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에서 군 지휘관으로.


노예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들이야 각양각색입니다만, 한가지 공통점은 자유의 박탈입니다. 설령 주인을 잘

만나 어느정도 괜찮은 삶을 영위한 노예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노예에 대한 관념은 참혹함이라고 볼 수 있지요.

시오노 나나미씨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 어느정도 로마시대의 노예의 삶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축

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만, 쓸만한 노예(예를 들자면 그리스인 교사)와 그렇지 않은 노예의 삶은 분명 달랐다는

것입니다. 미국 남부에서도 노예제가 있었고 그 중 일부 노예는 주인을 잘 만나 나름대로 괜찮은 삶을 살았으나

, 남부의 노예제가 괜찮은 제도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슬람에서는 꽤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노예의 힘이 너무 커져서 도리어 주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이

나타나고, 아예 노예 왕조까지 탄생하는 기묘한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노예가 반란을 일으키고 정부를 위

협한 적은 세계 역사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것이지만, 이슬람의 노예는 주인의 보호 하에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

며 힘을 길렀다는 점입니다. 즉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 됩니다.


9세기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무타심은 대표적인 인물인데, 그는 내부와 외부의 적 모두를 상대하기 위해 노예

로 구성된 이들 군대를 충분히 활용했습니다만, 이를 견제할 세력을 만들지 못함으로써 맘루크 전횡의 바탕을 만

들게 됩니다. 알 무타심의 사후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들은 맘루크 장군들에 의해 파리 목숨이 됨으로써, 이슬람

신도들의 왕이라는 칼리프의 존재는 사실상 허수아비와 다름없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이 이런 폐단을 알면서

도 이슬람 세계에서 노예군의 자취는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시간을 건너뛰어 1223년. 흑해 북쪽의 킵차크 투르크 족 마을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훗날 맘루크 왕조의

제 4대 술탄이 되는 이슬람의 영웅, 바이바르스 1세의 탄생입니다. 몽고군에 의해 사로잡힌 바이바르스는 노예가

되어 이집트에 팔렸고,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살리흐 아이유브의 노예가 됩니다. 알 살리흐는 자신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투르크계 맘루크들을 고용하는데 아낌없이 투자했기 때문이죠. 어쨌든, 바이바르스는 나일강에 떠

있는 로다섬의 병영으로 가서 군사훈련을 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군 관련 위인들이 그렇듯, 바이바르스 또한 훈

련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고, 훈련을 마친 뒤 그는 술탄 근위대의 지휘관으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성 루이 - 루이 9세가 이끄는 제 7차 십자군의 격파


제 4차 십자군과 제 5차 십자군이 딴짓(콘스탄티노플의 공격과 라틴제국의 성립)과 공략 실패로 인해 침체기 상

태였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왕국은 그 힘이 전성기엔 못 미치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지요. 문제는 전황을 일시

에 뒤집을 정도의 뒷받침은 받지 못하는 만큼 예루살렘 왕국은 이미 전성기때의 위용은 온데간데 없이 근근히 이

어집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시작한 제 6차 십자군에선 생각치 않은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집트

의 술탄인 알 카밀과 프리드리히 2세는 협정을 맺고 나자렛과 베들레헴, 그리고 예루살렘을 넘겨주게 됩니다. 프

리드리히 2세는 그 댓가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원하는 조카 알 나지르를 상대할 수 있도록 알 카밀을 도와주겠다

는 약조를 하게 됩니다. 제 5차 십자군을 물리친 술탄으로써는 굴욕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살라딘과 리처드

1세의 조약과 마찬가지로 프리드리히 2세의 예루살렘 점령을 인정하되 순례자들을 막지 않겠다면 전혀 문제될 것

이 아니었지요. 이때가 1229년 2월 18일의 일입니다.


그리고 15년 뒤, 협정은 깨지고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손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 예루살렘의 함락

은 서구에겐 전혀 관련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서구의 군주들은 모두 자기 손에 떨어진 일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

무였고, 먼 중동의 성지 예루살렘의 일은 이제 거론조차 되지 않는 일이었지요. 단 한명만 빼곤 말이지요. 바로 유

럽의 강대국 프랑스의 루이 9세입니다.


후세 성 루이로 성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루이 9세가 이끄는 약 2만의 제 7차 십자군이 1248년 프랑스를 떠났으

며, 첫 기항지인 사이프러스에 머물며 동방 기독교 세력과 의견을 나누게 됩니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예루살

렘을 차지하기 위해선 이집트를 공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루이 9세는 나일 삼각주에 있는 다미에타로 당당히

들어왔습니다.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는 불과 200km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이었죠. 약간의 저항을 받았으나 다미에

타는 함락되었고, 루이 9세와 제 7차 십자군의 본거지가 됩니다.


때마침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살리흐가 죽었기 때문에 공격엔 최적의 찬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의 계획

은 모두 틀어지게 됩니다. 군사 일부를 떼어 포위한 알 만수라는 십자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휘자마저 죽여

버리게 되었고, 본군을 이끌던 루이 9세는 아이유브 술탄의 명령에 따라 공격에 나선 맘루크 지휘관의 공격을 받

아 패배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휘관이 바로 바이바르스입니다. 루이 9세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알 만수라의 포위

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만, 그 결과는 무슬림에 의해 죽은 수보다 더 많은 수가 기아로 죽게 됨으로써 그는 풍전

등화의 입장에 서게 됩니다. 결국 근거지인 다미에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바이바르스는 군대를 이끌고 루이 9세

를 공격, 그를 사로잡게 됩니다. 그 결과로 무려 40만 리브르라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풀려나게 되었지

요.


아이유브 왕조의 몰락과 바이바르스의 수난


화무십일홍이라고 하듯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이유브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

다. 이미 군대는 맘루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고, 루이의 십자군을 격파한 것에서도 자신을 얻게 된 바이바르스

를 비롯한 맘루크들은 아이유브 왕조의 마지막 술탄, 투란샤를 시해하게 됩니다.


죽은 자의 미망인을 부인으로 취하는 일은 이슬람에선 흔히 있는 일이며, 자신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알 살리흐의 미망인 샤자르 알 두르와 결혼한 새로운 맘루크 왕조의 주인, 아이베크의 분노를 산 바이바

르스는 시리아로 쫓겨나 1260년까지 다른 맘루크들과 시리아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는 제 3대 술탄인 알 무자파르 사이프 알 딘 쿠투즈의 부름을 받아 원래의 지위를 회복하고, 마을 하나를 영지로

하사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슬람 역사에 길이 남는 아인 잘루트 전투의 지휘관으로 나서게 됩니다.


아인 잘루트 전투의 승리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한 훌레구 칸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같은 시리아의 중심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한 뒤, 1260년

쿠투즈에게 사신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합니다. 이미 바그다드와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훌레구는 카이로의 맘루크

들은 그다지 어려워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물론 쿠투즈도 가만 있을 사람은 아닌지라, 사신의 목을 베어 성문에

걸라고 해버렸으니 훌레구의 분노는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근데 하늘이 도왔는지, 몽고제국의 몽케칸이 죽게 되면서 그 후계자 다툼을 위해 훌레구도 휘하 군사를 이끌고 떠

나버리고, 남은 것은 키트부카 휘하의 2만명 정도의 병력 뿐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 세력은 중립을 고수하는 입

장이었기 때문에 몽고와 이슬람간의 전투가 나블루스 근처의 '골리앗의 샘' - 아인 잘루트에서 벌어집니다.


전장에 먼저 도착한 맘루크 군은 몇 가지 덫을 놓습니다. 우선 좁은 평원의 양쪽에 군대를 숨겨두고,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 병들이 몽고군을 유인하는 가운데, 숨겨진 군대는 거짓 퇴각하는 맘루크 기병을 추격하는 몽고군을

포위하게 만드는 전략을 씁니다. 키트부카가 사실을 알았을때 이미 몽고군은 맘루크군에 완전 포위된 상태가 됩니

다. 그래도 세상을 떨게했던 몽고군은 포위를 뚫기 위해 공격을 퍼부었고 실제로 포위망이 무너질 지경까지 몰아넣

습니다만, 쿠투즈가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서면서 중과부적이었던 몽고군은 대패, 지휘관인 키트부카가 사로잡히

고 참수형에 처해집니다.

물론 이 전투를 보고 훌레구가 상당수의 병력을 후계자 다툼의 고지를 위해 데려갔으니 몽골의 마수를 막았다고 보

기엔 어려운 것이냐고 말합니다만, 적의 수가 많든적든 아랍세계에서 그나마 몽고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맘루크

왕조였던 것을 감안했을때 아인 잘루트 전투의 승리는 매우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의 수야 어찌 되었든

이슬람은 몽골의 침입에서 보호받게 된 것이니까요. 하지만 승자인 이슬람은 또 다른 피를 부릅니다. 술탄 쿠투즈

와 승리에 큰 공헌을 한 바이바르스의 갈등이 바로 촉매제가 되었지요.


알레포 대신 맘루크 왕조의 술탄이 되다.


쿠투즈와 함께 아인 잘루트의 승리를 가져온 바이바르스는 이때만 하더라도 직접 술탄이 되겠다는 것보다는

옛부터 시리아의 요충지인 알레포의 하사에 기대를 걸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눈부신 공훈을 생각하면 알레포

정도의 영지하사는 당연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쿠투즈가 그걸 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


자, 공을 세운 신하의 입장에서 볼때, 쿠투즈의 행위는 배은망덕으로 보이지 않을리 없지요. 동서고금을 막

론하고 군주의 논공행상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 부당한 대접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군주에게 칼을 꺼

내든다는 사실을 쿠투즈는 알아야 했던 것이죠. 결국 귀환하던 도중 바이바르스는 쿠투즈와 만나 몽골처녀를

전리품으로 달라고 하고 쿠투즈는 이를 승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로 술탄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

로 술탄 쿠투즈는 습격을 당하며, 결국 바이바르스의 검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로써 노예출신의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왕조의 제 4대 술탄이 되어 정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맘루크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끌게 되는 위대한 군주로 기억될 일련의 치적을 남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