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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굴 특집> 용인 151고지 전투를 아시나요?
작성자 : 고성혁(210.223.xxx.xxx)
입력 2021-08-04 14:3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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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명되어야 할 터키참전 용사들

2010년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명박 정부는 6·25전쟁 60주년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했다.

해외의 유엔군 참전용사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는 사업도 병행했다. 참전용사들은 이미 80대 고령으로 한국 방문은 생애 마지막인 경우가 많았다. 터키군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미국과 영연방국가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병력을 한국에 파병했다. 터키에는 지금도 ‘코렐리’라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는 곳이 있다. ‘코렐리’는 터키말로 한국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한국전 참전용사였음을 뜻하기도 한다. 

2010년 초 어느 날 터키한인회 한국전참전용사기념사업회를 찾아온 백발의 참전용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슐레이만 비르빌레이(2010년 당시 85세). 손에는 두 장의 빛바랜 흑백사진이 있었다.

5살배기 한국전쟁고아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이름은 ‘아일라’. 터키어로 ‘달’을 뜻한다. 25살에 한국전에 참전한 슐레이만 씨는 ‘아일라’라는 이름을 60년 동안 한순간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슐레이만이 아일라를 만난 곳은 바로 ‘군우리 전투’ 때였다. 군우리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30일까지 5일간 청천강 일대에서 펼쳐진 방어전이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기습에 유엔군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터키군 참전용사들은 지금도 매년 11월 29일을 ‘군우리 데이’로 지정하고 전우들을 기억하고 있다. 후퇴하던 터키군 슐레이만의 눈에 눈물 콧물이 뒤범벅이 되어 울고 있는 어린애가 들어왔다.

아무리 급박한 전투, 그것도 후퇴 과정이지만 고작 너댓살짜리 여자애를 놔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 아이를 데리고 후퇴했다. 

슐레이만은 터키한인회에 찾아와 이렇게 부탁하며 말했다. “북한땅 군우리에서 철수할 때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그곳에서 한 아이가 부모 없이 혼자 있었어요. 추위에 떨며 울고 있는 아이를 우리가 데려왔어요.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녔어요. 함께 말이죠. 터키 말도 곧잘 배우고 통역도 하고 적응을 잘했어요. 우리와 함께였지요. 여자아이니까 살아 있다면 엄마가 되고 가족도 있겠죠. 물론 살아남지 않았으면 없겠지만…”



60년만의 재회. 아일라와 슐레이만 터키군 아버지


터키 참전용사가 들고 온 한 장의 사진

1950년 10월 17일 부산에 첫발을 디딘 터키군이 첫 번째 대규모 전투를 치른 곳은 평양 북방 청천강 방어전이고 미 2사단이 최대의 피해를 본 곳이 바로 청천강 북방 ‘군우리’다. 그래서 미군의 한국 전쟁사에서는 청천강 방어전 하면 ‘군우리 전투’로 통칭한다. 미 8군에 배속된 터키 여단 역시 첫 번째 전투인 군우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소식을 접한 춘천MBC는 6·25전쟁 60주년 기념 다큐 제작에 들어갔다. 제작진은 터키대사관을 찾았다. 백상기 주한 터키대사관 고문은 군우리 전투 때부터 터키군과 함께 했던 통역관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터키군은 전투 현장에서 오갈 데 없는 전쟁 고아들을 하나 둘 씩 부대로 데려왔는데 부대 이동 때마다 그 고아들을 데리고 다녔다고 증언한다. “그 수가 어느덧 20명이 넘게 되자 수원에 있는 의무중대에 천막을 세웠어요. 그렇게 해서 고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게 1952년입니다.

이름은 앙카라 학원. 터키군이 세운 어린이 보육시설입니다. 휴전이후 60년대까지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쳤어요. 슐레이만 부대가 철수하면서 아일라를 맡긴 곳도 바로 앙카라 학원일 겁니다.”

춘천MBC 제작진은 앙카라 학원 기록을 찾았다. 그러나 앙카라 학원은 70년대 화재로 소실되면서 많은 서류도 함께 사라졌다. 앙카라 학원을 통한 ‘아일라’ 찾기는 힘들게 됐다. 춘천MBC는 앙카라 학원 출신 전쟁 고아들을 상대로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인천에 살고 있는 최동남 씨가 ‘아일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최동남 씨 역시 앙카라 학원 출신 전쟁 고아였다. 그래서 알게 된 ‘아일라’의 한국 이름은 김은자. 슐레이만이 그토록 찾던 ‘아일라’는 인천에 살고 있었다.

춘천MBC 황병훈 PD가 ‘아일라’ 김은자 씨를 찾아가 사진을 건넸다. 슐레이만이 안고 있는 5살배기 어린 ‘아일라’, 김은자 씨 사진이다. 사진을 본 ‘아일라’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은 MBC 다큐멘터리방송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일라 김은자 씨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감격에 벅차 말했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있게 될 줄은 몰랐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65살의 김은자 씨는 5살배기 ‘아일라’로 돌아가 사진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 사진에는 ‘아일라’를 안고 있는 슐레이만이 있었다. 

필자 역시 2021년 현재 앙카라고아원이 어떻게 되었는지 수소문을 하여 찾아갔다.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서호초등학교 정문 앞에 앙카라고아원(학원)이 있었다. ‘앙카라길’이라고 작명도 되어 있지만 내비게이션에는 표시되지 않았다.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봤다. 나이 든 현지 주민은 앙카라고아원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앙카라고아원 출신들은 모두 서호초등학교에 다녔다고 알려줬다. 앙카라고아원은 다 폐허가 되다시피 하고 벽면에는 이곳이 과거 앙카라고아원자리였음을 알려주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터키군이 한국전쟁고아 ‘아일라’를 데리고 있는 모습이다. 서둔동은 수원공군기지 활주로 북쪽 끝 인근 지역이다.

과거 이곳이 터키군 의무중대가 있던 곳이다. 그곳에 앙카라고아원이 만들어졌다. 서호초등학교 정문 앞 자그마한 ‘앙카라학원공원’에는 작은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앙카라고아원 건립기념비-터키군은 1952년 5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45-9번지 일대에 ‘앙카라고아원’을 설립하여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640여 명 이상의 우리 어린이들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1966년 잔류 중대가 철수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2010년 4월 이명박 정부는 한국전 터키참전용사 30여 명을 한국에 초청했다. 아일라를 찾는 슐레이만 비르빌레이도 있었다. 그토록 찾던 아일라를 찾았다는 말을 듣게 된 슐레이만. 터키 참전용사 아버지 슐레이만과 한국 전쟁 고아 아일라의 만남은 그렇게 성사되었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앙카라 공원에서 60년만에 한국 전쟁 고아와 터키 아버지는 다시 만났다. 부둥켜 안은 그들의 모습은 2010년이 아니라 바로 1950년, 5살배기 전쟁 고아 소녀와 25살 터키군 병사의 모습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한·터키 수교 6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영화 ‘아일라’다.



수원 권선구 서둔동 앙카라 고아원이 있던 자리. 터키군과 전쟁고아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형제의 나라 터키와 한국

터키는 1949년 8월 13일 대한민국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1950년 북한의 무력남침에 유엔은 한국을 돕기 위한 유엔군 창설에 나섰다. 터키는 즉각적으로 응했다.

1950년 7월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 터키는 미국과 영연방국가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1950년 10월 17일 터키 1여단 5400여 명 병력이 여단장 타신 야스지 준장의 지휘 아래 부산항으로 들어왔다. 희생자도 미군, 영국군 다음으로 컸다.

전쟁 기간 동안 한국에 파병된 터키군은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총 파병 병력은 최소 1만5000여 명에서 2만여 명에 이른다. 공식 기록으로 전사상자는 총 3064명(용인 터키군 전적비 기록)이며 그 중 전사자는 800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후 1957년 3월 한국과 터키는 공식 수교했다. 터키 여단이 첫 번째 치른 전투는 청천강 방어전이었다. 휴전협정 이후에는 터키군은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식현리에 주둔했다. 주력부대는 1954년 6월 철수했다. 잔여부대는 1개 중대였다. 휴전선 경비 임무를 수행한 터키군 1개 중대는 1966년 7월 6일 완전 철수하게 되었다. 

청천강 군우리 전투에서 패한 유엔군은 1951년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적에게 내줬다. 밀리던 유엔군이 재정비하고 반격에 나선 작전명은 ‘선더볼트 작전’이다.

바로 이 선더볼트 작전에서 터키군은 진가를 발휘했다. 중공군에 밀리던 유엔군이 다시 반격에 나섰다. 바로 선더볼트 작전(1951.1.25.~ 1951.2.20.)이다. 선더볼트 작전에서 터키 여단은 청천강 군우리에서 패배를 설욕하게 된다.

용인 탈환 작전은 터키 여단과 미군 1기병사단이 주축이 됐다. 흔히 김량장동전투(김량장리전투)라고 하면서 터키군이 참전한 전투라고 언론에 많이 인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내용이다. 터키 1여단은 김장량동전투와는 관계없다.

용인은 선더볼트 작전 당시 미군 25사단과 미 1기병사단의 경계선 지역에 속했다. 터키 여단은 미 25사단에 배속되어 지금의 영통에서 신갈을 지나 분당으로 이어지는 공격 루트를 담당했다.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축선이다. 그리고 미 1기병사단은 용인 구시가지인 김량장동지역을 거쳐 국도 45번도로를 따라 경기도 광주까지 이르는 반격 루트를 담당했다. 터키 여단이 전공을 세운 전투는 151고지 전투로서 현재 신갈저수지 인근 보라동 일대 지역이다. 터키 여단이 소속된 미군 25사단 앞에는 중공군 49사단과 150사단 1개 연대가 포진하고 있었다.

1951년 5월 25일 반격 명령이 터키 여단에 하달되었다. 터키 여단의 1차 공격 목표는 신갈저수지 인근 151고지 점령이었다. 터키 여단에는 3개의 보병대대가 있었다. 군우리 전투에서 3대대는 상부의 명령 없이 후퇴한 불명예가 있었다. 터키 3대대는 군우리에서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공격의 선봉을 자처했다. 

중공군이 굳건한 방어 진지를 펼치고 있는 151고지를 향해 터키군은 총검을 꼽고 돌격했다. 일제히 ‘알라 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나갔다. ‘신은 위대하다’라는 뜻의 알라 후 아크바르는 신갈저수지 인근 각 고지마다 울려퍼졌다. 터키군은 백병전을 펼쳐 중공군 400여 명을 사살하고 신갈 보라동 일대 고지들을 탈환했다. 

이로써 터키 여단은 죽전을 거쳐 지금의 서울 양재동에 이르는 공격 루트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자 용인 구시가지 김량장동 일대에 있던 중공군의 우측 측면이 무너진 셈이다. 터키군의 과감한 돌파작전으로 미 9군단 예하 1기병사단은 김량장동을 포함한 현재의 용인 구시가지 일대를 보다 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용인 마성 고갯길에 있는 터키군 참전기념비 조형물.


용인에 울려 퍼진 ‘알라 후 아크바르’

평택-오산 라인의 유엔군 전선은 안양-과천 라인으로 북상하고 결국 수도 서울을 탈환하게 된다. 용인 신갈 일대에서 터키 여단의 과감한 돌파는 중공군 방어선을 무너뜨린 효과를 거둔 것이다.

현재의 용인은 바로 터키군이 되찾아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현재 마성 고갯길에는 터키군 참전 기념비가 있다. 그런데 1974년 세워진 이 기념비는 터키군이 승전한 신갈 저수지 일대와는 좀 떨어져 있다.

사실 제자리라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전쟁사를 연구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151고지가 있는 용인 보라동 일대에 터키군 승전 기념비를 다시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북진한 터키 여단은 휴전 때까지 임진강 일대에서 영국 글러세스터 연대와 함께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사실 터키는 영국과는 앙숙 관계였다. 과거 중동지역은 투르크제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영국이 도전해 이집트를 손에 넣고 사우디아라비아를 투르크제국으로부터 이탈시켰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아라비아 로렌스’다. 1차 세계대전 때 터키는 독일과 함께 추축국이었다. 그랬던 영국과 터키가 한국전쟁에서, 그것도 임진강변에서 동맹국이 되어 중공군에 맞서 함께 싸웠던 것이다.

그곳을 영국군은 ‘후크고지 전투’라고 부른다. 용인 151고지 전투와 터키군은 한국전쟁에서 그렇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100만 대도시 용인의 역사성과 터키와의 관계를 보더라도 151고지 전투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출처 : 미래한국 Weekly (https://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6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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