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천호동에 있는 어느 영화관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를 보았습니다.
제가 제대로 된 극장에서 국산 영화를 본 것은 '팔도강산' 이후에 처음인 것 같으니...^.^...그동안 제가 얼마나 '국산' 영화를 경원하고 외국영화를 좋아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습니다.(반성)

와~~ 우리영화도 이젠 대단하더군요. 자랑스럽습니다.
세트나 촬영기법이나 화면이나 동원된 인력이나 무엇하나 나무랄데가 없더군요.
예전에 홍세미의 영화 "춘향전"에선 포졸들이 육모 방맹이 대신에 경찰 곤봉을 들고 뛰어다니고 김진규의 "이순신"에서는 전봇대가 등장하는가하면 "임꺽정" 에서는 머리위로 마이크가 날아다니더니. ..이제는 디테일을 챙기는 것도 세계시장에 당당히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촬영기법이나 소품 챙기기 등등에 대한 이야기부터 늘어놓죠?


<과도한 핸드헬드방식의 사용>
전투씬을 보는 나에겐 두 사람의 감독이 떠올랐는데....한 사람은 70년대의 액션의 대가 '샘 페킨파' 이고 또 한 사람은 라이언 일병의 '스필버그' 입니다.

샘 페킨파는 70년대에 '철십자 훈장' 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러시아와 독일군대의 전투를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 영화의 주제가 독일 최고의 철십자 훈장을 받으려는 장교(맥시밀리언 셀)가 주변의 병사들을 몰락시키는 스토리라 '태극무공훈장'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무너져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을 연상시키지요.

전투장면을 보면서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을 떠올린 이유는 이 영화의 전투씬에서 스필버그가 오마하 해변에서 그 진가를 발휘시킨 핸드헬드방식을 너무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메라가 너무 급격하고 쉬임없이 움직임으로서 긴박감은 자아내고 있으나 그 반대급부로서 병사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공포감의 묘사에 소홀한 감이 있습니다.
도입부의 전투장면이나 후반부의 전투장면이 같은 촬영기법에 거의 같은 수준을 반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도 서울에서의 시가전 장면은 아주 좋더군요.


<장비의 동원>
이 장면에서 중장비의 동원이 눈에 띄는데....미제 M-4 셔면 탱크와 반장갑 트럭, 그리고 놀라웁게도 그레이 하운드 장갑차도 본 것 같습니다.

이 M-4 탱크는 실물과 모형을 병용하고 있던데...도심의 촬영에서는 모형을 사용하고 있어서 탱크는 달려가는데 캐터필러는 구르지않는 기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겁니다. 뭐 그런거야....영화감상이 무슨 NG 발견게임도 아니니 그냥 넘어가주지요?...하하....

아시다시피 스필버그는 라이언 일병에서 소련제 T-34 탱크를 개조하여 멋진 독일군 타이거 탱크를 등장시킵니다. 모형의 미흡함을 떠나서 우리 영화가 그 시대에 활약한 장비를 등장시킬 수 있다는데 대하여 정말 뿌듯합니다. 전투장면에 비행기를 도입한 것도 대단한 시도인데....코르세어가 격추되며 지상과 충돌하는 장면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겠습니다.

사운드 효과가 좋은 극장에서 보니 인민군들이 갈겨대는 수냉식 기관총의 음향효과가 압권이더군요.
두..두...두..두..이 기관총은 '애너미 앳 더 게이트' 에도 등장하는데 그 영화에서보다 훨씬 멋있습니다...쟝자크 아노 감독은 이제 큰 일 난겁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의 따발총(PPSh-41) 소리는 영~파입디더. 아마도 효과를 담당하는 분이 따발총의 특유한 음향을 잘 알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진지전투>
월남전에서 우리 해병대가 치른 짜빈동 전투는 전사에 길이 남을만한 격전이었는데...민족동란이나 월남전을 치르면서도 그 전투를 제대로 묘사한 영화는 거의 없었지요. 글쎄요...이런 추세라면 언젠가는 짜빈동의 그 격전이 강재규와 그의 악단에 의하여 재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태극기...에서 언덕위로 우르르 달려올라가는 국군의 모습이나 그 언덕 위에서 깃발을 높이들고 달려내려오는 인민군들의 모습은 영화만이 갖는 속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실제로 기관총이 난사되는 마당에 이렇게 우르르 떼거지로 달려가면 다 죽습니다요.

실제 전장에서는 병사와 병사 사이를 10미터는 띄워야 할 것인데...이렇게 되면 카메라 한 대에 잡히는 인원이 불과 몇명에 지나지 않게 되니...영화로서의 영상미를 살릴 수가 없겠죠.....실제로 수많은 전쟁의 다큐멘터리에서 '우르르 돌격장면'을 찍은 명작은 거의 없습니다.

전투의 처절함은 병사들이 목숨을 바쳐 빼앗은 고지위를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어슬렁 거리고 올라가야만 영상으로 그려지는데....이 영상에 그 전투를 치른 병사들의 공포나 광기를 담기는 어려운 것이겠지요......그러므로 진지전에서 고함을 지르며 달려가 육박전을 벌리는 장면이야말로 현실보다도 영화가 더 무서운 거시기라 하겠습니다.

★사진설명--1950년 9월 21일 왜관 근처의 무명고지를 탈환한 미군이 인민군들의 주검을 내려다보고 있다.(이무렵 미군은 단 하루에 1500명이 죽는 격전을 치르게 된다)


<스토리의 전개과정>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한마디로 말하여 "감정과잉" 입니다.

형제는 끊임없이 티걱태걱이고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형은 쉽사리도 "람보"가 되며, 감독은 너무 많은 역사의 잔재들을 심판하려 듭니다.
사실 저의 경우에는 스토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만....하하....만일에 이 영화가 전쟁에 의하여 파괴되어가는 가족과 인간의 모습을 그린거라면 전투씬을 좀 줄였으면 좋았다 싶습니다...
너무 많이 싸워요. 마치 로드무비처럼 가고..가서 싸우고...또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의 전투장면이나 나중의 전투장면이 극적인 면에서 별로 차별성이 보이지 않더라는 겁니다. 후반부로 갈 수록 더욱 극렬한 장면으로 진화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줄거리 자체는 평이하며 이념의 다툼속에 서로 죽이고 죽는 모습은 오래된 주제로서 별 새로움이 없습니다.

이 다툼이나...빨갱이 시키들은 다 죽여야돼! 를 되풀이하는 대사는 이 시대의 반공이념의 쇠락을 보여준다고 하겠지요. 예전에는 빨갱이는 다 죽이는 것이 상식이었으므로 그 누군가가 나서서 반공의 목청을 높일 필요도 없었는데....여기에서 반공이념의 소외를 발견하게 된다는 이야깁니다.


<강재규의 속내>
강재규도 그걸 알죠,
이 시대에는 기존의 도그마화된 이념을 적당히 비틀어주어야 흥행이 된다는 것을....그러나 그런 비틀기는 이미 '남부군'이나 '태백산맥' 에서 또 "실미도" 와 "동막골"에서 써먹었기로 무언가 좀 더 다른 거시기를 보여주어야 했을 겁니다.
그는 다른 "거시기" 의 추구로서 이념의 다툼에 형제애를 대입하는데....이제는 형제가 삶의 이념으로...또 사랑의 이름으로 주먹다짐을 하네요.....

나의 절망감은 이겁니다....이 형제의 다툼은 바로 그들이 미워하는 전쟁 당사자들의 다툼의 축소판이란거죠.
감독이 무슨 이념을 내세우던 그가 구사하는 프로그램은 그가 경멸하는 대상이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같은 제품이라는 절망 말입니다.....................


<벙어리의 문제>
그런데 말입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벙어리로 설정되었다는데 주목합니다.
아마도 강재규가 어머님을 벙어리로 설정한 거의 무의식적인 의도를 간파한다면 그의 상업적 재능의 비밀이 드러나지는 않을런지요.

영화 "집으로..." 에서 할머니를 벙어리로 설정할 때....감독의 무의식적인 의도는 명확합니다.
이 시대 농촌의 할머니들에게는 입은 있으되 삶의 기억의 DNA를 물려줄 대상이 없습니다..손자는 저 멀리 서울에 가 있죠.......

나는 언젠가의 글에서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옛이야기를 해 주는 행위를 정신의 DNA 를 물려주는 행위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만..지금 그 분들에게는 그 정서의 DNA 를 물려줄 대상이 없습니다....시대의 변화가 그들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감독이 어머니를 벙어리로 만든 심사를 어거지로 모함하기 위해서는 모함자도 많은 노고를 감수해야 할 것 같군요.
이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할 수 있으나...개중에는 보수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어찌되었건 지금의 이시대를 지켜준 부모님의 세대.....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삶을 자신들의 희생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그들이 적대시 하여 싸웠던 사람들과 동격으로 만들어 "니놈이나 그들이나 다 마챦가지야!" ....라고 단죄한다면 그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에게는 너무도 억울한 일일겝니다....
강재규의 무의식은 이를 간파하고 벙어리 여인을 도입하는데....이는 이 영화를 비판하는 세대가 이 여인에게 스스로를 투사하여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지요.

"이 어머님과 같이 그 시대를 가슴아파하되 내 영화에 불평불만은 말아라.......즉, 가슴이 동조할 인물은 만들어주되 입은 틀어막는 것이지요. 하하............"내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시대의 피해자>
지나간 시대가 많이 어두웠던 탓인지 우리의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주안점을 시대의 피해자에 두는 것 같습니다.
너도 나도 시대의 피해자의 삶을 보여주는데...이제는 가능하다면 시대의 가해자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네요...우리는 스스로를 정의의 편에 세우고, 시대의 희생자로 설정하여 지나간 시대를 해석하는데....글쎄요,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그리도 명확히 구분될 수 있을까요....

이 영화와 라이언 일병의 다른 점의 하나는 스필버그의 군대는 적어도 그 전쟁에 참전한 이유에 대하여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극기의 형제에게 군대는 억울하게 끌려온 곳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빠져나가야 할 거시기에 불과합니다...시대를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며 도그마적 가치를 저주하는 것.


<태극기는 휘날릴까?>
이 영화의 제목이 왜? 태극기 휘날리며죠? 태극기를 휘날리며 싸우던 역사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이던데 말이지요. 전쟁이 끝나고 1960년이 되기까지 10년의 기간에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모든 책의 뒷면에는 "우리의 맹세" 가 붙어 있었습니다.

"우리는...죽음로서 나라를 지키며.....공산 침략자를 무찌르고....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휘날리자자자...!!!!"

북한은 결국 붕괴할 것이고 언젠가는 백두산 영봉에 깃발을 휘날리게 되겠죠......그러나....우리가 지난 세월에 "태극기를 휘날리며 누적한 가치"에 대하여 차거운 시선을 보낸다면 우리가 백두산 영봉에 휘날릴 깃발은 새로운 이념들이 만들어 낸 "또 다른 깃발" 일지도 모릅니다.


************** 짜투리 글 *****************

1. 이 영화를 보고나서 딸 아이가 원빈녀석에게 뿅 갔어요....이 영화 문제 많습니다.
2. 영화를 보시는 분들은 이 영화의 한 장면을 관찰하시기를 권합니다.
영화에 대구 역앞이 나오는데...거기에 큰 간판이 두 개 보이지요..그 하나에 '축! 보스톤 마라톤 대회 우승'...어쩌구가 써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그 간판에 '서윤복' 이라는 이름이 써 있는지 보아주십시요.
만일 서윤복이 써 있다면 그건 세트팀의 오류입니다.

서윤복은 1947년도에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을 했고, 1950년에는 함기용이 역시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서우승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간판은 함기용의 우승을 축하하는 입간판인데....그 대회가 열린 계절이 언제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