들었다. 기병의 경우 높은 모자와 술(絉) 장식도 문제가 됐다. 숲 속을 달릴 때 나무에 걸리기 쉬운 데다 적이 사격 표적으로 삼기 쉬웠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군은 17세기부터 “붉은 코트(Red Coat)”가 상징이 됐을 정도로 적색 군복을 즐겨 입었는데, 아무래도 적색은 가장 멀리서 보이는 색상인데다 아무리 주변 은폐물 뒤에 숨으려고 해도 색상이 튀어 보였기 때문에 적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영국군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붉은색 전투복을 변경했다.

    c 1세의 막내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 1805~1870)의 초상화. 칼라(collar)의 일종인 ">
    c 1세의 막내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Jerome Bonaparte, 1805~1870)의 초상화. 칼라(collar)의 일종인 "스톡(Stock)"이 목부위까지 덮고 있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1차 세계대전이 터질 무렵인 1914년경에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은 알록달록하고 화려하던 전투복 대신 카키색이나 회색 등 저시안성(低詩眼性) 색상의 전투복을 도입하고 있었다. 이는 전열보병 중심의 전투방식이 미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는 기관총을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등장으로 쌍방이 줄을 맞춰 도열한 후 들판에서 전진하며 싸우던 형태를 버려야만 했다. 특이하게도 프랑스 군은 1912년에 터진 발칸 전쟁 때 대량의 사상자를 내고 나서야 적색 코트를 폐기했는데, 불과 얼마 후 이 결정에 대해 ‘프랑스의 자존심을 버렸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할 수 없이 적색 코트를 다시 채택했다. 결국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무렵 이 ‘빨간 코트’를 입은 채로 개전했으며, 두드러지는 색상이 사상자를 더 야기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수천 명의 목숨을 더 필요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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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칭 "붉은 코트(Red Coat)"로 불린 영국 육군의 적색 군복 모습. 이 그림은 1841년 8월 아편전쟁의 일부인 아모이(Amoy) 전투에 참전 중인 영국 제 18 아이리쉬 보병연대원들의 모습을 기록한 기록화이다. <출처: Public Domain>

    1차 세계대전 중 병사들의 머리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것은 파편상 이었다. 무기의 화력이 커진 데다 작열식(灼熱式) 무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양 진영은 단단한 철모를 병사들에게 지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국은 병사들의 시야를 확보하고 목 움직임을 편하게 하기 위해 머리 부분만 덮고 챙으로 둘러친 철모를 도입했는데, 문제는 이것이 주요 두부 부상 부위를 거의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병사들의 안면은 물론이고 목 부위나 귀 등이 거의 보호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보다 효용성이 낮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 시기의 프랑스군은 철모가 아니라 부드러운 모자를 지급해 병사들의 생존성이 크게 낮아졌었다.


    기능성 전투복의 등장과 제 1, 2차 세계대전

    사실 17세기까지 유럽국가가 화려한 색상의 전투복을 채택한 것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 시기 까지만 해도 총기의 사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은 적의 앞까지 접근해 “적의 눈동자 흰자가 보이면” 사격을 하라고 교육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8세기 즈음이 되면서 총기류도 획기적인 진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미 남북전쟁 무렵에는 장전속도와 정확도, 사거리가 크게 개선된 총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심지어 이 전쟁에서는 ‘악마의 병기’로 불린 개틀링 기관총이 등장해 순식간에 다수의 병사를 살상했다. 또한 한 회의 장전으로 여러 발 사격이 가능 해졌고, 사격 후 화약 연소로 인한 연기도 크게 줄어들게 됐기 때문에 이제 전투는 아직 상대방이 전투 준비를 마치지 못했을 때 먼저 발견하는 쪽에게 크게 유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남북전쟁 이후부터는 가급적 원거리에서 적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화려한 색상의 전투복이 배제되기 시작하였고, 19세기에 들어서게 되면서부터 서서히 ‘위장색’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남북전쟁 중인 1862년 2월, 북부 버지니아에서 통칭 ">
    남북전쟁 중인 1862년 2월, 북부 버지니아에서 통칭 "커피 밀(Coffee Mill)"이라는 별명을 가진 개틀링 기관총 사격을 연습 중인 북군 제 96 펜실베이니아 자원 연대원들의 모습. 이러한 대량살상무기의 등장은 기존 전투복의 모습도 크게 변모시켰다. <출처: Springfield Armory National Historic Site, 미 연방국립공원 관리청(NPS)>

    오늘날 전투복에 가장 가까운 형태는 영국군이 인도 식민지에서 사용한 “카키(Khaki)” 전투복이었다. 1846년 해리 럼스덴(Harry Lumsden, 1821~1896) 중위가 현지인들 중심으로 구성한 향도단(嚮導團: Corps of Guides)이 채택했던 옷으로, 흔히 말하는 ‘카키색(우르두 어로 ‘먼지’라는 뜻)’ 색상에 인도 전통의상을 개량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영국은 1857년 세포이 항쟁(Sepoy Mutiny)이 터지자 이에 대한 진압에 들어갔는데, 이 때 투입된 영국군 부대 상당 수가 은폐를 목적으로 하복(夏服)으로 지급된 백색 전투복을 카키색으로 염색해 입었다. 이 때 위장색의 개념에 처음 눈 뜬 영국군은 진녹색과 카키색 계통으로 전투복을 제작해 1896년부터 전군이 착용을 시작했다. 영국은 1902년부로 근무복까지 짙은 카키색 유니폼을 채택했는데, 이를 본 미국과 러시아, 심지어 일본군까지 영국을 따라 옅은 카키색(모래색) 계열의 전투복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10년경에는 독일도 위장색 전투복을 채택했지만 옅은 회색계열을 골랐는데, 프랑스만은 여전히 새파란 상의에 적색 바지를 사용했다. 하지만 1914년부터 1918년까지 벌어진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을 통해 위장색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고, 프랑스 또한 청색 전투복 대신 옅은 카키색 전투복을 채택하게 되었다.

    영령 인도군 소속 제 33 펀잡(Punjabi) 군 지휘관 전투복. <출처: A.C. Lovett 그림 / Public Domain>
    영령 인도군 소속 제 33 펀잡(Punjabi) 군 지휘관 전투복. <출처: A.C. Lovett 그림 / Public Domain>

    한편, 오늘날의 얼룩덜룩한 ‘위장무늬’(Camouflage) 전투복을 처음 채택한 것은 이탈리아 군이었다. 위장무늬는 1930년대에 독일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에 의해 야전텐트용으로 처음 사용되었으며, 1940년대에 SS 무장친위대가 일부 위장무늬 전투복을 착용했지만 매우 제한적이었다. 한편 태평양에서 싸우게 된 미 해병대 역시 1942년부터 일명 “개구리 피부(frog skin)”라 불린 5색 점 얼룩무늬 전투복을 채택했으나, 위장무늬 전투복이 일반적이 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부터 였다. 미군도 단색의 전투복을 사용하다가 1981년부터 통칭 ‘우드랜드(woodland)’ 패턴을 채택해 2006년에 일명 ‘디지털 무늬’로 변경할 때까지 사용했으며, 영국군도 ‘DPM(Disruptive Pattern Material)’이라는 얼룩무늬 전투복을 1969년부터 채택했다가 2010년부터 모든 지형에서 통한다는 ‘MTP(Multi-Terrain Pattern)’ 전투복으로 순차 교체하고 있다.

    걸프전 때 잠시 사용된 후 사라진 미 육군의 사막 위장복. 사막에 돌 그림과 그림자까지 그려넣은 것이 인상적이나, 위장 효과는 낮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사 라졌다. 사진 속의 인물은 걸프전을 지휘했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 장군. <출처: 미 국방부>
    걸프전 때 잠시 사용된 후 사라진 미 육군의 사막 위장복. 사막에 돌 그림과 그림자까지 그려넣은 것이 인상적이나, 위장 효과는 낮았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사 라졌다. 사진 속의 인물은 걸프전을 지휘했던 노먼 슈워츠코프(Norman Schwarzkopf) 장군. <출처: 미 국방부>

    한편 대한민국은 1946년 국방경비대 창설 시기부터 1950년대까지는 일본군의 포기물자를 중심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일본군의 단색 카키색 전투복을 많이 활용했으나, 625 전쟁 시기부터 1950년대 말까지 미군 물자를 공여 받기 시작해 미군의 단색 전투복을 착용했다. 국군이 처음 채택한 얼룩무늬 위장복은 베트남 파병부대 장병에게 지급했던 덕 헌터(duck hunter) 패턴 전투복이었으며, 본격적인 한국형 위장무늬 전투복은 미군 우드랜드 전투복 무늬에 착안하여 한국 지형의 색상 배합으로 제작해 1996년부터 채택한 위장 전투복이었다. 국군은 2000년대 들어서 군 및 부대 특성에 맞는 전투복을 개별 도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2006년경 특전사가 진녹색 계열의 디지털 패턴을 채택한 것을 시작으로 2011년부터는 육군은 회색 계통의 화강암 무늬를, 해병대는 연한 녹색과 진한 녹색의 물결무늬 위장복을 착용해오고 있다.


    전투복의 오늘과 내일

    최초에는 그저 몸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의 ‘갑옷’을 걸쳤던 전사들은 시대가 변천하면서 시대와 환경에 맞는 형태로 전장에 적응했고, 그 결과 갑옷 또한 다양한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오늘날의 전투복으로 정착했다. 특히 처음에는 단순하게 신체를 보호할 목적만 갖췄던 ‘갑옷’에 비해 오늘날 전투복은 다양한 기능과 목적을 갖고 있으며, 기능성 외에도 당대 민간 패션 트렌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전쟁방식과 무기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고, 인명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장구 또한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특히 이제는 소재와 IT 기술 등이 접목되면서 색상이 변화하거나 열 발산을 줄이는 등 새로운 형태로 진화 중이다.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근무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 중이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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