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수상씨 보셔요

MIG-29 | 2008-06-23 11:5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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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사학" 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제작한 역사지도.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 고대사의 국가들은 상상을 뛰어넘는 대제국이었다. 오른쪽 지도에 표기된 사항들을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 "자치구", "식민지", "연방국" 같은 것들을 만들어 냈던 모양이다.>




이상하고 야릇한 얘기들



(1)우리나라의 역사의 시작은 약 1만년 전에 건국된 '환국' 이라는 대제국이며, 그것은 '배달국' 이라는 국가로 이어진다.

(2)배달국의 제왕중 한 명인 치우천왕은 중국을 정벌했다.

(3)피라미드는 바로 우리 조상들이 건설한 무덤으로, 중국 서안에도 역시 한민족이 세운 피라미드가 있다.

(4)일제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은폐하기 위해 역사서 20만권을 불태웠다.

(5)고구려의 영토는 시베리아와 티베트까지 걸쳐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은 어떤 형태로든 위에 열거한 것과 같은-혹은 유사한- 주장을 들어본 일이 있을 것이다.

지난 2002년, '붉은 악마' 가 제작한 '치우천왕기'[1] 와 여기에 그려진 붉은 도깨비 형상은 한국 축구의 상징으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치우천왕' 이 우리나라의 옛 제왕이자, 전쟁의 신으로 떠받들어진 인물이라는 설명이 미디어를 휩쓸었다. 의혹과 우려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열광적인 월드컵 응원 분위기 속에서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비판일 수 밖에 없었다.

위 목록 가운데 (3)과 같은 주장을 하는 유명 포탈 사이트의 역사 카페 "한민족 참역사" 는 2008년 3월 현재 그 회원 수가 약 4만명에 육박한다. 역사 카페로서는 국내 최대 수준이다.[2] 이 카페는 회원들을 통해 우리나라 역사의 "70%가 왜곡" 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독특한 홍보 문구를 여러 뉴스 사이트의 댓글란에 무차별적으로 게시하는 한편, 자체적으로 국사교과서 개정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대략 2005년부터 각 포탈과 공유 사이트에는 <한국사 미스테리 60> 이라는 작성자 미상의 글이 떠돌기 시작했는데, 그 주된 내용은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은 고대국가들은 물론이고 고려, 조선까지도 모두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다.[3] SBS 에서 방영된 드라마 "연개소문" 에서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치우천왕' 의 존재를 거론했으며,[4] MBC 드라마 "주몽" 에서는 고구려 시조왕이 한(漢)나라의 현도군, 요동군을 정벌했다는 내용을 다루었다.



한국사에 멘 인 블랙이 개입했는가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운 상식적인 "국사" 와는 전혀 체계를 달리할 뿐 아니라, 사실은 이들끼리도 서로 모순된다. [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주장들을 통틀어 하나의 부류(部類)로 정리해서 다룰 수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첫째, 우리 역사속의 국가들이 교과서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광대한 영토를 보유한 대제국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광대했다면 대체 어느 정도로 광대했던 것일까?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국경선이었을까? - 그런 문제로 들어가면, 사람마다 하는 말이 죄다 다르다. 심지어는 그 국가들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존재했다는 것인지 통일된 의견이 없는 경우도 있다.[6] 그렇지만- 아무튼 대제국이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런데 이러한 대제국의 역사는 오래전부터 거대한 음모 세력에 의해 감추어지고 조작되어왔다고 한다.

그 음모 세력은 진시황이나 당 태종[7]등 중국의 역대 제왕들을 필두로 한 중국 제국 그 자체일 때도 있고, 한국의 위대한 역사를 "깎아내리려고" 혈안이 된 제국주의 일본일 때도 있다.[8]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놀랍게도 한국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상당수도 이 유래가 오래된 음모에 동참하여 한국사를 축소,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9]


굳이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도 없이 위의 두 가지 특징은 논리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바로 알 수 있다. 만약 저런 주장들이 참이라면, 어째서 그런 사실이 '교과서에 수록' 되는 것으로 상징되는 '인정' 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저 주장들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창자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므로, 다른 하나의 가능성을- 즉, 자신들의 주장은 실로 올바른 것이지만 뭔가 악랄한 음모때문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뿐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10]


그들의 이름은 "재야"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을 지닌 역사학적 견해나 활동들은, 한데 묶여 흔히 "재야사학(在野史學)"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 이론을 생산하고, 퍼뜨리는 사람들 가운데 절대 다수가 역사학계에 적을 두지 않은 '재야' 인사들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민족사학" 으로 불리기를 더 원하는 것 같지만, 이것은 그들 스스로 자기 주장과 활동이 "민족을 위하는 것" 이며 "민족의 진정한 역사를 찾는 일" 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러한 생각을 믿어 주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어떤 분들은 "재야사학" 대신 "국수주의사학"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 주장의 근저에 강한 국수주의 사상이 깔려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이러한 표현은 상당히 공감이 가는 것이다. 개인 블로그를 중심으로 하여 이 표현은 차츰 입지를 넓혀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재야사학" 이라는 용어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아무튼 이름을 무엇이라고 하건, 거의 비슷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바로 그 "재야사학" 에 관한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재야사학" 은 이미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서점에 깔린 책의 지면을 넘어 인터넷, 신문, 방송은 물론, 영화나 대중음악, 게임, 만화... "매체" 라고 불릴만한 곳에는 어디에나 "재야사학" 이 있다. 역사에 여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해도, 최소한 '신경쓰이는 무언가' 가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인지할 수 있을 정도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더구나 이러한 주장을 확산시키는 사람들 가운데는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인사들도 있다.


어느 쪽이건 절망 뿐이다

역시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단지 자신들의 취미 활동을 홍보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잘못되었으며,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자들은 우리가 참된 역사를 알지 못하도록 왜곡을 일삼고 있다는 주장을 당당히 펼치고 있다. 정말로 그렇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큰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반대로 그러한 주장이 거짓이라 해도 큰일인 것은 역시 마찬가지이다. 대체 어째서 그런 엉터리 역사 이론과 모함이 대중적으로 횡행할 수 있는 것일지, 말 그대로 우리 사회의 '수준' 과 관련된 탄식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건 간에 참담한 일이다. 이 글은, 우리가 처한 "참담함" 은 과연 어느 쪽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지 명확히 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재야사학" 이 많은 화제와 문제를 만들어 온 만큼, 이미 많은 탐구와 논의가 이루어졌다.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글은, 기왕의 논의를 취합, 정리한 것에 "재야사학" 의 기원과 인적 구성, "재야사학" 의 본질적인 성격[11]과 같은 문제에 대한 분석도 덧붙인, "재야사학" 전반에 걸친 기초적인 일고찰이다. 비슷한 작업이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이 글이 선행 작업들과 비교했을 때 가지는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쓸데없이 길다던가, 재미가 없다던가 하는 점은 제쳐두고) 서두를 뗀 지금도 상당한 골칫거리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차츰 이 글만의 특징이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References&Supplements


[1]'치우천왕기' 는 1999년부터 사용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붉은 악마"

[2]유사 카페인 "삼태극" 의 회원수는 2만 6천명 이상이다.

[3]http://orumi.egloos.com/1779098 를 참조.

[4]"연개소문" 은 이 외에도 재야사학에서 많이 채용하는 역사지리 이론인 '난하 요수설' 을 채택하였고, 연개소문이 당나라를 정벌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환단고기>> 를 제시했다. 드라마 "연개소문" 은 이러한 재야사학 편향으로 인해 '환개소문'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5]http://orumi.egloos.com/2654762 를 참조.

[6]재야사학측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환단고기>> 와 <<규원사화>> 가 둘 다 우리 고대사의 진실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두 책에서 전하고 있는 고조선의 역년이 다르다. <<환단고기>> 에 의하면 고조선은 2096년간 존속하였고, <<규원사화>> 에 의하면 1205년간 존속했다. 두 책이 모두 진실을 전하고 있다면 어떻게 한 가지 사실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써 놓을 수 있을까? 하나가 맞다면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 된다. 아울러 틀린 쪽의 사료적인 신빙성은 크게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터넷상에서 재야사학을 전파하고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7]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 와 같은 그의 저작에서, 당 태종이 한국사 관련 사료들을 고의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거는 없다. 전형적인 "카더라 통신" 인 셈이다.

[8]재야사학자 문정창은 저서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사>> 에서 총독부에 의한 역사서 20만권 분서설과 삼국유사 개변 조작설을 제기하였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블로그의 포스팅을 참조. http://munbba.egloos.com/356187

[9]재야사학측에서는 한국 사학계의 연구자들을 "식민사학자" 라고 부르며 공격한다. 이 문제는 후술하기로 한다.

[10]수천년 전부터 우리 주위 나라들이 "한국사를 깎아내리기 위해" 역사책을 조작하고 유적을 파괴하며 유물을 변조해 왔다는 것과, 단순히 그런 주장 자체가 참이 아니라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더 그럴듯한 이야기일까? 전자가 더 신빙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토록 많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 세상에는 있음직하지 않은 일이 가끔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사실일까? 그들이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들은 과연 타당할까?

[11]추후에 해설하겠지만, 모든 재야사학은 세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떡밥', '변명', '설교'. 재야사학은 '설교'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떡밥'을 그 근거로 동원하며 '변명'으로 이를 정당화시킨다. 즉, '떡밥' 자체를 남들에게 납득시키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떡밥' 이 논파되면 곧 다른 '떡밥' 을 생산해 내서 가져온다. 하나의 '변명' 이 논파되면 또 곧바로 다른 '변명' 을 만들어서 가져온다. http://munbba.egloos.com/420200

[출처] [재야사학] 1. "무엇을, 왜" (【부흥】전쟁의 역사 - 네이버 역사 전문 까페.) |작성자 thwmun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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