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군의 아침

김바사 | 2014-05-05 19:5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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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트는 새벽꿈에 고향을 본 후   외투입고 투구쓰면 맘이 새로워 
                       거뜬히 총을 메고 나서는 아침  눈들어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물도 맑고 산도 고운 이 강산 위에 서광을 비추고자 행군이라네.
 
아직도 이 군가가 군대에서 불리워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러기를 바랍니다.
 
<행군의 아침>
유년의 시절, 초등학교 5학년때 우리반의 담임을 하신 김영만(가명)선생님은 군대에서 갓 제대하신 총각 선생님이셨습니다.
약간은 까칠한 성격으로서 아이들에게 언제나 너그러운 스타일은 아니셨는데 이 분이 아이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다가서는 시간이 바로 풍금을 치시면서 군가를 가르쳐주시는 음악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분에게서  "행군의 아침" 과 "우리들은 이 바다위해 이 몸과 마음을 다바쳤나니..." 로 시작되는 "해군의 노래"를 배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행군의 아침"은 그 가사에 아주 묘한 정서를 지니고 있어서 제 안에 깊이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교과서에 실려있던 문교부 정품 제공인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엔 멀리 떠나간 동무가 생각납니다.." 로 시작되는 "동무 생각" 과 함께 어린 나의 정서를 흔들어 준 2대 명곡으로 선정하는 바 입니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아직 군기가 덜 빠지셨던 이 총각 선생님과 관련된 기억하나를 풀고 가고자 합니다.
그 해 겨울, 교정에 눈이 하얗게 쌓인 어느 날, 점심시간에, 아이들은 겨우내내 태우고 버려진 조개탄이 언덕처럼 쌓여있는 곳에 모여들었습니다.
당시엔 교실마다 난로를 놓고 조개탄을 땠는데 나라에서 주는 이 조개탄도 양이 충분치를 못하였는지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면 아이들은 "빠께스(양동이)" 를 들고 초기에 버려둔 조개탄에서 그래도 연소가 덜되어 검은 부분이 남아있는 조개탄을 다시 수거하여 교실로 가져가곤 했습니다.
즉, 이 조개탄 언덕은 이미 아이들에게 친숙한 곳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조개탄 고지의 접전>
아이들이 모이는 곳에는 당연히 "장난" 이 시작되게 마련이지요.
우리들은 오전에 배운 "화랑 관창" 의 이야기에서 받은 감명을 재현하면서 저마다 자신이 "화랑 관창" 이라며 장검(작대기)을 휘둘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옆반의 "수거팀" 녀석들이 자신들이 "계백장군" 이라며 맞상대로 붙어온 것입니다.
얼시구! 우리들은 신나게 장검을 휘두르며 황산벌의 전투를 재현하였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저 아이들은 어떻게 화랑 관창을 죽인 계백장군의 편을 드는 것일까? 답은 이랬죠. 아직 젊으신 우리 선생님은 화랑관창의 편에서 그 전쟁을 보았고 옆 반의 나이드신 선생님은 계백장군의 입장에서 교과서의 내용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 날, 우리 어린 초딩들은 선생님들의 이념에 따라 대리전쟁을 치뤘다고나 할까요. "누구를 옳다고 보든 관계없어요. 우리가 추종할 대상만 찍어주세요"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클리프 리챠드나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와 영화가 펼쳐지는 현란한 시절의 관문을 통과하면서도 이 "행군의 아침"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내 안에 살아 남았습니다.  그리고 좀 더 세월이 흐르니 논산훈련소에서 화랑관창과 계백장군이 장렬히 죽어갔다는 황산벌의 사격장으로 "행군의 아침"을 부르며 경배의 행군을 하게도 되더군요. 최전방의 자대에 배치되어서도 나는 행군을 좋아했습니다.

본시 음주가무와 스포츠에는 맹탕이던 내가 걷는 것만은 아주 좋아했지요. 언제나 충직한 내 두 다리가 내 몸을 짊어지고 묵묵히 길을 걸어갈 때 내 두 눈은 다다리의 수고를 아랑곳하지 않는 관광객이 되어 양 옆으로 지나가는 세상의 모습을 즐겼습니다.
군대에서는 이 걷는 즐거움에 뿌듯한 사명감이 추가되었는데... "내 어깨에 조국을 지키는 사명이 부여되어 있다" 는 스스로 부풀린 사명감은 국방부에서 지급되는 공식적인 사명감의 요구치를 한참이나 상회하였던 것입니다.
여하튼 군대에서 참 많이 걸었습니다. 예기치 않은 불행한 사건으로 서무병이 된 후에도 나는 행군이라면 다른 일을 제켜놓고 따라다녔지요.
 

행군 12중대.jpg

                                                                                           행군하는 12중대 3소대장님과 전우들

<동절기 산악행군>
그러니까 입대한 이듬해, 겨울의 끝물이지만 아직도 산들이 눈에 싸여있는 계절에 동계 산악행군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걷는 것에는 자신이 있던 나는 걱정을 하지 않았으며 은근한 기대마져 품고 있었지요.
그 날, 이른 아침에 "시레기 국" 에 밥을 말아먹고 라면봉지에 담긴 주먹밥을 하나씩 지급받았습니다. 그 주먹밥속에는 간장에 조린 멸치가 두 마리씩 박혀 있었는데 이것이 그 날의 점심 도시락이었습니다. 이 주먹밥을 탄입대에 채워넣고 군장검사를 받고 대대장님의 훈시를 받은 후 드디어 장도에 올랐습니다.
출발하자마자 뒷산으로 올라 "헬렐레 고개"를 지난 후 Q-3 방어진지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풍산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죠.
문제는 산에 쌓인 적설(積雪)이었습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에서 다리를 빼어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해야 했으므로 행군 초반에 너무 과도한 체력소모가 있었던 것이죠.
오전 10시경이 되니 벌써 시장기가 느껴져 탄입대에 손을 넣어보니 주먹밥은 이미 나도 모르게 내 입이 훔쳐 먹었기로 탄입대속에는 짠 멸치냄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행군을 한 것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여하튼 가도가도 산길이었는데 맙소사! 어디에선가 평지로 내려오니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행군의 밤> 
그 날 밤, 달도 뜨지 않은 어둠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걸었습니다.
우리라... 이 상황에서는 이미 중대나 소대라는 구분은 해체되어 버렸고 그냥 수백명의 대대병사들이 대열을 길게 늘인채로 묵묵히, 정말로 아무 말없이 걸어가고만 있었던 것이지요. 배고프고 지친 몸에 졸음이 찾아왔습니다. 이게 참 무섭더군요. 난생 처음으로 걸어가면서 잤는데 언듯 언듯 깨어날 때마다 내 다리가 자동으로 걸어가고 있음을 인식하곤 놀랐습니다.
드디어 신읍리 계곡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당도하였을 때 내 체력이나 정신력은 그 오르막길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대열에서 낙오되어 배낭을 짊어진채로 길옆의 논두렁위에 벌렁 나자빠진 것입니다. 내 낙오를 인식한 동료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졸면서 걷고 있었고 강원도 산골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니까요.
 
한참을 나가떨어진 상태로 눈을 감고 있자니 막상 잠은 오지 않고 부대원들의 군화소리만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지린내... 내 몸이 풍기는 요산냄새가 독했습니다. 배출된 땀이 증발하면 고약한 성분만 남는 모양이지요. 얼굴을 만져보니 소금기로 버석거렸습니다.
 
<침묵하는 별들>
그제서야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기에 별들이 총총했습니다. 나는 멍청하게 그 별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멍청하게 말이지요.
사실 내가 별들을 아무 생각도 없이 바라보았다는 것이 이 추억의 백미입니다.
그 순간 내 정신이 나가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런 대사를 읊조렸으니까요.
"라케다이온으로 가는 길손이여.  전해다오. 나 여기에서 조국을 위해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노라고" ....싱거운 유머감각이나마 살아있었던 게지요.
그러나 그 이후로 내 마음은 그냥 멍청히 침묵을 이어갔습니다.
 
이 침묵을 기억하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하여 사춘기에 시달리던 시기의 어느 가을 날 밤, 무슨 이유때문인지 밤 1시도 지난 시간에 잠이깨어 방을 나와 툇마루에 앉았습니다.
거기에! 놀라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휘엉청 보름달이 떠 있는 하늘은 은막으로 펼쳐져 있었고 그 하늘에서 내려온 은빛 광채가 마치 투명한 망사처럼 우리집 장독대와 담장너머의 교회의 담장을 걸쳐진채 모서리 마다에서 파르르 떨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이렇게도 밝은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마당에서는 귀뚜라미들이 합창을 하고 있었는데 이 합창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었고 어떤 장중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 놀라운 장면에 압도되어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내 안의 마음이 안절부절 하더군요.
"이런 순간에는 뭔가 여기에 어울리는 생각을 떠올려야하는 것 아닐까? 인생에 대한 생각, 꿈, 하나님, 그리고 은근히 좋아하던 여자애와의 보랏빛 상상이라도..."
그러나  까까머리 사춘기의 어린 소년에게 무슨 사색의 주제가 있겠습니까. 마음은 계속 이래서 될까? 이래서는 안될텐데...를 연속하면서도 이 압도적인 모습앞에서 대책없이 멍하니 앉아만 있었던 것이지요.
 
다시 이 신읍리 논두렁으로 돌아와서, 이번에도 나는 그저 속절없이 저 별빛을 올려다 보고만 있었습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와 같은 별들을 바라보며 하는 맹세나 회상, 진리에대한 대오대각, 반신을 못쓰시는 병에걸려 누워계시는 어머님, 어린 동생들.. 그들을 생각하며 내가 제대후엔 돈을 왕창벌어서... 하는 굳은 각오, 그것도 아니면 윤동주의 서시라도 한 귀절.....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뭐랄까... 하늘의 섭리자가 먼저 말을붙여 "힘들디? 참으라우..." 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저 하늘은 스스로의 명상에 빠져 있는듯 아득한 지구, 대한민국의 강원도 어느 두메산골 논두렁에 나자빠진 병사에 대하여는 관심조차 없었고 나 또한 그 별들에게 말을 붙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누워있으니 기력이 회복되더군요.
그러니까.. 여기쯤이 포병부대의 구보 반환점이고... 그렇지 저쯤이 신읍리 버스 종점... 조금만 올라가면 "코플레 아줌마네" 가게가 있는 곳이겠구나. 
나는 다시 힘을내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며 걸어가는 군중(차라리 군중이라 할 것입니다)속으로 섞여들어 갔습니다.
드디어 대대 연병장에 당도하니 먼저 도착한 병사들이 캄캄한 연병장 가득히 널부러져 있었고 중대장이나 선임하사들이 플래시를 켜고 각자의 중대원들을 찾고 있습니다.
"12중대! 이쪽으로!" " "야! 3소대 천병장 왔냐?" 
평소에는 까칠하시던 양중사가 플래시를 내 얼굴에 비췄습니다.
"야! 김일병! 너, 고생 많았다! 배낭 이리줘!" 지친 나는 대답도 못하고 "리쳐드 위드마크"처럼 일그러진 미소를 띄웠는데 차라리 꼬리가 있었다면 흔들어 주었을 것입니다. 고생끝에 받는 격려는 참 기분이 좋죠.
 
이 "고난의 행군"을 마쳤을 때 몇 가지 소소한 경험을 덤으로 하게 됩니다.
우선 밤늦게 먹은 밥이 매우 쓰더라는 것, 밥이 칡뿌리를 씹는 것과 거의 동일한 쓴맛이 나더군요. 밥을 씹으며 예전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밥맛이 쓰다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쓴웃음을 지었습니다만 아마도 입안에 타액이 부족하면 이런 현상이 나는 것 같습니다.
행군을 마친 후 양쪽 엄지발톱이 까맣게 죽더니만 며칠 만에 빠져버렸습니다. 고참들의 경험어린 충고를 잘 받아드렸어야 하는건데.... 새 통일화를 신고 행군에 나선 것이 문제였던 것 같더군요. 배낭에는 하얀 소금테가 달무리처럼 배어져 있었는데 그 소금기와 걸어가면서 비벼대는 동작을 견디지 못하여 구멍이 나 있었지요.

여하튼 이 행군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용감한 국군 아저씨가 될 스스로를 꿈꾸며 부르던 "행군의 아침" 에 대한 운명의 최종 응답이었다고 나는 믿는데 "꿈꾸면 이루어진다" 는 말은 들었지만 그 이루어지는 꿈에는 "쓰디 쓴 현실"이 다량으로 함유된다는... 소위 꿈을 이룬 분들이 말하지 않는 사실을 몸으로 깨우친 계기가 되었다 할 것입니다.
아! 노파심에서 이런 말도 하고 싶군요. 그 어려웠던 행군이 나로 하여금 군대에 대한 염증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그저 내 앞에 닥친 어려움을 덤덤히 받아들였으며 다음 날이면 잊어버릴 뿐, 그것을 다른 것에 연관짓지는 않았지요. 나는 지금도 많이 걷습니다.  

끝으로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혀지기는 커녕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는 군대시절의 기억과 그 기억을 토로고자 하는 욕구에 대하여  그 시절에 읽은 헤세의 "데미안"의 문장을 표절하여 이렇게....매우 잘난 표정을 지으며... 말해보고 싶습니다.
"한 개인속에서 30년을 숙성된 기억은 그 개인의 머리를 깨고 나오려 한다. 두뇌를 깨고나온 기억은 아프락사스로 날아가던가,  뭐... 그것도 아니면 세상의 공유기억으로 남으려한다."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 웃으며 읽어도 되는 참조사항 *****


1. "코플레 아줌마네" : 신읍리에 있던 가게의 암호명, 주인 아주머니가 노냥 코를 쿨적거려서 생긴 이름.
2. 리챠드 위드마크의 미소 :   이 흘러간 명배우가 나오는 영화에서 그의 미소를 직접 보아주시기를.
3. 시레기 국 :   그 날, 취사반에서 시레기 국을 끓일 때 여물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여물"이라는

                      단어가  당시의  군대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비추일까봐  본문에서는 지웠지요.

                      나는 군대가 준 먹거리에 불평한 적이 없습니다.
4. 데미안 :      우습지요. 나이가 들어가니 그렇게 심취했던 헤세에 대한 무게감이 덜어집니다.
5. 동무생각 :   이 "동무생각" 은 나중에 "친구생각" 으로 바뀐 것으로 기억됩니다. 마음이 아프지요.
6. 화랑관창:    나는 이제 황산벌의 전투를 화랑 관창이 아닌 계백장군의 입장에 경도되어 바라봅니다.
7. 왕십리 달빛과 신읍리 별들 : 
    이런 해석은 어떨까요.

    자연은 우리의 눈길이 가는 곳에 "현실' 이라는 무대를 빛의 속도로 꾸며줍니다.
    고로 우리가 바라보지 못하는 뒷면에는 현실이라는 세계가 존재하지 않죠. 

    그러나 우리가 뒤를 바라보는 순간! 자연은 순식간에 "현실"을 만들어놓고 시치미를 뗍니다.

    왕십리와 신읍리에서는 그 시간에 내가 하늘에 눈을 돌릴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으므로

    현실로 가공되지 않은  "세상의 원판" 이 목격되었던 것이지요.  자연의 실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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