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10.09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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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의세계]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T-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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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55(T-54/55)전차.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이다. <출처: (cc) Eric Kilby at Frickr>

상업적인 측면에서 베스트셀러라면 일단 양적으로 많이 팔린 것을 의미한다. 품질이 최고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설픈 품질로 많이 팔릴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베스트셀러라는 뜻에는 품질이 최고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소비자들에게 충분히 용인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지녔다고 보아도 된다. 이것은 무기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무기도 성능이 좋을수록 비싸지만 그렇다고 군대가 비싼 무기로만 무장할 수는 없다.


많이 만들면 가격이 낮아지지만 무기는 그렇게 할 수도 없다. 한 세기에 걸쳐 사용되는 M2 중기관총 같은 예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무기는 차세대 무기가 등장하면 순식간 질적으로 열세를 보여 쉽게 도태된다. 한 번도 실전에 사용되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도 많고 언제 있을지도 모르는 전시를 위해 적정 수준으로만 보유가 이루어지다 보니 생산자 입장에서는 단가를 낮추기 위해 무턱대고 생산량을 늘리기도 곤란하다.


이처럼 무기의 도입은 여러 변수가 작용되는 복잡한 행위인데 이런 조건에서 베스트셀러의 반열 올랐다면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상전의 왕자인 전차도 베스트셀러가 있다. 상식적으로 사상 최대의 전쟁터였던 제2차 대전 중에 무지막지하게 사용 된 독일의 4호전차, 소련의 T-34, 미국의 M4 전차 중 하나가 최대의 생산량을 보였을 것 같은데, 전차의 베스트셀러는 정작 따로 있다. 바로 소련의 T-55다.


 

(좌)소련의 전차 개발사를 한 눈에 엿볼 수 있는 T-44. 한 눈에 T-34/85 포탑을 T-55 차체에 얹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T-44에 적용된 차체는 이후 소련 T계열 전차들의 기본 형태가 된다.
(우)소련의 IS-3 중(重)전차

새로운 시대를 연결한 중간자


제2차 대전 당시에 전차의 세계를 양분한 나라는 독일과 소련이었다. 연합국의 공장을 자임한 미국도 엄청난 물량의 전차를 제작하여 전선에 공급하였지만 독일이나 소련의 전차에 비하여 질이 떨어졌다. 특히 치열하게 싸웠던 독일도 감탄한 T-34는 좋은 전차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겸비한 걸작이었지만, 소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새로운 전차의 개발에 더욱 매진하였다. 독일이 계속 다양한 기갑장비를 전선에 투입하자 T-34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1944년부터 양산에 들어간 신형 전차가 T-44다. 새롭게 개발된 차체를 채택하여 전면의 방어력을 높임과 동시에 기능이 향상된 엔진과 토션바(Torsion Bar)식 현가장치를 채택하여 승차감과 주행 능력을 향상하였다. 외형적으로 1, 2번 보기륜(Road Wheel) 사이의 간격이 넓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구조는 T-55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T-44는 T-34 후기형인 85식의 포탑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때문에 T-55의 차체에 T-34 포탑을 얹은 모양인데 그런 외형만으로도 T-44가 소련 전차 개발사에서 T-34와 T-55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T-44는 당시로는 소량이라 할 수 있는 약 1,800여 대의 생산을 끝으로 단종되었다. 새로운 차체에 걸 맞는 보다 강한 화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전쟁 말기에 미국이 운용한 M26의 90mm 주포나 독일 티거 전차의 88mm 주포에 비하면 T-44의 화력은 약하였다. 특히 종전이 다가오면서 미국이 소련의 새로운 적대 세력이 될 것이 확실시 되자 승리의 와중에 있으면서도 결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물론 소련도 122mm 주포를 사용하는 IS 전차를 운용하였지만 사실 화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기동력을 비롯한 다른 많은 부분을 포기하다시피 한 중(重, heavy)전차였다.


 

방어력을 늘리려 포탑을 둥글게 만들었지만 아직 일부 각진 형태가 많이 남아있는 T-54 원형. 제2차 대전 말기에 등장한 T-54는 알려진 성능만으로 상대를 겁먹게 만들었다. <출처: (cc) Nucl0id at wikimedia.org>

새로운 시대를 선도한 디자인


사실 엄밀히 말해 T-34나 T-44가 아닌 IS가 M26이나 티거의 맞상대였으므로 소련이 새로운 전차 개발에 그다지 조바심 낼 필요는 없었다. 충분한 성능의 전차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지만 독소전쟁 동안 당한 피해가 워낙 혹독하여 소련은 웬만해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중전차와 별개로 중형 전차의 화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연구를 거듭하였고 그 결과물이 제2차 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3월에 탄생한 T-54였다.


T-44의 차체에 SU-100 자주포에 사용하던 100mm 구경의 D-10을 탑재하여 화력을 대폭 향상시켰다. 각진 형태의 이전 포탑과 달리 피탄 면적을 최소화한 낮고 둥근 포탑 때문에 전면의 장갑 수준은 200mm에 이르렀다. 이러한 T-54 포탑은 이후 등장한 소련 전차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전광석화처럼 개발된 T-54는 소련의 전차 개발 사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소련은 제2차 대전 이후에도 한동안 중전차와 중형(中型)전차를 병행 보유하는 방식을 고수하였지만, 가볍고 기동력이 좋지만 오히려 방어력은 증대되고 중전차 못지않게 화력이 강한 T-54가 등장하자 이를 주력 전차, 이른바 MBT(Main Battle Tank)로 정하기로 방침이 바뀌었다. 덕분에 IS로 대표되는 중전차는 도태되었고 이후 소련의 전차는 이른바 T계열로 많이 알려지는 중형 전차들이 기갑부대의 주역이 되었다.


T-54의 성능에 만족한 소련 당국은 1946년부터 본격 양산에 들어갔다. 비록 실전에서의 결과는 상이하게 나왔지만 당장 표면적으로 T-54에 맞설 수 있는 전차가 없었던 미국은 경악하였다. 특히 어떤 상대도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 같은 100mm 구경의 주포는 가히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은 기존 M26을 개량하여 1949년에 제식화 한 M46을 대항마로 내세웠지만 10톤이나 무거운 중전차였다.


 

대공기관총이 거치되지 않았던 초기형 T-55

경이적인 생산력


미국의 대응은 소련의 즉각 응전을 불러왔다. T-54의 개량에 나서 출력이 강화된 엔진을 장착하고 연료 탑재량을 늘려 속도와 항속 거리를 증가시켰다. 포탑을 편리한 바스켓 구조로 바꾸고 핵전쟁에 대비하여 양압식 NBC방호 장치를 장착하였다. 이렇게 성능을 업그레이드 시킨 개량형 전차를 1958년부터 양산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T-55다. 기본적인 하드웨어의 차이가 크지 않아 T-54/55 또는 두 기종을 합하여 흔히 T-55로 부른다.


T-55는 전차가 갖추어야 할 3대요소인 화력, 방어력 및 기동력 모두에서 당대 최고라고 자타가 공인하였을 정도였고 더구나 생산비도 저렴하였다. 장기간 지속된 냉전이라는 시대상황은 전쟁 당시에 등장한 그 어떤 전차들보다 T-55가 더 많이 생산된 전차가 되도록 만들었다. 최소 8만 6천대에서 최대 10만대 정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생산량을 모르는 이유는 워낙 카피된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중국이 복제 생산한 59식 전차로 북한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수출되기도 하였다.

정식 면허 생산한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뿐만 아니라 59식이라는 이름으로 데드카피한 중국도 T-55를 대량 생산하였다. 이렇게 소련 이외에서 생산된 T-55가 전체 생산량의 절반 정도로 추정되다 보니 당연히 파생형도 많아서 일일이 확인 할 수 없을 정도다. T-55는 세계 30여 개국에서 운용하였고 현재도 일부 사용 중인데, 북한도 주요 사용국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안보를 심각하게 위협하던 전력이었다.


냉전의 개막과 동시에 탄생한 T-55는 1세대전차이기 때문에 현재는 대부분이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지구상에서 3만대이상이 현역으로 돌아다니고 있는 것으로 추정 될 만큼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역사상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한 베스트셀러다 보니 당연히 T-55는 실전 경험이 많은 전차이기도 하다. 그런데 선전되거나 단지 알려진 내용과 달리 정작 실전에서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좌)1991년 걸프전 당시 격파된 이라크 군의 T-55
(우)1997년 보스니아 전쟁에서 파괴된 T-55

기대에 미치지 못한 활약


예를 들어 6일 전쟁에서 비록 이스라엘이 대폭 개량하였지만 전 세대 전차라 할 수 있는 M4에게도 밀렸다. 아랍 측에 제공된 T-55가 다운그레이드 형이고 훈련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성능이 기대에 못 미쳤다. 광학 조준기와 포신 안정 장치의 성능이 나빠 1,000m 이내에서나 대등한 교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포의 구경만 컸지 탄약의 기술력이 부족하여 생각만큼 화력이 강하지 않았다.


더불어 방어력을 너무 고려하다 보니 승무원 탑승 구역이 작아 전투를 수행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았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당황한 소련이 부랴부랴 후속 T-62를 만들었지만 서방 전차에 우위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사실 소련의 전차는 T-62까지 제2차 대전 당시에 완성된 기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전혀 새로운 개념의 전차는 T-64부터 였는데 이마저도 개발에 난항을 겪어 T-62를 개량한 T-72가 먼저 등장하였을 정도였다.


오히려 최강의 T-55는 서방측 기술이 접목되면서 탄생하였다. 중동전 당시 아랍 국가들로부터 노획한 T-55를 이스라엘이 개량하여 제식화 한 것이 바로 타이란(Tiran)-4다. 서방의 주력인 105mm 전차포를 탑재하고, 장갑과 통신 장비를 개량하여 이스라엘 군이 사용하였고 대외 수출되기까지 하였다. 일부는 아크자리트(Achzarit) 병력수송장갑차(APC)로 개조되어 현재까지도 요긴하게 사용 중이다.


 

(좌)증가 장갑을 장착하여 방어력을 향상시킨 세르비아군 소속의 T-55H <출처: (cc) Marko_M at Wikimedia.org>
(우)이스라엘이 노획하여 개조한 타이란-4 전차 <출처: (cc) Bukvoed at Wikimedia.org>

비록 T-55는 전차 개발 역사의 새로운 사조인 MBT 시대를 개막한 주요 당사자라는 영예를 얻었고 상대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지만 예상보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단지 물량으로 우세를 달성하려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말미암아 역사상 최대 생산량을 기록한 전차라는 타이틀을 차지하였을 뿐이었다. 결국 베스트셀러가 많이는 팔렸지만 최고의 품질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묵언을 입증시킨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제원
중량 36톤 / 전장 6.45m / 전폭 3.37m / 전고 2.40m / 승무원 4명 / D-10T 100mm 전차포 / 12.7mm 중기관총 1정, 7.62mm 기관총 1정 / 항속거리 600km / 최대속도 48km/h


 

남도현 / 군사저술가,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히틀러의 장군들》 등 군사 관련 서적 저술 http://blog.naver.com/xqon1.do
자료제공 유용원의 군사세계 http://bemil.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