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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국헌 칼럼> 백마고지 전투, 금성전투

전문가_칼럼 작성자: 김국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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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9-08 10:43:15




1952년 9월에 접어들어 중공군은 공세를 재개하였다. 중공군은 어떠한 인명 손실도 감수하겠다는 인해전술로 파상공세를 계속해왔다. 혈투는 10월 15일까지 계속되었으나 9사단은 백마고지를 사수하였다. 중공군은 1만여 명 사상자를 내었고 9사단도 3천 5백의 사상자를 내었다. 백마고지를 열두 차례나 뺏고 뺏기는 혈전에서 9사단은 5만 5천발 이상의 적 포탄세례를 받았으나 미9군단 포병은 38만 발 이상을 퍼부어 9사단을 지원하였다. 백마고지 전투의 승리는 김종오 사단장의 적절한 예비대의 투입과 교체 및 적절한 미군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1953년 봄 중공군은 전 전선에서 전초고지를 목표로 대대나 연대 규모의 제한공세를 가해왔다. 국군은 이들 고지를 사수하려고 하였으나 테일러 8군 사령관은 이들 고지가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확보할 필요가 있는가에 의구심을 가지며 고수를 고집하지 않았다. 밴 플리트가 기회만 주어지면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려 하였던데 비해, 테일러는 인명손실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공격보다는 방어에 치중하였던 까닭이다.

1953년 4월 26일 휴전회담이 재개되었다. 쟁점은 군사분계선의 획정이었다. 양측은 휴전이 성립되면 접촉선이 군사분계선이 될 것이므로 유리한 지역을 확보해두려고 하여 마지막 공방전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중부에서는 철원-평강-금화를 잇는 ‘철의 삼각지대’ 전투가 대표적이었다. 오성산은 김일성이 ‘장교 군번 한 트럭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요충이었다.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2만 7천 반공포로를 석방하였다. 흥분한 모택동은 ‘휴전협정 체결을 미루고 한국군 1만을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7월 10일 중공군은 15개 사단으로 금성천 북방에서 국군 2군단을 공격하였다. 국군 방어선이 절단되고 대혼란이 야기되자 8군사령관은 금성천 남으로 후퇴를 명령하였다. 7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2만 8천의 사상자를 냈고 국군도 1만 4천의 사상자를 냈다.

신문에서는 금성전투를 당나라와 고구려의 안시성 싸움처럼 먼 옛날 일로 금성전투를 소개한다. 그러나 한중관계는 바로 오늘 전개되고 있다. 박근혜 시대 한중관계 개선에 앞장서든 전문가들은 반성해야 한다. 오늘날 대중무역의 성격, 득실도 더 깊숙이 분석해야 한다. 6.25 전쟁은 소련의 지령에 의한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했지만 중공군 개입 후 미국과 중공, 유엔군의 미니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최근 영국 항모전단의 한국 연해 진입은 당시를 회상케 한다.

중공군 군용군 19대가 대만 방공구역에 진입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군 정찰기도 대응하여 나타났다. 중공군은 수시로 대만 방공관제구역에 출입한다. 한국, 미국, 일본, 영국, 대만이 한편이 되어 대중 연대가 성립하고 있다. 한국은 QUAD(미국, 일본, 인도, 호주 안보대화) 참여를 더 본격화해야 한다.

중공은 새삼스럽게 항미원조전쟁 영화를 제작한다. 시진핑의 종신집권을 의해 인민을 결속시키려고 항미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금성전투를 재조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도 금성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서 국군 용전을 기리는 작품을 만들기 바란다. 북한강이 중공군으로 시산혈하(屍山血河)를 이루었던 용문산 전투, 사창리 전투도 더 조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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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best gslky 2021-09-10 추천 4

    그럼요
    우리도 압도적인 승리를 이끈 백마고지점투,용문산전투를 영화화해야합니다
    옳고도 옳으십니다
    저 때놈들 우리를 잡아먹을려는 기세가 만만치 않은데 반드시 만들어 우리끼리 단결해야합니다

  • gslky 2021-09-10 추천 4

    그럼요
    우리도 압도적인 승리를 이끈 백마고지점투,용문산전투를 영화화해야합니다
    옳고도 옳으십니다
    저 때놈들 우리를 잡아먹을려는 기세가 만만치 않은데 반드시 만들어 우리끼리 단결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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