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오키나와 전투 [1]
자살 특공에 나선 가미카제와 전함 야마토 (1945)
  • 김창원
  • 입력 : 2015.07.03 16:23
    상륙 중인 미군. 1945년 4월13일.
    상륙 중인 미군. 1945년 4월13일.

    전투의 배경


    오키나와 전투는 1945년 4월1일에 시작하여 81일 간이나 계속된 태평양 최대의 전투로서 작은 이오섬(유황도)을 빼놓고는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전투라는 의미도 크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자살 특공대가 대거 출현했다는 점과 오키나와 주민의 3분의 1이 비극적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점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1942년 8월 과달카날 섬 공격으로 시작된 연합군의 반격은 점점 북상하며 일본의 마지막 숨통을 조여가고 있었다. 1945년 새해가 되자 오키나와 섬을 공격하여 항공 및 보급 기지를 확보한 후 일본 본토를 공략한다는 계획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오키나와 공략 함대 총 사령관은 5함대 사령관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으로서 그의 휘하에는 수송선 450척을 포함하여 무려1,500 척의 함선이 있었다. 전투 함대에는 77척의 항공모함과 9척의 전함이 편성되어 있어서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주력 전투 부대는 항모 16척을 중심으로 한 제 58 기동 부대(임무부대)였다.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미군의 육상 부대는 신규 편성된 제10군이었고 사령관은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이었다. 병력은 육군 24군단 중심으로 한 5개 사단 10만2천 명, 해병대 3개 사단 8만8천 명, 총 19만 명에 해군 지원 요원 1만8천 명이 추가로 편성되었다.
     


    영국 항모 부대의 참가


    오키나와 공략에 영연방 해군의 항모 부대가 참가했다. 영국과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의 다국적 함대지만 이 다국적 함대를 주도적으로 이끈 것은 영국 해군 항모 부대였다. 대규모 영국 항모 부대가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것은 전쟁사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눈에 띈다.

    오키나와 공략전에 참가한 영국 항모 HMS 임페커블
    오키나와 공략전에 참가한 영국 항모 HMS 임페커블

    영국 함대는 약 50척으로서 그중 주력은 4척의 정규 항모를 포함한 17척의 항모였다. 영국 항모는 항공 공격에 대비하여 두꺼운 방탄 시멘트 갑판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항모들에 비해 적재기가 많지 않았다. (영국 항모 부대는 8회에 걸쳐 가미카제 특공기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 장갑 갑판 덕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반면 가연성 목재 갑판을 유지한 미 항모들은 일본 특공기 공격에 취약했다.)


    그래도 영국 항모가 보유한 함재기 숫자는 450기에 달했으며 이는 연합 함대 항공 전력의 1/3 수준이었다.


    영국 해군의 함재기들은 미국제 어벤저, 그리고 극동에 처음 얼굴을 보이는 영국산 시파이어와 파이어플라이 들이었다. 영국 항모 부대는 공격 초기 사키시마의 비행장 섬멸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료했고 후에는 가미카제 공습으로부터 함대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일본군의 방어 준비


    연합군 침공 당시 오키나와 방어에 나선 일본군은 6만 7천 명이었다. 앞서 밝혔듯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영토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기 때문에 일본은 문자 그대로 사활을 건다는 각오로 덤벼들었다.

    일본군 총사령관 우시지마 중장
    일본군 총사령관 우시지마 중장

    사령관은 우시지마 미스루 중장, 참모장은 조 이사무 중장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의 6-10개 사단이 동원될 것이며 보유한 무기의 질과 양에서 일본군의 5~6배의 화력을 발휘할 것이라 추측하였다.


    일본군은 타라와 전투와 사이판 섬의 전투에서처럼 전통적인 반상륙 작전인 수변격멸(水邊擊滅) 작전을 시도했다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큰 실패를 맛보고서야 이 전통 작전을 포기했다. 수변격멸이란 적군이 상륙할 때 가장 취약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해변에서 격멸해야 한다는 원칙 하에 전개하는 작전이다.


    그 후 일본군은 해변 대신 섬 내부의 험준한 요새 지대로 미군을 유인하여 진지전으로 대응하는 지구전을 채택하였다. 일본군은 페레이우 섬과 유황도에서 미군을 내륙으로 유인하여 타격하는 전략을 시도해본 뒤 충분히 효과가 있다고 판단, 태평양 전투 중 최대의 전투가 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이 전략을 활용하였다.


    어차피 고립되어 전멸할 병력들이니 연합국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고 염전의식(厭戰意識)을 조성해서 강화 때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에 서자는 비정한 전략이기도 했다.


    일본군 주력인 32 군의 편성은 9사단, 24사단, 62사단과 44독립 혼성 여단이었으나9사단이 오키나와 전투 발발 전 타이완으로 이동하게 되어 오키나와 방어력이 약해졌다. 32군의 육군 병력 외에 9,000명의 일본 해군 육전대가 오로쿠 해군 기지 일대에 방어선을 치고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사이판 전투에서도 민간인 희생의 사례가 다수 있었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비슷한 비극을 예고하는 민간인 부대가 있었다. 오키나와 현지에서 징집한 39,000명의 현지민 부대와 비상시라는 이유로 학업을 중단 당한 1,500명의 학생들로 긴급 편성한 의용대도 있었다. 어린 남학생들의 부대 이름은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라는 엄청난 명칭이었지만 비극의 길로 들어설 어린 소년들의 부대 이름으로서는 가당치 않은 것이었다.


    일본 군부는 약하고 어린 여학생들도 그냥 두지 않았었다. 600명의 여고생들이 징집되어 히메유리(姬百合) 학도대라는 간호 부대를 구성했다. 이 대원들의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군의 강요로 자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이외 시라히메(白梅)학도대라는 여학생 부대도 있었으나 그 운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오키나와에는 히메유리 학도대의 전몰을 추모하는 비가 서있는 공원이 있다.


    민병대 성격의 현지민 부대는 주로 노무자 일을 했으나 일부 조직은 총기가 지급되어 기본적인 군사 훈련까지 받은 부대로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 작전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해군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가 최대의 활동을 한 전투였다. 가미카제 특공대는 그 전 해에 있었던 레이테 해전에서 최초로 등장했는데, 당시 특공대 규모는 작았었다.


    하지만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가미카제 특공대를 운용했다. 일본 해군과 육군 항공대는 오키나와 상륙 작전이 수행되고 있던 1945년 4월 1일부터 같은 해 5월 25일까지 무려 1,500기의 자살 특공기가 동원된 7번의 대규모 특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좌) 가미카제 특공기에 명중 당한 미 항모 에섹스 함 (우) 대화재가 일어난 미 항모 벙커 힐
    (좌) 가미카제 특공기에 명중 당한 미 항모 에섹스 함 (우) 대화재가 일어난 미 항모 벙커 힐

    상륙 작전 초기 상륙 함대에 가하는 일본의 가미카제 공격은 경미했다. 그러나 4월 6일 규슈에서는 약 400기의 자살 특공기가 공격을 감행했다. 작전이 계속된 4월 내내 일본군의 자살 특공대는 크고 작은 공격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이들 특공기들은 주로 규슈에서 출격했지만 소수는 타이완에서 출격한 것들이었다


    미군은 작전을 바꾸어 가미카제 출격지인 규슈의 비행 기지에 집중적인 공격을 가해 철저한 원천 봉쇄 작전을 폈던 관계로 후반기에는 가미카제 특공대는 뜻대로 활동하지 못했다.


    일본 가미카제 특공대의 공격을 받고 20척의 미군 함선이 격침되었고 157 척이 파괴되었다.


    가미가제 작전에 동원된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으로도 일본은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을 막지 못했다. 이 기간 일본군이 잃은 항공기들은 1,100기나 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출격해서 전사한 육군 항공대 소속 특공 조종사 중 (적어도) 11명이 한국인이었다.



    자살 특공에 나선 전함 야마토


    항공기 자살 특공대에 이어 수상 함대에 의한 자살 특공 작전이 가해졌다. 항공기들의 대규모 자살 특공도 역사에 없던 미증유의 기획이지만 수상 함대의 자살 특공은 정상적이라 보기 어려웠다. 일본은 최대 전함 야마토를 세계 해전사에 전무후무한 자살 특공에 내보냈다.


    7만 톤 크기의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를 미군 상륙 해안까지 돌진하여 해변에 함을 좌초시키고 그 거포로 미국 함대와 상륙한 미군들을 섬멸하라는 무리한 명령이었는데 함대 사령관 이토오 세이치 중장을 비롯한 함대의 중요 간부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일본 해군 수뇌부는 막무가내로 작전을 밀어붙였다.

    야마토의 격침
    야마토의 격침

    야마토는 결국 출동했지만 오키나와 근처에 가보지도 못하고 300여 미군기의 공격을 받아 호위함 다섯 척과 함께 격침되었다. (일본은 이 무리한 실패 작전에 덴코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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