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84년 미군이 무려 70여 년 넘게 사용하여 온 콜트 M1911A1을 교체할 차세대 제식 권총 사업을 시작했을 때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최종 후보작들은 놀랍게도 미국제 권총이 아니었다. 전통의 총기 강국인 미국이, 그것도 자국군이 사용할 총기 사업에서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애국심에만 호소할 수 없었을 만큼 외국의 경쟁작들이 뛰어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쟁을 벌인 최종 후보작은 스위스의 SIG와 독일의 자우어앤손(J.P. Sauer&Sohn)의 합작회사인 지그-자우어(SIG-Sauer)의 P226과 이탈리아 베레타(Beretta)사의 M92F였다. 스위스나 독일은 전통적인 기계 공업의 강국이니 품질은 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무기에 관해 그다지 명함을 내밀지 못하는 이탈리아 제 권총이 끝까지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은 어쩌면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여담으로 이탈리아 제 무기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은 사실 편견이다. 모든 무기가 최고는 아니지만 현재 서방 전투함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76mm 함포를 제작하는 오토메랄라(OTO Melara)의 예에서 보듯이 나름대로 무기 제작에 실력이 있는 나라다. 다만 지난 20세기에 있었던 여러 전쟁에서 이탈리아군이 워낙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다 보니 대중에게는 무기마저 성능이 나쁜 것으로 도매 급으로 오해 받는 경향이 많을 뿐이다.

어쨌든 최종 후보작들은 실험 결과 권총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에서 흠을 발견하기 힘들만큼 훌륭했다. P226은 각종 오염물질이 가득한 환경에서도 탁월한 성능을 보여주었고 튼튼하게 제작되어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최종 승자는 M92F가 되었다. 압도적으로 월등할 정도는 아니지만 P226의 성능이 앞선 것으로 파악되었음에도 M92F가 승자가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가격 때문이었다.

승패를 결정한  요소

군에서 사용하는 무기는 무엇보다 성능이 좋아야 한다. 특히 양으로 질적 격차를 극복하기 힘든 현대에 와서 성능은 승리를 담보하는 가장 중요한 당연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좋은 성능은 비싼 가격과 거의 동일시되는 명제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현재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전투기를 제압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F-22의 단종 이유 중 하나가 너무 비싼 조달 가격이다.

군이 보유하는 무기는 항상 전쟁이라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운용하지만 오로지 소모해 버리기만 하는 재화다. 바로 이 점이 모든 무기를 최고가의 고성능으로만 갖출 수 없다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전시라면 경제적 요소는 부차적이지만 국민의 혈세를 생각한다면 항상 비용을 절감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성능이 승패를 결정할 만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저렴한 무기를 도입하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권총처럼 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무기라면 도입 가격은 채택을 고려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현재 미국 민수 시장에서 P226이 M92F보다 대략 1.5~2배 정도 비싼 가격으로 거래될 정도인데, 결국 P226은 간발의 차로 가장 커다란 납품 시장을 놓치고 말았다. 여담으로 미군은 가격을 좀 더 낮추면 채택하겠다고 언질을 주었는데 지그-자우어가 거부하여 무산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즉 성능에서는 P226이 더 경쟁력이 있었던 것이다.

P226이 고가인 이유는 지그-자우어의 경영 방식 때문이다. 사실 구조나 부품 등을 고려할 때 가격을 낮출 여지는 많았고, 미군용 제식 권총처럼 커다란 신규 시장을 개척하려고 생각한다면 단가 인하도 충분히 고려해야 했다. 그런데 지그-자우어는 생산성이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한데다가 합작사다 보니 의사결정도 느려서 순발력을 요구하는 국제 입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명성

이처럼 아쉬움 속에 고배를 마신 비운의 주인공 P226은 이전부터 좋은 권총으로 명성이 자자한 P220을 기반으로 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능을 개량했다고 보는 것이 맞는데, 그런 점에서 따진다면 P226은 최종형이 아니라 이후 P228, P229로 거듭 진화한 지그-자우어 시리즈의 중간역이라 할 수 있다. 최초 모델이 워낙 잘 만들어져서 이후 등장한 후속 시리즈들도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1975년 제작된 P220은 스위스 군경용으로 처음 납품되었고 이후 일본과 덴마크에도 수출하면서 서서히 이름을 알렸다. 자동권총 대부분이 사용하는 쇼트리코일 방식으로 작동하므로 기계적으로 특별히 새로운 것은 없지만, 물이나 흙탕물 안에 잠긴 후에도 작동할 수 있을 만큼 신뢰성이 좋고 내구성이 뛰어났다. 덕분에 민간 시장에서도 호평을 받아 기본인 9mm 파라블럼탄을 사용하는 모델 외에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어 팔려 나갔다.

외관으로 구분이 힘들만큼 P220과 유사한 P226은 이러한 전작의 장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가장 큰 차이라면 복열식 탄창을 채택하여 9mm 파라블럼탄 기준으로 P220은 9+1발을 장탄할 수 있는데 반해 장탄량이 15+1발로 대폭 늘어났다는 점이다. 반면 일부 부품을 플라스틱 등의 신소재를 사용하여 대체 대상이었던 콜트 M1911A1에 비해 무게는 가벼웠지만 반동이 적고 정확도도 좋았다.

P226의 특징 중 하나는 ‘디코킹 레버(Decocking Lever)’다. 탄을 약실에 넣어둔 상태에서 오발을 막으려면 해머를 손으로 잡고 방아쇠를 당긴 후 천천히 원 위치하여야 하는데 이때 실수로 해머를 놓치면 탄환이 발사될 수도 있다. 디코킹 레버는 이를 차단하는 장치다. 총을 피복이나 홀더에 수납하면 뽑을 때 해머가 걸리는 경우가 있지만 디코킹 하면 이를 방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P226은 사복 경찰이나 경호원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다.

특수 목적에 최적화한 권총

하지만 그보다 강력한 내구성은 미군이 M92F을 제식 권총으로 채택했으면서도 계속 뒤를 돌아보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일선에서 M92F가 충격에 쉽게 파손된다고 불평이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네이비 실(Navy SEAL)이나 SAS 같은 특수부대에서 P226을 사용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격도 비싸고 이처럼 특정 부대에서 주로 애용하다 보니 P226은 특수부대나 비밀요원이 사용하는 고가의 장비처럼 인식되었다.

이후 등장한 후속 모델들도 P226처럼 특수목적용으로 선호되었다. 1989년 제작된 P228은 P226의 컴팩트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크기와 무게가 좀 더 작아졌지만 성능과 장탄량이 동일하여 미군에서도 M11이라는 번호를 부여하고 제식 권총으로 채용했다. 비록 주력 권총이 아니지만 뒤늦게나마 한풀이를 할 수 있었고, 이러한 명성에 힘입어 미국의 여러 기관과 영국,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군경에서 사용되고 있다.

P228은 탄 종류에 따라 다양한 세부 모델이 제작되었던 이전의 시리즈와 달리 9mm 파라블럼탄을 사용하는 모델만 만들어졌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파라블럼탄을 사용하는 M9를 미국의 제식 권총으로 사용하게 된 것과 관련이 많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이 워낙 민간에서 인기가 좋아 다양한 구경으로 제작하여 달라는 요구가 빗발쳐 .357 SIG와 .40 S&W 탄환을 쓸 수 있는 P229가 출시되면서 2005년 단종되었다.

P226과 그 시리즈들은 좋은 성능 못지않은 비싼 가격 때문에 흔히 권총계의 롤렉스(Rolex)라 불렸다. 얼핏 생각하면 ‘명품’이라는 단어가 떠오르지만 사실 총의 세계에서는 고성능에 고가보다 AK-47처럼 적절한 가격에 괜찮은 품질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최고다. 하지만 결국 살상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무기에게 ‘명품’이나 ‘롤렉스’처럼 그럴 듯한 명칭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P226이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제원
 탄약 9×19mm 파라블럼탄 외 / 급탄 15발들이 탈착식 탄창 + 약실에 추가 1발 / 작동방식 리코일 방식 / 전장 196mm / 중량 964g

글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