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백과
군사유래사전 (4) 현대의 저격수
전쟁 경험, 전술 개발, 훈련으로 ‘일발필살’ 신화 이뤄
  • 채수윤
  • 입력 : 2018.03.09 17:07
    M82 바렛 저격소총으로 무장한 미 육군 저격수 <출처: 미 국방부>
    M82 바렛 저격소총으로 무장한 미 육군 저격수 <출처: 미 국방부>


    저격수는 20세기 들어 진화를 거듭했다. 20세기에는 ‘전쟁의 세기’로 불릴 정도로 수많은 전쟁과 분쟁이 벌어지면서 저격수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실전에서 얻은 숱한 시행착오와 값진 경험, 그리고 계속되는 전술 개발과 훈련으로 저격수는 갈수록 정예화되어갔다. 저격용 소총과 망원조준경, 야시경 등 관련 기술의 개발은 더욱 정교한 필살 저격 무기체계의 개발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격수는 현대전의 필수 전력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저격수의 본격적인 등장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 전투에서 저격수는 가공할 전투력을 발휘했다. 개전 초 거의 모든 참전국이 저격수를 운용했지만, 망원조준경을 갖춘 저격수 부대를 운용한 나라는 독일 제국밖에 없었다. 광학기술과 관련 산업이 발달한 덕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과학기술이 국가를 위해, 전쟁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전쟁이었다. 이 특별히 망원조준경을 갖춘 독일 제국의 저격수들은 참호 위로 머리를 드러내는 적 병사를 정확하게 조준해 사살했다.

    독일군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망원조준경을 채용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했다. <출처: Public Domain>
    독일군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망원조준경을 채용하여 정확한 조준사격을 했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처음에는 이러한 정확한 사격이 우연히 명중시킨 것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에 독일군의 망원조준경을 발견하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 제국 육군은 대전 내내 이 저격수들의 활약으로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는 독일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산업계가 제작할 수 있었던 고품질의 렌즈가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과학기술이 저격수의 유효성과 살상력을 한층 더 높인 셈이다.

    1915년 갈리폴리의 참호에서 포대경을 이용해 저격하고 있는 호주군 저격수(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와 관측수(왼쪽에서 네 번째) <출처: Public Domain>
    1915년 갈리폴리의 참호에서 포대경을 이용해 저격하고 있는 호주군 저격수(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와 관측수(왼쪽에서 네 번째) <출처: Public Domain>

    이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머리를 참호 밖으로 내밀지 않고도 전방을 관측할 수 있는 관측용 포대경을 사용했다. 나무 꼬챙이를 이용해 철모만 참호 밖으로 올려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발해 상대 위치를 파악하기도 했다.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해 전문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다. 영국군의 헤스케스 헤스케스-프리처드(Hesketh Hesketh-Prichard) 대위는 1915년 공식 허가를 받고 저격수 양성에 들어갔다. 그는 1916년 프랑스 북부 플랑드르(Flandre) 전선에 있는 랭엄(Linghem)에 ‘제1군 저격, 감시, 정찰 학교(First Army School of Sniping, Observation, and Scouting)’를 세웠다. 이 학교는 처음에는 6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갈수록 연합군에서 파견된 많은 군인을 교육해 빠른 속도로 전문 저격수를 배출했다.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하여 전문 저격수를 양성했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군은 저격수 훈련소를 설치하여 전문 저격수를 양성했다. <출처: Public Domain>

    이 학교에서는 저격수가 적 사격을 받지 않고 목표물을 관측할 수 있는 포대경, 적의 사격을 유발함으로써 적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종이로 만든 가짜 병사 머리 등도 고안해 실전에 응용했다. 가짜 머리에는 고무 튜브를 달아 담배 연기를 내뿜게 해 적이 속아 넘어가도록 유도했다. 일단 적이 사격하면 이를 통해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한 뒤 그쪽으로 포격을 가해 무력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참호에서 가짜 머리를 내밀어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적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하면 그쪽으로 포격을 가한다. <출처: Public Domain>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이 참호에서 가짜 머리를 내밀어 적 저격수의 사격을 유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적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하면 그쪽으로 포격을 가한다. <출처: Public Domain>

    헤스케스-프리처드 대위는 저격수와 관측수가 2인 1조로 짝을 이뤄 활동하면서 시너지를 높이는 방법을 비롯해 다양한 현대 저격 기술을 도입했다. 훈련 과정에서 관찰력과 기억력을 동시에 높이는 ‘킴의 게임(Kim's game)’을 도입해 현대 저격수 교육의 바탕도 마련했다. 이 게임은 참가자들에게 여러 물건을 늘어놓은 것을 보여주고 잠시 눈을 떼게 한 다음 약간의 변형을 가한 뒤 참가자들에게 변화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게 하는 게임으로, 보이스카우트(Boy Scouts)나 걸스카우트(Girl Scouts)에서 즐기는 놀이다. 헤스케스-프리처드가 1920년 자신의 활동을 기록해 펴낸 『프랑스에서의 저격(Sniping in France)』은 지금도 저격수 교재로 많이 인용되는 고전이다.

    저격수용 방탄판을 장착하고 참호에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독일군 저격수들 <출처: Public Domain>
    저격수용 방탄판을 장착하고 참호에서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독일군 저격수들 <출처: Public Domain>

    제1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용 소총으로 독일군은 마우저 소총 98(Mauser Gewehr 98), 영국군은 패턴 1914 엔필드(Pattern 1914 Enfield)와 리-엔필드 SMLE Mk III(Lee–Enfield SMLE Mk III), 캐나다군은 로스 라이플(Ross Rifle), 미군은 M1903 스프링필드(M1903 Springfield), 러시아군은 M1891 모신-나강(M1891 Mosin–Nagant)을 주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저격수 전술의 비약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독일을 비롯해 대부분의 국가는 특수 저격수 부대를 일시 폐지했다. 하지만 스페인 내란이 벌어지면서 저격수는 다시 한 번 등장해 그 효율성을 입증했다. 저격수의 공격을 당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저격수의 위험성을 다시 절감하게 된 셈이다.

    특히 헝가리 출신의 유명 종군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가 1936년 9월 5일 찍은 역사적인 사진은 저격수의 위협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스페인 서남부 안달루시아(Andalucía) 지방에서 벌어진 ‘체로 무리아노 전투(Battle of Cerro Muriano)’에서 돌격 도중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지는 공화파 병사를 순간 포착한 사진이다. 이는 통상 전쟁의 처절함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평가되지만, 군사적 입장에서는 저격수의 위험을 잘 보여주는 사진이기도 하다. 전체 제목이 ‘1936년 9월 5일, 체로 무리아노, 로열리스트 민병대원의 죽음의 순간(Loyalist Militiaman at the Moment of Death, Cerro Muriano, September 5, 1936)’, 줄여서 ‘쓰러지는 병사(The Falling Soldier)’로 불리는 사진이다.

    저격수에 쓰러지는 민병대원의 모습으로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대표적인 전쟁사진이다. <출처: Public Domain>
    저격수에 쓰러지는 민병대원의 모습으로 로버트 카파가 촬영한 대표적인 전쟁사진이다. <출처: Public Domain>

    1930년대에 특수 훈련을 받은 저격수 부대를 보유한 나라는 소련이 유일했다. 저격수는 지형지물을 잘 이용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게 숨어서 저격하는 기술을 연마한 것은 물론 정규군과 함께 작전하는 능력도 길렀다. 특수전을 강조한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소련 저격수는 정상적인 전투 상황에 초점을 맞춘 훈련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1939년 11월 30일부터 1940년 3월 13일까지 핀란드와 소련 간에 벌어진 겨울전쟁(Winter War)에서는 저격수의 전설이 탄생했다. 당시 핀란드군 저격수 시모 해위해(Simo Häyhä, 1905~2002)는 겨울전쟁 기간 중 502~542명을 사살했다. 1940년 3월 6일 소련군의 야포와 카운터 저격수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부상을 입고 후송되기까지 미처 100일이 되지 않는 기간에 이룬 대기록이다. 당시 전선 전역에 걸쳐 섭씨 영하 40~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계속된 데다 극지의 겨울이라 해가 떠 있는 시간도 짧았음에도 그는 하얀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숨어 눈 덮인 벌판과 숲속에서 하루 5명꼴로 적을 사살했다.

    핀란드 저격수의 전설인 시모 해위해 <출처: Public Domain>
    핀란드 저격수의 전설인 시모 해위해 <출처: Public Domain>

    해위해는 러시아 모신-나강 소총 파생형의 하나로 핀란드에서 제작한 M/28-30 소총을 사용했다. 그는 적에게 발각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소총에 망원조준경을 장착하지 않고 육안으로 저격했다. 필요한 경우 ‘1931년식 수오미 기관단총(Suomi KP/-31)’도 사용했다.

    당시 핀란드군은 기후와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하얀 눈밭에서 흰색의 설상 위장복 차림으로 스키를 타고 소련군 앞에 귀신처럼 불쑥 나타나 이 수오미 기관단총으로 연발사격한 뒤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상 기습 전술을 구사했다. 게다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눈밭 저편에서 저격수가 날리는 총탄까지 더해지자, 소련군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소련군은 해위해를 ‘하얀 죽음[벨라야 스메르트(Белая смерть)]’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뛰어난 저격수의 존재가 적군의 사기까지 떨어뜨린 경우다.

    M/28-30 소총으로 사격자세를 선보이는 해위해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M/28-30 소총으로 사격자세를 선보이는 해위해의 모습 <출처: Public Domain>

    해위해는 1998년 사격 실력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훈련”이라고 짧게 답했다. 당시 핀란드는 저격수를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활용했으며, 이는 오늘날 전 세계에 퍼졌다. 저격수를 적극적으로 사용한 핀란드인의 ‘궁즉통’은 현대전의 교리까지 바꿔놓았다.


    됭케르크 철수 보호한 영국과 프랑스의 저격수들

    제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역에서는 개전 초부터 저격수가 다시 등장해 적극적인 활약을 펼쳤다. 1940년 5월 10일부터 6월 25일까지 벌어진 ‘프랑스 공방전(Battle of France)’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은 각각 적절한 위치에 은폐한 채 단독으로 활동하면서 독일군의 진격을 상당시간 지연시키는 데 기여했다. 전체적으로는 보병, 기갑, 포병 전력의 유기적인 합동전술을 특징으로 하는 독일의 전격전(Blitzkrieg)으로 프랑스가 빠른 속도로 무너졌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프랑스군와 영국군의 저격수들은 치열하고도 효과적인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군과 영국군 저격수들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출처: Public Domain>
    프랑스군과 영국군 저격수들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후퇴하는 아군을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출처: Public Domain>

    저격수들이 맹활약한 대표적인 전투가 ‘됭케르크 전투(Battle of Dunkerque)’ 또는 ‘다이너모 작전(Operation Dynamo)’으로 불리는 연합군 34만 명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이다. 맹렬한 속도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한 독일군은 영국과 가까운 북부 항구도시 됭케르크(Dunkerque)를 눈앞에 두고 사흘간 진격을 멈췄다. 그 틈에 영국군 원정대와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 병력의 상당수가 영국으로 탈출한 수 있었다. 영국인들은 대형 군함은 물론 수많은 민간인 선박까지 자발적으로 나서 병력을 본국으로 데려간 것을 두고 ‘됭케르크 정신’이라 부른다. 당시 독일군의 진격 지연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 저격수들이 됭케르크 주변에서 필사적인 작전으로 독일 보병의 접근을 지연시킨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영국은 저격수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간부 위주로 전문 저격수를 양성했다. <출처: Public Domain>
    영국은 저격수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간부 위주로 전문 저격수를 양성했다. <출처: Public Domain>

    이 사건 이후 영국은 다시 한 번 특수 저격수 부대의 훈련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사격의 달인을 키우는 것은 물론 은폐를 위한 특수 위장복을 착용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변 자연 환경과 구분이 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적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훈련에도 신경을 썼다. 하지만 영국군이 저격수 훈련 대상을 장교와 부사관에 국한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전투 부대에 배치된 저격수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저격수의 전체 전투효율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그라드, 저격수가 흘린 피의 꽃밭

    제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의 활약이 가장 잘 알려진 전투 중 하나가 1942년 8월 23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벌어졌던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다. 이 전투를 계기로 독일은 특수 저격수 훈련을 다시 시작했다. 포격과 공습 등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와 벽돌더미로 가득한 도심부는 소련군 저격수들이 독일 국방군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기에 안성맞춤의 조건이었다. 건물이란 건물은 대부분 무너져 내린 도시의 폐허 속에 숨어 있는 저격수를 찾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련군 저격수들은 어렵지 않게 독일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적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왼쪽). <출처: Public Domain>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영웅적 저격수인 바실리 자이체프(왼쪽). <출처: Public Domain>

    1944년 소련 우표의 모델이 된 여성 저격수 류드밀라 파블리셴코(Lyudmila Pavlichenko) <출처: Public Domain>
    1944년 소련 우표의 모델이 된 여성 저격수 류드밀라 파블리셴코(Lyudmila Pavlichenko) <출처: Public Domain>

    소련군 저격수 가운데 명성을 얻은 인물이 바실리 자이체프(Vasili Záitsev, 1915~1991)다.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1942년 11월 10일부터 12월 17일까지 11명의 저격수를 포함한 225명의 독일군을 사살했다. 자이체프의 활약상은 윌리엄 크레이그(William Craig)가 1973년 펴낸 논픽션 『에너미 앳 더 게이츠: 스탈린그라드 전투(Enemy at the Gates: The Battle for Stalingrad)』에서 잘 소개되어 있다. 데이비드 로빈스(David L. Robbins)가 1999년에 내놓은 역사소설 『워 오브 더 래츠(War of the Rats)』에도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자이체프가 독일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리자 그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된 독일 귀족 출신의 에르빈 쾨니히(Erwin König) 대위와 자이체프 간의 팽팽한 싸움을 그린 내용이 핵심이다. 이 스토리는 2001년 할리우드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의 핵심 플롯이 되었다. 영국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주드 로(Jude Law)가 자이체프 역을 맡았다.


    독일 저격수, 적의 소총도 거리낌 없이 사용

    독일어로 샤르프쉬첸(Scharfschützen)으로 불리는 독일군 저격수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상당수 양성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카르비너 98k(Karabiner 98k, Kar98k)를 쓰다가 나중에 게베어 43(Gewehr 43)으로 장비를 교체했다. 이 장비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 일부 저격수 중에는 소련군으로부터 노획한 망원조준경 장착 모신나강 1891/30(Mosin–Nagant 1891/30) 소총이나 반자동소총인 SVT-38이나 SVT-40, 체코산 마우저(Mauser) 소총을 대신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자극을 받은 독일 국방군은 저격수 훈련을 1942년 새롭게 부활했으며, 1944년까지 31개의 저격수 훈련 중대를 더해 단위부대 당 저격수 수를 비약적으로 늘렸다.

    소련군에게 노획한 SVT-40으로 사격하는 독일군 병사. 이 소총은 독일군 저격수들도 즐겨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소련군에게 노획한 SVT-40으로 사격하는 독일군 병사. 이 소총은 독일군 저격수들도 즐겨 사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독일은 뛰어난 광학기술을 저격수용 망원조준경에 적용했다. 세계적인 광학기업인 차이스(Zeiss)를 비롯한 다양한 광학업체에서 저격수용 망원조준경을 개발해 공급했다. 대전 말기에 독일군은 현대 돌격소총의 선구적인 모델로 평가받는 44년형 돌격소총(StG 44)에 ZG 1229 야시경을 달아 야간저격용으로 활용했다.

    ZG 1229 야시경을 장착해 야간저격용으로 활용된 StG 44 돌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ZG 1229 야시경을 장착해 야간저격용으로 활용된 StG 44 돌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저격수 42만 명을 양성한 소련, 관심이 적었던 미국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모두 42만 8,355명의 저격수를 교육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 가운데 9,534명이 최고 등급을 받았다.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6개월 교육반을 2개 운영하면서 모두 5만 5,000명의 여성 저격수를 양성했는데, 이 가운데 2,000명 이상이 실제로 군에서 저격수로 복무했다. 소련군은 보병 소대나 정찰 소대에 최소한 한 명의 저격수를 배치한 것은 물론, 심지어 포병이나 전차 부대에도 저격수를 배치했다. 일부 저격수는 PTRD 대전차 라이플에 망원조준경을 장착해 사용하기도 했다. 소련군 저격수 영웅 중에는 몽골 주변이나 중앙아시아 유목민 출신의 소수민족도 적지 않다.

    소련은 42만8천여 명의 저격수를 키워냈으며, 그 중 5만5천여 명이 여성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소련은 42만8천여 명의 저격수를 키워냈으며, 그 중 5만5천여 명이 여성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미군도 제2차 세계대전 중 저격수 교육을 실시했으나 기초 교육 수준이었고 전술적인 저격 임무보다 장거리 저격에 치중했다. 저격수는 머리 부분은 200m, 신체 부분은 400m 거리에서 맞힐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으나, 주변 환경 속에 자신의 신체를 은폐하는 훈련은 제대로 받지 못했다. 훈련 내용도 훈련장에 따라 서로 차이가 많았으며, 이로 인해 배출된 저격수의 실력도 들쑥날쑥했다.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이렇게 저격수 교육에 관심을 쏟지 않은 것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Normandy Invasion) 이전까지 미군이 제한적인 지역에만 배치된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로 지목된다. 미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까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등 은폐가 쉽지 않은 건조지대나 산악지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울창한 숲 지대와 관목 지대가 많은 서유럽이나 중부 유럽과는 환경이 사뭇 달랐다.

    미군은 유럽 전선에서 저격수 양성의 필요성에 눈뜨게 되었다. <출처: NARA>
    미군은 유럽 전선에서 저격수 양성의 필요성에 눈뜨게 되었다. <출처: NARA>

    하지만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은 서유럽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잘 훈련된 독일군 저격수를 만나 상당한 피해를 보면서 인식이 바뀌었다. 노르망디에서도 독일군 저격수들은 울창한 관목 속에 숨어 미군 부대를 에워싸고 모든 방향에서 총탄을 날렸다. 미군과 영국군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와 공격하는 것은 물론 1,000m 이상 떨어진 원거리에서도 정확하게 사격하는 독일군 저격수들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격에 대응하는 능력이 부족한 일부 미군 병사들은 총소리가 들리면 대형을 유지하며 그 자리에서 무조건 엎드렸는데, 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독일군 저격수는 이들을 농작물 수확하듯이 한 명씩 차례로 사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독일의 히틀러유겐트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영국군에게 사로잡힌 독일의 히틀러유겐트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일부 독일군 저격수는 전선 후방으로 이동하기도 했으며,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다 미군이나 영국군의 진격으로 후방에 남게 되기도 했다. 이럴 경우 저격수는 계속 위치를 유지하면서 식량과 실탄이 떨어질 때까지 싸우다 항복하기도 했다. 이는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심각한 병력 손실을 입으면서 10대 청소년까지 군대에 동원한 것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급히 동원된 이들은 복잡한 부대 전술 훈련은 충분히 받지 못했지만 히틀러유겐트(Hitlerjugend) 시절부터 사격에는 어느 정도 익숙해 있었다. 이들은 분대 전투나 소대 전투에는 서툴렀지만 전선에서 입수한 버려진 저격용 소총을 들고 단독으로 저격 임무를 수행할 수는 있었다. 제대로 훈련받은 저격수는 몇 발의 치명적인 사격을 한 다음 안전한 장소로 이동해서 계속 임무를 수행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 전술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자신의 안전을 별로 고려하지 않는 어린 병사들은 계속 같은 은폐 장소에서 버티다 죽거나 부상을 입기 일쑤였다. 실탄이 떨어져 항복하는 경우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무모함 때문에 이들은 ‘자살 소년단(Suicide Boys)’으로 불렸다. 그럼에도 독일군 저격수는 연합군의 진격에 상당한 지장을 준 것이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연합군은 독일군의 저격수 교육 교재와 전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선에서도 위협적이었던 저격수

    태평양 전선에서는 일본군이 저격수를 양성해 실전에 투입했다. 동남아시아의 정글과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 일본군 저격수는 미군, 영국군, 호주군 등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일본군 저격수들은 지형지물을 잘 이용하고 온몸을 풀과 나뭇가지로 위장한 뒤 작은 참호 속에 숨어 저격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인내심이 강했으며 은폐 장소에서 장시간 숨어 버티는 데 능했다. 정글 전투는 불과 수백 미터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장거리 저격이 필요한 경우는 드물었다. 일본군 저격수는 97식 저격총(九七式狙撃銃)을 주로 사용했다.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일본군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일본군 저격수 <출처: Public Domain>

    이런 일본군을 상대로 연합군도 저격수들을 운용했는데, 미 해병대가 가장 활발했다. 미 해병대는 M1903 스프링필드(M1903 Springfield)를 저격용 소총으로 사용했다. 미군은 M1C 개런드(M1C Garand)도 저격용으로 사용했다. 유럽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은 소수의 저격수를 운용했는데, 망원조준경이 달린 카르카노 모델 1891(Carcano Model 1891) 소총을 사용했다.

    태평양 전선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저격수를 활발하게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태평양 전선에서 미 해병대는 일본군을 상대로 저격수를 활발하게 운용했다. <출처: Public Domain>


    베트남 전쟁의 하얀 깃털 저격수 신화, 해스콕

    베트남 전쟁에서 활동했던 미 해병대의 저격수 카를로스 해스콕 2세(Carlos Hathcock II, 1942~1999년)는 확인사살만 93건을 기록했는데, 당시에는 저격수와 관측수 외에 장교인 제3자의 확인이 필요해 공식 기록이 이 정도에 숫자에 그쳤을 뿐, 실제로는 300~400명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를로스 해스콕은 확인사살 93건을 기록한 베트남 전쟁 최고의 저격수였다. <출처: Public Domain>
    카를로스 해스콕은 확인사살 93건을 기록한 베트남 전쟁 최고의 저격수였다. <출처: Public Domain>

    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카를로스 해스콕, 1965년 사진 <출처: 미 해병대>
    아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카를로스 해스콕, 1965년 사진 <출처: 미 해병대>

    당시 저격으로 인한 피해가 계속되자, 베트남군은 해스콕에 3만 달러에 상당하는 현상금을 내걸었다. 미군 저격수를 사살할 경우 북베트남군이 통산 8~2,000달러의 포상을 해온 것에 비하면 이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해스콕은 자신을 노리는 베트남 저격수를 오히려 차례로 무력화했다. 베트남군은 해스콕을 ‘두 키치 롱 짱(Du kích Lông Trắng)’, 즉 ‘하얀 깃털의 저격수(White Feather Sniper)’로 부르며 두려워했다. 이는 해스콕이 자신의 군모에 하얀 깃털을 단 것에서 비롯한다. 해스콕을 제거하기 위해 투입된 북베트남군 저격수 부대가 하얀 깃털을 단 미군을 노릴 것이 확실해지자, 미 해병대 저격수들은 모두 자신의 모자에 하얀 깃털을 달아 적을 혼란에 빠뜨렸다. 당시 미 해병대 저격수들의 끈끈한 연대감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스콕은 다낭(Da Nang) 서남 지역의 55고지에서 관측수 존 버크(John Roland Burke)와 함께 어느 북베트남 저격수의 망원경 안으로 총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해 머리에 명중시켰다. 이처럼 양측 저격수가 서로 일직선상에서 서는 것은 드문 경우인데, 이럴 경우 양측 모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해스콕이 북베트남 저격수보다 먼저 기민하게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코브라’로만 알려진 이 북베트남 저격수는 그 전에 이미 수 명의 미 해병을 사살했는데, 해스콕을 무력화하러 온 저격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미군이나 남베트남군 포로를 잔혹하게 고문한 뒤 다량의 출혈로 숨지게 한 것으로 악명 높아 ‘아파치’라는 별명을 얻었던 베트콩 저격소대의 여성 소대장도 해스콕의 총탄에 무력화되었다.

    3박4일간 포복해 목표를 무력화한 일발필살의 신화

    해스콕을 유명하게 한 전과는 1967년 3박4일간의 끈질긴 추적 끝에 북베트남군 고위 장교를 1,500야드(약 1371.6m) 거리에서 저격한 것이다. 이 임무는 그의 베트남 1차 파견이 끝나기 직전에 이뤄졌다. 해스콕은 귀국이 눈앞에 다가왔는데도 어려운 임무를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온몸을 초목과 나뭇잎으로 덮고 풀밭 위를 조금씩 포복으로 이동해 사격 지점으로 향했다. 적은 이러한 그를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마침내 목표물이 시야에 들어오자 그는 단 한 발을 발사해 가슴에 적중시켰다. 목표물은 즉시 무력화되었다.

    해스콕은 무려 3박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여 저격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해스콕은 무려 3박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여 저격을 성공시킨 사례도 있었다. <출처: Public Domain>

    해스콕은 이 3박4일 동안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잠도 거의 자지 못했으며 용변도 옷을 입은 채 해결했다. 배설물을 바지 속에 넣은 채 사격 지점을 향해 포복으로 이동한 일은 저격수의 어려운 임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미 해병대에서 지금도 인용된다. 당시 해스콕은 자신의 상징이던 하얀 깃털도 제거하고 작전에 임했다. 저격 임무의 무게를 보여주는 일화들이다.1966년 베트남에 도착한 해스콕은 미 해병대 1개 소대에 1명 이상의 저격수를 배치하는 저격수 양성 프로그램을 맡은 짐 랜드(Jim Land) 대위에게 발탁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교관으로도 활동했다. 이 훈련 프로그램에서 사용했던 구호는 지금도 미 해병대 저격수 훈련 과정에서 사용된다. 바로 ‘원샷 원킬(One shot, One Kill)’, 즉 ‘일발필살(一發必殺)’이다. 이는 국적을 떠나 전 세계 모든 저격수의 전술 목표다.

    한편 해스콕의 대기록은 이라크 전쟁에서 활약한 네이비실(Navy SEALs) 소속 저격수인 크리스 카일(Chris Kyle) 중사가 확인사살 160건을 기록함으로써 깨졌다. 크리스 카일의 삶과 기록은 비극적인 총기사고로 2013년 사망한 후 그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아메리칸 스나이퍼(American Sniper)>를 통해 소개되었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 중사 <출처: 크리스 카일 페이스북>
    ‘아메리칸 스나이퍼’ 크리스 카일 중사 <출처: 크리스 카일 페이스북>

    테러와의 전쟁으로 계속되는 장거리 저격 기록 갱신

    해스콕은 베트남 전쟁 중 2,286m 떨어진 거리에서 목표물을 명중시켜 최장거리 저격의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35년 동안 깨지지 않다가 2002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캐나다군의 롭 펄롱(Rob Furlong)이 2,430m 거리의 저격을 성공하면서 깨졌다. 롭 펄롱의 대기록은 2009년 11월 영국 육군의 크레이그 해리슨(Craig Harrison)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475m 거리에서 목표물을 무력화하면서 새롭게 갱신되었다. 그러나 이 기록도 2017년 5월 캐나다 특수부대인 JTF-2의 저격수가 이라크에서 3,450m 거리에서 저격에 성공함으로써 또다시 갱신되었다. 저격수의 기술과 전술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위장복인 길리 수트를 입고 L115A1 저격용 소총을 조준하고 있는 영국 해병대 저격수 <출처: (cc)Francis Flinch at wikimedia.org>
    위장복인 길리 수트를 입고 L115A1 저격용 소총을 조준하고 있는 영국 해병대 저격수 <출처: (cc)Francis Flinch at wikimedia.org>

    3.4km 저격에 성공한 맥밀란(McMillan) TAC-50 저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3.4km 저격에 성공한 맥밀란(McMillan) TAC-50 저격소총 <출처: Public Domain>


    저자 소개

    채수윤
    영국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영국과 중국을 오가며 현대 중국학을 연구했다. 러시아와 발칸 지역을 비롯한 동유럽의 분쟁사와 대외 관계사, 서유럽 국가 지도자들의 위기관리 리더십, 중국 현대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해왔다. 중세와 근대, 현대의 분쟁사와 무기체계의 관계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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