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글)재해현장에서의 국군

악의곰푸 | 2011-03-28 22: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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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원전사태와 리비아 군사개입으로 일본의 쓰나미 복구 작업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상황을 메뉴얼화 해놓고 재난에 대비했다는 일본정부였지만, 막상 일이 터지고 나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관료주의가 문제가 되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 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전해온 이야기 만으로도 기가 차지요.

자동차 소유자에게 허락을 받지 못해 쓰나미로 겹겹히 쌓인 폐차들을 처리하지 못했다거나,
보급 물자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분배 계획을 짜지 못해 나눠주지 못했다거나,
고속 도로를 놀랄 만큼 빠르게 복구하긴 했는데, 통행 가능한지 안전검사를 안해서 못 쓰게 했다거나,
보급물자를 실은 트럭이 그 때문에 국도로 우회했는데, 하중 위반이라고 되돌아 가야 했다거나,
착륙 훈련 안 했다고 헬기가 재해지역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다거나,
탱크로리가 부족해서 드럼통에 기름넣고 트럭으로 옮기자고 하니 위험하다며 철회시킨 일이나...

...정말 일본 국민들이 존경스럽습니다.
만약 우리 지역 공무원들이 이따구로 찌질대고 있었다면 몽둥이들고 달려갔을 겁니다, 진짜...

아무튼 이와 비교해서 오늘은 너무 안일하고 무모하게 재해복구를 한 어떤 반도의 군사정권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이리시(현 익산시) 역사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호송원의 안일한 실수와 철도청의 허술한 안전의식에 의해 벌어진 사고로, 40톤의 고성능 폭발물(다이너마이트용 화약 800상자, 뇌관 36상자, 초안폭약 200상자, 흑색화약 3상자...ㄷㄷㄷ)이 폭발했던 당대 최악의 폭발사고였습니다.

폭심에는 지름 30미터, 깊이 10미터의 구덩이가 파졌고, 이리시청까지 파편이 날아갔으며, 주변 500미터 근방에 있는 건물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피해규모는 건국이후로 전래가 없을 정도로 끔찍했스습니다. 이 사고로 59명이 숨지고, 중상자 185명, 경상자 1158명 등 모두 1402명의 인명피해를 냈지요. 그리고 이재민은 무려 8000여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이리시의 인구가 고작 12만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거의 10명 중에 한 명 꼴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되버린 것이었습니다.


당시 안방에서 한국-이란 간의 올림픽 축구 예선을 TV로 보고 있던 이리 시민들은 날벼락을 맞고 정신이 없었으나, 이내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등 자발적으로 복구작업을 시작했지요.(듣자니, 당시 이리시의 택시들은 거의 엠블런스화 되었다고...)

시민들이 사고현장에서 분투하는 가운데, 서울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사건 현장을 보기 위해 내려왔고, 공무원들도 사고경위 조사와 대책을 강구한다고 바쁘게 돌아다녔습니다.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이재민 8000여명의 숙소해결이었죠.
당시 11월이라 날씨는 추워지고 있었기에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땅한 대책이 없어서 다들 곤란해 하고 있었지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컨테이너 집도, 조립식 주택도 없던 때였으니 말입니다.
그때,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겠다고 나선 위대한 용자가 있었으니...
당시 2군 사령관이었습니다.(성함은 모르겠다는..;;;)

"각하! 제가 하루 안에 다 끝내겠습니다!"
"하루 안에? 임자, 정말 해낼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알겠어. 내 임자를 믿어보지."

대통령 앞에서 호언장담을 한 2군사령관.
당시 관계자들은 그에게 뭔가 뾰족한 묘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그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뭔가 좋은 계획이 있습니까?"
"계획? 하하하, 그런 게 있을리 있나."

공무원들은 환장할 지경이었죠. 각하 앞에서 큰소리 쳐넣고 아무런 계획도 없다니.

"아니, 정말 계획이 없단 말이요?"
"뭐 그냥 사람 살만하게 만들어 놓으면 되는 거 아니겠소?"
"말이 쉽지, 이 양반아! 무려 8000명이 묵을 숙소야! 전기 설비도 있어야 하고, 상하수도에 난방설비도 있어야 한다고! 근데 그걸 하루 안에 하겠다고 큰 소리를 쳐!"
"참나, 그럼 언제까지 책상 위에서 머리만 굴리고 있자는 거요?"


일부터 저질러보기로 작정한 이 용감한 2군 사령관은 일단 삽질부터 해보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그가 하는 일을 지원하기로 했지요.

그리하여 용자는 일단 자신과 함께 싸워줄 정령들을 소환하기 위해 일단 절대적인 주문을 외웁니다.

"2군 공병 전원 익산시로 집합!"

이 명령에 2군 영내의 모든 공병들이 이리시로 달려왔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산을 옮기고 강을 틀어놓고 바다도 메우는 이 용감한 군인들은 삽을 들고 땅을 파고 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단시간에 8000명분의 숙소를 짓는다는 것은 무리한 일.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던 용자 사령관은 야전막사(천막...)로 때워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이 계획에 부하들이 곤란한 기색을 보입니다.

"시민들은 군인이 아니지 말입니다..;;;"
"야전막사가 빨리 하기에 좋긴 하지만 밑에서 찬기운이 스며들지 말입니다."
"잘못하다간 이재민 8000명이 폐렴으로 골로 가지 말입니다."

이에 용자께선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판자로 장판 만들어 깔면 그럭저럭 괜찮겠지. 애들 목공소에 보내서 목재 죄다 가져와!"

이리시와 인근 지역 목재소들은 부지런히 목재와 합판을 뽑아내서 공병들에게 전달했습니다.
한 무리의 공병들이 장판을 만들고 있을 쯤, 또 다른 공병들은 땅을 파고 하수설비와 공용 화장실을 지었고, 상수도관을 연결했습니다.

그렇게 삽질의 정령들이 땀을 흘리고 내구른 결과 20시간 만에 8000명이 머무를 숙소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작전 종료 4시간을 남겨두고 중대한 문제들이 남아 있었지요.

"허걱, 전기가 아직 연결되지 않았다는!!!"
"난방도 대책이 없다는!!!"

전기가 있어야 불을 킬 것이고, 난방이 있어야 춥지 않을 것인데, 아직 이 설비가 마련되지 못했죠.
그러나 용자 사령관은 그리 오래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공고생들 다 모아! 걔들더러 전기 가설하라고 해."
"난방은 어떻합니까?"
"주변 학교에 애들 보내서 갈탄 난로 보이는 대로 다 끌어와."
"그럼 애들 공부는 어떻게 하라고..."
"ㅅㅂ 공부가 문제냐? 생존이 문제지!"

학도병 징발과 갈탄 난로 약탈로 전기와 난방시설도 모두 완료. 딱 하루 만에 8000명의 임시숙소를 완성합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무대포 사령관의 의지와 삽질의 정령들이 흘린 땀방울로 해낸 결과였지요.



매스컴에서 시끄럽긴 해도 할 땐 하는 강한친구가 대한민국 군대입니다.
-한편으로, 삽질의 정령들이 이렇게 구슬땀을 흘리고 있을 때 중대하게 군법을 위반한 장교가 있었습니다.
현재 광주에서 병원 원장을 하는 윤장원이라는 군의관이었는데요,
윤 원장은 당시 TV를 통해 사고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의료지원단을 이끌고 현장으로 와서 부상자들을 치료했습니다.
당시 발빠른 지원활동으로 그는 칭찬을 받았지만, 이것은 사실 상부의 허락도 없이 독단적으로 했던 행동이었습니다.

윤 원장은 당시 젊은 군의관으로서 임무에 충실하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출퇴근도 안하고 병원에서 숙식하며 살고 있었는데, 사고 소식을 보고 '이건 어떻게든 가봐야 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지요. 더구나 이리시는 광주 통합병원 지원 지역이라 그가 있던 부대의 관할이었습니다.

그는 병원장을 찾았지만, 연락이 안 되어 당직에게 출동을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당직은 지휘관 지시가 없다고 곤란해 했지요. 안되겠다 생각한 윤 원장은 위생병과 간호장교 20여명을 뽑은 뒤 장비와 함께 현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리시에 도착해서 남성고등학교 강당에 진료반을 차리고 곧장 파편 환자들을 보살폈지요.

좋은 행동이었지만, 당연히 다음 날 아침에 난리가 났습니다.

당장 철수하라는 호통이 떨어졌고, 윤 원장은 짐을 싸고 있었는데, 위에 2군 사령관과 참모총장 등 군 고위 관계자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격려를 해 주었지요. 상황이 반전된 겁니다.

이때 윤 원장이 왔던 것과 달리 가까운 논산지구병원은 오지 않았는데, 상명하복에 철저한 군조직의 특성상 윤 원장의 행동은 상당히 위험했습니다.
아무튼 윗선에서 쾌히 넘어가 준 덕분에 윤 원장은 무사할 수 있었고, 제대로 의무부대가 차려지고 나서 3달을 이리시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훈장과 표창이 내려왔지만 받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리시폭발사고가 나자 전국에서 무려 5억 6천만원의 성금이 모아졌습니다. 당시 물가로 생각하면 엄청난 액수였죠.
거기다 88000kg의 쌀과 58만점의 성금품이 들어왔고, 자원봉사자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이리시의 재건에 한팔 거들었지요.
앞서 언급했지만, 군부대 지원도 많아서 사고 후 1달 동안 교체 투입된 군장병만 거의 26만명에 달했고, 1400여대의 차량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복구에 들어간 비용은 피해액의 5배인 200억원이 사용되었는데, 이 덕분에 사고는 겪었지만, 시의 발전이 30년 앞당겨졌다는 평도 들었지요.(2군 사령관이 만든 텐트 촌에서 1년여 동안 살던 이재민들도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무 대책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일이 터지면 의외로 잘 해결하곤 합니다.
물론 대책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는 사람들이 태반이긴 합니다만, 일단 민방위 교육도 하고 훈련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보다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 역사가 아직도 살아 있는 건 민초들 덕분이다...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나라의 근본인 국민들이 억척스러운 덕분에 경제 성장도 하고, 민주화도 했으니 말입니다.
물론 위에 있는 사람들의 공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국가라는 바퀴가 움직이는 데는 상하의 협력이 몹시 중요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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