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7010424

10. 램프의 채택 

1937년에 빅터 크룰락 해병소령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었다.

그는 국민당군의 옵저버 자격으로 상하이 전투를 참관했는데 그때 쌍안경으로 일본군의 특이한 상륙주정을 목격했다.

일본군이 가득 탄 주정이 해안에 닿자 선수가 밑으로 떨어지더니 그걸 램프(ramp) 로 삼아 일본군이 쏟아져 나왔다.

선수를 램프 겸용으로 사용하는 일본군의 상륙주정을 보는 순간 크룰락 소령의 머릿 속에 번뜩하는 깨달음이 지나갔다. 

그는 재빨리 주정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다음 숙소에 돌아와서 스케치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본국에 보고했다.

이때 크룰락 소령이 목격한 것은 일본군의 상륙주정인 다이하츠였다.

(다이하츠. 자세한 내용은 여기로)

건조수리국은 크룰락 소령의 보고서를 무시했다.

자신들이 생각하기로 까마득한 후진국인 일본의 발명품을 베끼기 위하여 머리를 싸맨다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크룰락 소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3년 동안 크룰락 소령의 보고서를 무시하던 건조수리국은 1940년 9월에 335척의 36피트-유레카를 발주하면서 크룰락 소령의 제안을 정식으로 거부했다.

건조수리국이 내세운 이유는 유레카의 양산이 시급하므로 대폭적인 설계 변경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해병대는 크룰락 소령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유레카 선정 과정에서 여러번 건조수리국과 얼굴을 붉혔던 해병대 수뇌부는 더 이상 건조수리국을 자극하기 싫어했다.

안 그래도 유레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건조수리국이 이것으로 트집을 잡아 기껏 얻어낸 335척이라는 대량의 유레카 발주를 무산시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하지만 1941년 2월에 건조수리국의 후신인 함선국이 마지막이라던 전해 9월의 말과 달리 188척의 유레카를 추가로 발주하자 해병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을 준비하면서 함선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륙주정을 요구하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이제 돈 걱정할 필요없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좋은 시절이 왔다는 해병대의 생각은 옳았다.

1936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미해군 예산은 1939년에 6억 7천만달러였는데 1940년에는 11억 4천만 달러로 2배 가까이 늘었으며, 41년에는 44억 7천만 달러로 다시 4배 가까이 폭증했다.

45억 달러에 달하는 1941년의 해군 예산은 앞선 8년 간의 해군 예산과 맞먹었다.

물론 미국이 전쟁에 뛰어들자 미해군 예산은 다음해인 1942년에는 211억달러, 43년에는 310억 달러로 다시 급증한다.

해병대는 앞으로 더욱 많은 예산이 주어질 것이며, 그 많은 예산으로 조달할 어마어마한 수량의 상륙주정의 형식이 지금 결정될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해병대는 램프를 장착한 상륙주정을 함선국에 강요하기 위하여 다시 히긴스와 힘을 합쳤다.

1941년 4월에 히긴스가 콴티코에 있는 해병대 본부를 방문하자 해병장비위원회 소속의 어니스트 린서트 소령이 그에게 크룰락 소령이 찍어온 다이하츠의 사진 중 1장을 보여주었고, 해병장비위원장 에밀 모지즈 준장은 유레카에 램프 겸용 선수를 달아달라고 요청했다.

상륙주정의 설계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히긴스는 즉시 램프 겸용 선수의 가능성을 꿰뚫어보고 자비로 1척을 제작했다.

이후 히긴스는 시험을 거듭해 가면서 2척을 더 만들어 본 후 만족한 성능이 나오자 해병대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평가회를 실시하여 좋은 결과를 얻었다.

히긴스가 크룰락 소령의 사진을 본 뒤 평가회까지 불과 1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당시 히긴스가 만든 상륙주정은 해병대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해병대는 어디까지나 병력 수송을 위하여 좁은 램프를 가진 유레카의 개량형을 원한 반면 히긴스는 램프의 폭을 선체의 폭과 같이 넓게 만들어서 병력은 물론 차량들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범용성이 강한 상륙주정을 만들었다.

이것이 나중에 차량/병력상륙정(LCVP = 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으로 발전하게 되는 원형이었다.

(히긴스가 만든 램프 장착형 상륙주정의 원형)

해병대는 히긴스와 함께 함선국에 램프장착형 상륙주정을 생산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이미 히긴스는 함선국이 무시하기 힘든 유력한 사업가로서 입지를 굳히고 있었으며, 미국의 참전을 앞두고 실전부대인 해병대의 발언권도 불과 몇 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높아져 있었다.

1940년 5월에 함선국은 188척의 유레카 중에서 1척을 램프장착형으로 개조하여 평가를 실시했다.

그런데 함선국은 히긴스의 설계를 변경하여 엔진을 너무 뒷쪽으로 배치했다.

함선국의 설계도를 본 히긴스는 크게 화를 내면서 함선국의 시험용 주정이 보여줄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램프를 장착한 함선국 주정의 성능 평가 시험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히긴스가 미리 주정의 문제점들을 일일이 지적한 후였기 때문에 시험을 참관한 관계자들은 시험 결과를 램프장착형 주정의 실패라기보다는 함선국의 실패로 인식했다.

오히려 히긴스가 예상했던 문제점들이 시험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나면서 히긴스의 발언권은 더욱 강해졌다.

1941년 8월에 함선국은 162척의 유레카와 100척의 램프장착형 상륙주정을 발주했다.

이번의 상륙주정은 히긴스의 설계도를 따라 만들어졌다.

자존심이 상한 함선국은 히긴스에게 다시 한 번 공개시험을 하자고 제의했다.

1941년 10월에 실시된 히긴스와 함선국의 램프장착형 상륙주정 시험평가에서 함선국이 완패하면서 램프장착형 주정은 히긴스의 설계를 따르게 되었다.

유레카에 이은 히긴스의 두번째 승리였다.

히긴스의 램프장착형 상륙주정은 제1파에 돌입할 상륙주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상 방탄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커다란 선수 겸용의 램프만 6.4mm 두께의 특수처리강(STS = Special Treated Steel)으로 둘러싸서 제한적인 방탄능력을 가졌을 뿐이었다.

조종석은 뒷쪽에 있었으며 시야 확보를 위하여 높이 솟아 있었고, 조종수를 위한 별도의 방어장치는 없었다.

히긴스의 램프장착형 상륙주정은 처음에는 LBV(Landing Boat, Vehicle) 나 VLC(Vehicle Landing Craft)또는 지프 수송정(jeep lighter) 등으로 불리다가 1942년 7월에 차량상륙정(LCV= Landing Craft, Vehicle)로 불리게 되었다.

(차량상륙정)

차량상륙정은 1943년까지 총 2,286척이 생산되었고 이후로는 직계 후손인 차량/병력상륙정(LCVP = Landing Craft, Vehicle, Personnel)으로 이어진다.

(소형상륙주정들. 출처 : U.S. Amphbious Ships and Crafts, P.80)

차량상륙정은 애당초 크룰락 소령이나 해병대가 원하던 모습과는 다소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해병대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함선국은 1942년 1월에 해병대를 위하여 좁은 램프를 가진 병력상륙정을 설계했고, 유레카를 생산하던 회사들 중 하나인 크리스 크래프트 사에서 이 새로운 상륙정을 생산했다.

1942년 7월에 램프병력상륙정(LCP(R) = Landing Craft, Personnel, Ramped) 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이 상륙정은 기존의 유레카에 최소한의 개량을 가하여 선수에 좁은 램프를 장착했다.

(램프병력상륙정)

램프병력상륙정은 1942년 말에 차량상륙정과 함께 차량/병력상륙정(LCVP)으로 통합되지만 속력이 다소 빨랐으므로 수중파괴반(UDT = Underwater Demolition Team)을 비롯한 일부 분야에서 계속 사용했다.

따라서 종전시까지 꾸준히 생산되어 총 2,635척이 생산되었으며, 영국에 413척이 공여되었다.

1942년 7월에 육군 제7사단에서 대형병력상륙정, 램프병력상륙정, 그리고 차량상륙정에서 병력이 상륙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한 적이 있었다.

가장 빨리 상륙한 것은 차량상륙정으로 20초, 다음은 램프병력상륙정으로 30초, 가장 느린 것이 대형병력상륙정으로 55초였다.

따라서 미군이 1942년 말에 소형 상륙주정들을 통합할 때 차량상륙정의 직계 후손인 차량병력상륙정(LCVP)으로 통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본 : 대사의 태평양전쟁 이야기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701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