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년전 7월에 이맘때쯤의 일입니다.

참 속수무책이었지요.

7월2일이면 이미 미군 전투기가 투입된 시점인데

적군이 아니라 아군을 폭격하기가 일수였고....

<T-34>

“딱 딱 딱 우룽 우룽”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적의 기습공격이었다. 긴장했던 탓에 나는 반사적으로 무장을 갖추고 도로를 향한 상점 문틈으로 밖을 바라보았다. 집체만한 T-34 전차 2대가 인천 쪽으로 향하면서 좌우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우선 뒷문으로 빠져나가 대대 진지를 향해 뛰었다. 이때가 7월 2일 아침 4시 30분경, 도대체 적의 전차가 어디서 나왔을까? 속으로 걱정하면서 열심히 대대진지를 향해 가는데 박격포 진지에 도달하여 대대는 현 진지에 그대로 있다는 보고를 받고 안심이 되었다.

 잠시 후 대대 OP에 올라가보니 윤 소령이하 참모들은 그대로 임무수행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전차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적의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각 중대의 진지를 보강하는 한편, 5중대에 대해 어젯밤 전차가 어디에서 침투했는지를 조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5중대 우하단(병력배치가 없는 곳) 소로에서 전차 비슷한 물체가 통과했다는 것이다. 5중대장 강대위는 이번 일로 2번째 직무유기를 한 것이다. 보고도 없이 이와 같은 중대사를 은닉한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대는 이런 일로 시간을 소비할 수 없었다. 우선 적의 전차를 어떻게든 조치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 국군에는 이를 저지할만한 무기나 수단이 전혀 없었고 병사들은 대전차 공격훈련도 전혀 받은 일이 없었다. 눈앞에 단독으로 출현한 이 전차는 독안에 든 쥐와도 같았으나 이것을 처치 못하다니 참으로 한심스로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격포의 집중사격으로 궤도 파괴를 시도하려 했으나 그것은 아군진지의 노출로 인해서 전차포의 공격대상이 된다고 해서 실시할 수 없었다.

전차는 인천가도를 따라서 소사 쪽으로 1500m 정도 가서 조그마한 초가에 불을 지르고 다시 영등포 쪽으로 돌아와 오류동을 거쳐 유유히 영등포 시가지 쪽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우리 국군은 숨을 죽이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기만 했으니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일 아침 7시부터 전투는 시작되었다. 어제와 같이 적의 122밀리 박격포 사격이 대대 진지를 강타했다. 어제보다도 더 심하게 퍼부었다. 다행히 피해는 없었지만 아군의 모든 행동에 지장을 주었다. 피아가 치열하게 포격전을 하고 있을 때 F-80이라는 미 공군 전투기 2대가 날아와 진지 상공을 비행했다. 우리들은 구세주가 와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 같은 감격에 손을 흔들고 들리지도 않는 거리지만 목청을 올려가며 소리쳤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가? 우군비행기는 우리 진지를 향하여 급강하 하더니 81mm 박격포 진지 주변에 기총사격과 로켓포탄 사격을 하고 상공으로 상승했다. 순간적으로 발생한 이 처사에 나는 분노하고 긴급 수단으로 백색기를 흔들어 보이고 아군임을 있는 힘을 다하여 전투기에 신호를 보냈다. 전투기는 우리의 신호를 보았는지 보지 못했는지 2차 공격태세로 강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발사 직전에 우군임을 확인하고 상승하여 멀리 사라졌다. 미군이 원군으로 참전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이들과 통신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

  우군 전투기에 의해 우리들의 사기는 급속히 저하되고 감정도 좋지 않았다. 어제처럼 적의 기관총이나 소총 사격은 심하지 않았지만 박격포 사격은 2배 이상 증가되어 우리도 박격포로 대응 했다.

  오후 12시가 넘어 연대본부에서 작전지시가 내려졌다. 금일 야간을 기해 15연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대대는 안양으로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대는 15연대와 교대할 때까지만 무사히 진지를 고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오후 1시가 넘어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이 진지 교대를 위해 대대 박격포 진지에 도착하여 대대장인 나를 내려오라고 전화했다. 나는 아무리 상급자이지만 진지를 교대하러 온 책임자가 전투 중인 지휘관을 자기 부하처럼 오라 가라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교대 지휘관이 올라오라고 했다. 바로 이때 적의 박격포 탄이 대대 관측소 부근에 낙하되어 사실상 내가 내려갈 수도 없게 되었다. 결국 양 지휘관의 교대를 위해 전화를 통해 교대시간을 밤 7시로 정하고 최 대령은 자기 부대로 돌아갔다.

 한편 영등포 방면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 국군은 아침에 침투한 적의 전차가 후방에 나타남으로써 일부 부대의 진지가 흔들리고 지각없는 장병들이 진지를 이탈해 도주했다. 이로 인해 영등포지역의 방어선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진지교대를 예정했던 우리 대대도 영등포지구의 전황이 불리하게 됨에 따라 오후 5시를 기해 철수하기로 명령이 하달되었다. 여름철의 일조는 저녁 8시까지 있었다. 따라서 오후 5시에 철수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만약 적이 이것을 간파한다면 우리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대 보급소와 지휘소를 오후 4시에 철수시키고 6중대를 후방진지에 배치하여 오후 6시까지 적진지에 대하여 81밀리 박격포로 진지에 맹렬한 사격을 실시하였다. 이러는 동안 대대지휘소와 5, 7중대, 중화기중대의 일부는 오후 5시를 기해 철수를 시작하여 수원방향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대대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고 무사히 오류동 진지를 철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