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1979년 12월 4일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2690> - 녹번리 전투

완강한 적잔당(敵殘黨) 섬멸위해 적진(敵陣)에 침투

폭격유도기(旗) 꽂고 싸우다 7명이 부상

서울 재 탈환후 구로동(九老洞) 지역에서 얼마동안을 쉬면서 중국인(中國人) 수색대원들은 작전 대신 이재민 지원에 힘썼다. 그중 하나는 쌀 배급이었다. 서울 입성후 대원들이 오랫동안 굶주렸던 밀가루음식만을 먹게 되자 부대에서 배당된 쌀이 남아 돌았다. 대원들은 남는 쌀을 반납하는 대신 난민(難民)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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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민이 많은 곳에 쌀부대를 싣고가 길가에서 배급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터무니없는 오해를 산적도 있었다. 어느날 대원들이 길가에서 쌀을 배급하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국군(國軍) 고위장교 한 사람이 갑자기 다가와 매서운 어조로 다그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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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어느 부대 소속이요? 이 쌀은 어디서 나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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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안이 벙벙한 대원들이 신분을 밝히자 그 장교는 다시 추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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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허락을 받고 군량미(軍糧米)를 내다 파는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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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교는 수색대원들이 쌀을 내다팔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금방이라도 헌병을 불러 체포할 듯, 서슬이 시퍼랬다. 마침 이 자리엔 위서방(魏緖防) 대장이 함께 있었다. 위(魏)씨는 이 장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차근차근 따졌다. “외국인이 한국(韓國)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때다. 식량을 모아 난민구제까지 하는데 칭찬은 못해줄 망정 무작정 몰아치는게 웬말이냐” 고 거꾸로 다그쳤다. 주위에 있던 한국인(韓國人) 난민들도 이들의 말을 거들었다. 애기를 다 들고 난 이 장교는 정중히 사과했다고 한다.  이렇게 나눠준 쌀이 30여 가마에 이르렀다. 51년 4월 말에 중국인(中國人) 수색대는 다시 비상소집명령을 받았다. 당시 중공군(中共軍)과 북괴군(北傀軍)은 1백70‘마일’ 전(全)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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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51년 4월에 총 대공세다. 이때 서울시의 녹번리(碌磻理)(지금의 녹번동(碌磻洞)) 지역에 한 야산에는 중공군(中共軍)에 북괴군(北傀軍)이 섞인 1개대대 정도의 적병이 잔류해 아군의 대항에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섬멸하는 임무가 15연대에 떨어졌고, 중국인(中國人) 수색대는 경찰임무를 맡게 되었다. 위(魏)씨는 즉각 대원들의 점검에 출동준비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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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아군은 가까운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었다. 중공군(中共軍)들은 이쪽에 대고 중국어(中國語)로 욕설을 퍼부어 왔다. 못알아들으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쪽에서 출동대기하고 있던 위(魏)씨 등이 곧 되받아쳤다. 같이 중국어(中國語)로 욕설을 해준 것이다. 저쪽 친구들은 놀랐는지 잠시 조용하더니 시험이라도 하듯이 다시 긴 욕설을 해왔다. 이런식으로 중국어(中國語) 욕설이 한참 오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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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은 4월 28일이었다. 전투개시 직전 위(魏)씨와 대원들은 5개 분조(分組)로 분산해 적진에 침투했다. 적진 요소요소에 숨어들어선 폭격표시용 신호기(信號旗)도 깔고 적군 3명을 생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창 활동하던 중 그만 적에게 노출되고 말았다.  곧 치열한 사격전이 벌어졌다. 아군이 이미 공격해 오기 시작한 때였지만 적진 가운데 갇힌 수색대는 큰 피해를 보았다. 한시간 가량 버티는 도중 위(魏)씨는 적에 박격포탄에 왼쪽가슴과 오른쪽 다리, 허벅지 등에 심한 파편상을 입었으며 다른 대원 6명도 중경상을 입고 말았다. 이들은 때마침 진격해 온 아군에 구출돼 즉시 대구(大邱) 제 27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위(魏)씨의 파편상은 생각보다 더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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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폐(肺)에 거의 다 닿을 정도로 파편이 깊이 박혀 4시간의 수술 끝에 간신히 회생할 수 있었다. 위(魏)씨와 부상대원들이 3개월여를 입원해 있는 동안 중국인(中國人) 수색대는 사실상 활동을 중지하고 있었다. 병상에서 이 소식을 들은 위(魏)씨는 몸이 조금 나아지는 자 군의관에게 사정했다. 작전참가는 안할테니 퇴원만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결국 허락을 받은 위(魏)씨는 곧 부대가 있던 경기도(京畿道) 일산(一山)으로 달려가 대원들과 합류했다.

51년 4월에 춘계 대공세는 사실상 6·25 최후의 대회전(大會戰)이었다. 이후의 전쟁은 2년을 더 질질 끌었지만 전면적인 전투는 없었다. 중국인(中國人) 수색대에도 녹번리(碌磻里) 전투는 마지막 열전(熱戰)이었다. 이 직후 그동안 같이 해온 김안일(金安一) 대령도 11사단 9연대장으로 전속되어 버렸다. 수색대는 그 후에도 일선 수색임무를 계속 했으나 녹번리(碌磻里) 이후 별다른 전투는 겪지 않았다. 53년 휴전 전후해 수색대원 20여명은 정들었던 1사단을 떠나 주한(駐韓) 자유중국 대사관의 알선으로 부산영도(釜山影島)에서 화교(華僑)가 경영하는 당면공장해서 숙식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