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헝가리인가?


당시의 지도를 펼쳐놓고 헝가리 왕국을 살펴보시면, 헝가리는 유럽제국들의 방패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

니다. 동서로 넓게 퍼진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바로 북쪽에 위치한 신성로마제국을 보호하는 방패막이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술레이만이 즉위한 1520년대의 상황을 봤을때 헝가리

왕국은 더 이상 이슬람의 침공을 방어하는 '그리스도'의 방패가 될만한 자격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1458년부터 1490년까지 왕국을 다스린 마티아스 1세는 중소귀족의 추대를 얻어 등극한 군주로, 당시 헝가리는 대

귀족들의 세력이 강해 국력의 쇠약이 진행되던 국가였습니다. 이런 대귀족 세력을 일소하기 위해 마티아스 1세는

중소 귀족들의 지지하에 검은 군대라고 부르는 국왕 직속의 군대를 창설하였고, 대귀족을 분할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켰습니다. 무엇보다도 군대를 이끌고 정복전쟁을 계속하여 그의 치세때 헝가리 왕국은 유럽 최고의 실력을

가진 나라로 떠올랐습니다. 헝가리 왕국의 중흥기였지요.


하나, 마티아스 1세 같은 카리스마적인 인물의 통치가 끝나게 되면서 헝가리 왕국은 본래의 혼돈으로 되돌아갔습

니다. 무엇보다도 마티아스 1세의 화려한 생활방식과 전쟁을 치루면서 소모된 막대한 자금들, 그리고 검은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 모두가 높은 세금에 바탕을 둔 것이 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가진 불만은 대단히 컸습니다. 특

히 대오스만십자군 창설에 농민들에 대한 동원령이 내려지면서, 이에 반발한 농민들의 대규모 민란이 1514년 헝가

리를 휩쓸게 됩니다. 농민의 민란은 귀족들의 무자비한 탄압에 막을 내려야 했지만, 이때 소진된 헝가리의 국력은

다시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군인들에게는 제대로 봉급을 줄 수 없었고 무장도 빈약했기 때문입니

다. 무엇보다 한번 기강이 무너진 나라는 그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선 제대로 된 지도자를 만나야 했는데, 술레

이만이 즉위하던 당시 헝가리의 군주는 여러면에서 자질미달이었습니다.


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루트비히 2세


1506년생인 루트비히 2세는 헝가리-보헤미아 국왕 라디스라우스 2세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의 나이가 딱 10살이

되던 해인 1516년, 아버지 라디스라우스 2세가 60세의 나이로 타계합니다. 그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자리를

맡긴 했으나 10살짜리 꼬마가 통치자가 되는 경우는 없지요.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강력한 후견인의 손에 맡겨

졌는데, 다름아닌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입니다. 그 후견인이 죽은 뒤에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의 통치자인 게오르그 호헨졸레른이 그의 후견인을 맡아 어린 루트비히 2세를 맡았습니다. 루트비히 2세의 누나인

앤은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드와 혼인함으로서, 헝가리는 오스만투르크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의 완충지대를 선

택하지 않고 이전까지 계속 해온 그리스도의 방패 역할로 남았습니다. 문제는 아직 헝가리 왕국의 힘이 1514년 벌

어진 농민반란의 여파에서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강력한 적국인 오스만투르크의 지배자를 격노케 했다는 것입니

다.


일국의 외교사절은 대부분 그 나라의 통치자를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몇 세기 뒤 중국에 대한 야욕을 품고 있던 영

국의 외교사절이 청나라를 방문했는데, 이때 청나라에서는 황제를 배알하기 위해서는 삼궤구고두의 예를 갖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영국 외교사절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그들은 국왕을 대신하여 청나라에 사신으로 온 것이

기 때문에, 만약 자신들이 삼궤구고두의 예를 취한다면 이는 영국 왕이 청나라 황제앞에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

리는 모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양의 역사에서도 사신을 홀대하거나 죽이는 경우 그 행위 자체가 선전포고와 동일

시 되는 경우가 있었죠.


헝가리의 경험없는 군주 루트비히 2세는 해선 안될 행동을 했습니다. 술레이만의 명을 받은 사신에게 무례함으로

일관한 것이죠. 이를 술레이만은 자신에 대한 무례함과 동등하게 받아들였으며, 오스만을 힘을 보여주기 위해 국

경 근처의 도시이자 유럽으로 가는 관문 중 하나, 그리고 자신의 선조 메메드 2세가 야노슈 후댜니에 의해 물러나

야 했던 도시, 베오그라드의 공략을 준비합니다. 루트비히 2세가 약간의 노련함과 정세를 꿰는 혜안이 있었다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책잡히는 일은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물며 욱일승천하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내리막을

걷는 헝가리는 격이 달랐으니까요.


베오그라드 공략전


1521년은 지구 역사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세계는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이게 맞선 로마 교황

의 파문으로 인해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는 신교의 뿌리가 자라나기 시작했고,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코르

테즈가 화려한 문명의 아즈텍을 멸망시켜 버린 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중해 동쪽에서는 오스만투르크의 부활

을 알리게 되었구요.


자신의 사신이 무례한 대접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술탄은 베오그라드 공략을 준비시키고, 이제 초여름으로 접어

드는 포근한 5월에 군대의 전진을 명령합니다. 이스탄불에서 북서쪽으로 전진하던 군대는 소피아에서 군량을 확보

한 뒤, 베오그라드로의 진격을 계속합니다. 이때 동원된 식량만 마차로 1 만대분, 병력이나 물자의 보급에 있어서

당시 어떤 서구의 군주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파산 직전의 헝가리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베오그라드의 전투는 강력한 오스만투르크 군과 끝까지 저항한 베오그라드 수비군의 싸움으로 포위전은 3주를 넘겼

습니다. 하지만 결국 술탄의 맹렬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그해 8월 29일, 백기를 올리게 됩니다. 왕국의 관문이

자 요충지인 베오그라드가 오스만투르크의 수중에 넘어감에 따라 헝가리는 70년 전 야노슈 후댜니가 오스만군을 물

리침으로서 보장받았던 평화에 종지부가 찍혔습니다.


로도스 공략전


선대 셀림 1세가 죽기 전 로도스 공략을 준비했던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요충지인 로도스 섬에 둥지를 틀고 지중해를 다니는 비기독교(술탄과 조약을 맺은 베네치아 함대를 포함해)

선단에 대한 해적질을 일삼는 성 요한 기사단(또는 머무는 곳의 이름을 따서 로도스 기사단이라 부르는)을 일소할

필요가 있었으며,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서구 함대의 해상기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수세기 전에 시작된 십자군의 잔당들이며 이를 일소할 의무가 이슬람의 수호자인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로도스 기사단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수는 적었으나 훌륭한 성채를 지어 소수의 병력으로도 다수의 병력

을 상대하기 용이하게 섬전체를 바꿨으며, 무엇보다도 종교적 신념과 열정으로 싸우는 이들 기사 집단은 매우 강한

전투집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성 요한기사단이 로도스에 둥지를 틀고 난 뒤 맘루크의 술탄과 메메드 2세의 침공을

두번이나 겪었지만 로도스 기사단은 성공리에 성채를 방어합니다.


하지만 셀림 1세의 죽음 뒤에 잠시 주춤했던 로도스 공략전은 베오그라드 공방전이 일단락 된 뒤에 개시됩니다. 좀

더 안정적인 서진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위협요소를 등 뒤에 남겨놓고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술탄의 이런

마음을 눈치챈 기사단장 빌리에 드 리슬 아담(Villiers de L'Isle-Adam)은 1521년 10월경에 자신들과 연관이 깊은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이에 대해 프랑수아 1세는 이를 허락하고 원군을 보냈으나, 한창

전쟁 중인 스페인과의 전쟁을 위해선 총력전을 펼쳐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로도스 섬의 방어는 '야만인 투르크'가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유럽내의 몇몇 기사들과 그 시종들이 원군으로 왔을 뿐, 사실상 무관심 속에 방치됩니

다.


술레이만은 제국에 동원령을 발하고 로도스 섬 공략전에 뛰어듭니다. 방어측도 식량이 될만한 것은 모두 없애고 우

물물은 모두 메워 공격자들을 방해하려했지만 술레이만은 제국의 엄청난 부를 십분 이용해 모든 필요한 물자를 해

상으로 수송하는 과감한 병참지원으로 들어갑니다. 역사가들은 이때 동원된 함선의 수가 300-400척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해상을 통해 수송된 물자가 꾸역꾸역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서 로도스 기사단의 마음은 한층 무거워졌을 것

입니다. 하지만 포위상태를 넉달 동안 끈 이들 기사들과 로도스의 주민들의 용감함에 술레이만도 감탄했다고 합니

다. 그해 12월, 술레이만은 기사단장 빌리에로 부터 항복을 받아내었으며, 항복한 댓가로 기사단이 그들의 무구와

성물을 가지고 떠날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해 승자로의 관용을 베풉니다. 빌리에는 자신이 한 약속을 충실히 지

키며 패자를 업신 여기지 않은 술레이만을 가리켜 진정한 기사라고 칭할 정도였습니다.


술레이만의 초기 치세 2년간 연이은 전투와 전쟁의 승리로 인해 새로운 술탄의 권위는 한층 더 견고해집니다. 이

제 동지중해의 패권이 오스만투르크로 옮겨오면서, 술레이만은 자신의 적수인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의 기나긴

싸움을 준비합니다. 1522년, 헝가리-보헤미아의 왕 루트비히 2세는 죽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

녀인 '합스부르크의 마리아'를 정식으로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술탄은 헝가리를 손에 넣기로 결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