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사
사이판 전투 [3]
민간인들의 비극적인 죽음 (1944)
  • 김창원
  • 입력 : 2015.07.03 14:49

    미군은 전투 후 포로 수용소를 설치하여 먼저 민간인 1천 명 정도를 수용했다. 이들에게는 하루 세 끼의 식사와 적절한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다. 이후 비전투원 1만5천 명을 더 수용했는데 일본인이 1만 명, 조선인 1300명, 이외 3천 명 정도로 구성되었던 수감 인원으로 계산해보면 일본인 민간인은 1만 명 정도가 전투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굴에서 주민의 아기를 구출해내는 미해병
    동굴에서 주민의 아기를 구출해내는 미해병

    일본 민간인과 미군이 대거 접촉하게 된 것은 사이판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놀랐는데 일본 민간인들은 강간과 살육을 저지를 줄 알았던 미군이 의외로 친절하고 인간적인 처우를 해주는 것에 놀랐고 미군은 격렬히 저항하다 자결하곤 하는 일본군에 비해 민간인들은 온순하고 순종적인 것에 놀랐다.


    사이판 전투는 살상력 강한 무기로 서로를 육박 공격하는 근접전이 많아서 군인들과 행동을 같이 하던 일본인 민간인들의 피해가 특히 컸다. 특히 동굴이나 협곡으로 피신한 민간인을 일본군과 구분하기 힘들었던 탓에 일본군 토벌 방식대로 화염 방사기나 휘발유가 살포되기도 하고 폭발물이 투척되었기에 도처에서 민간인이 살상되었다.


    더 비극적이었던 죽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칙명으로 인한 것이었다. 사이판의 일본인들이 미군에 집단 투항해 일본 군국주의를 비난하는 미군의 라디오 심리전에 앞장설 가능성을 염려한 히로히토는 1944년 6월 말, 사이판 주민들에게 자살을 권고하는 칙명을 내린 것이다. 자살한 주민들은 사후 전사자와 같은 예우와 명예를 누릴 것이라고 말했다.


    칙명을 전달해야 했던 총리대신 도조 히데키는 자살 칙명의 냉혹함에 놀라 발표하지 않고 보류하였다. 그 자신도 일본 군인에게 살아서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하지 말고 최악의 경우에는 자결하라는 전진훈을 포고했던 전적이 있었지만 민간을 상대로 한 천황의 칙명은 너무 잔인했다.


    그러나 보류 여부와 상관없이 히로히토의 자살 특명은 방송을 거쳐 사이판의 군 지휘부에 전달되고 말았다. 왕이 이런 명령을 했을 리 없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선명한 옥새가 찍힌 명령서가 진실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반자이 절벽에서 투신하는 일본 민간인
    반자이 절벽에서 투신하는 일본 민간인

    이로 인해 전투의 마지막 순간 약 일천 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자결하였다. 상당수가 사이판의 ‘자살절벽’이나 ‘만세절벽(반자이절벽)’에서 뛰어내렸다. 많은 가족들이 집단으로 투신하는 모습은 끔찍하고도 비극적이었다. 이들은 히로히토가 약속한 내세의 영광스런 영생을 믿으며 목숨을 끊었다.


    민간인 구출에 힘쓴 가이 가발돈. 그의 활약은 1960년에 영화로 소개되었는데 ‘전장이여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다.
    민간인 구출에 힘쓴 가이 가발돈. 그의 활약은 1960년에 영화로 소개되었는데 ‘전장이여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상영되기도 하였다.

    한편 비극적인 전쟁터이긴 하였으나 그 가운데 민간인 구출에 크게 활약한 영웅이 탄생했다. 바로 가이 가발돈 일병이다. 그는 멕시코계 미국인이었으나 일본계 이민자인 나가노 가문에서 양육된 덕분에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능숙했다. 미 해병대에 입대하여 사이판에 오게 된 그는 동굴 속에 숨은 일본인 민간인들과 병사들을 설득해 1500명의 생명을 구했다. 이 공로로 해군 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전투는 공식적으로 7월 9일부로 종식되었지만 잔존한 일본 군인들이 게릴라식 저항은 지속됐다. 오바 사카에 대위가 이끄는 47명의 대원은 512일 간이나 미군을 피해 다니다가 일본이 공식 항복한 1945년 12월 1일에야 미군에게 항복하였다.


    전후에도 게릴라전을 하며 버티던 오바의 부대. 그의 활동은 일본에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전후에도 게릴라전을 하며 버티던 오바의 부대. 그의 활동은 일본에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미군이 사이판을 확보함으로써 일본 본토가 B-29의 폭격 거리 내에 놓이게 되었다. 사이판을 완전히 평정한 후 미군은 100기의 폭격기로 필리핀과 오키나와, 그리고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한다.


    점령 뒤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B-29의 기지가 된 아슬리토 비행장
    점령 뒤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한 B-29의 기지가 된 아슬리토 비행장

    사이판을 상실한 일본 군부와 고위층은 깊은 충격에 빠졌다. 먼 남쪽 나라 이야기로 여겼던 미군의 포탄공격이 이제는 바로 문 앞까지 온 것이다. 이에 총리 대신에 육군 대신, 육군 참모총장까지 겸하며 일본을 전쟁의 수렁으로 몰아간 도조 히데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


    도조를 공격하는 데 기시 노부스케가 앞장서는데, 그는 현 일본수상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로 당시 군수 차관이었다. 히로히토는 도조에게 전쟁의 진두지휘를 계속 맡기려 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에 못 이겨 도조의 사퇴서를 수리하였다. 도조는 7월 18일 모든 직책에서 물러나 칩거하다가 전후 미군 헌병에게 체포되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이때부터 어전 회의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매일 임석해서 전쟁 지도에 깊숙이 간여하던 일왕은 대본영의 권유에 의해 점차 전쟁 지도에서 발을 빼갔다. 패색이 짙어지는 가운데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여 천황을 전쟁과 관계없는 인물도 만들어 놓자는 대본영의 방침에 따라서였다.


    김창원 | 전사연구가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시라큐스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했다. 장교로 군 복무, 기갑부대 전차 소대장을 지냈다. ‘울프 독’이라는 필명으로 전사와 역사를 다룬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국방부 정책·정보 블로그(N.A.R.A.)에 기고하고 있으며, 저서로 [공격 마케팅]이 있다


    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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