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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잘못이라고 일방적으로 비판되는 사건들에 대해....

  작성자: 백선엽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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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08-18 19: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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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쟁중에 국군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 방송했다, 국민을 버리고 피신갔다, 한강다리 폭파

 

■ 우선 국군이 이기고 있다고 방송했다

 

군은 국민들의 동요를 막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6.25가 발발한 이튿날 대국민 방송을 하게 됩니다. 6.25발발 당일에는 정보 부족으로 인해 이 전쟁이 그동안 38선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발생하던 국지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파죽지세로 내려오는 북괴군에 의해 각 전선이 무너지고 국군은 후퇴를 하는 와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서울을 쉽사리 내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던 것같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 서울 사수방송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군의 예상과는 달리 철저한 준비를 한 북괴군은 불과 개전 나흘째 되는 28일 서울에 입성하게 됩니다.

 

대국민 방송 내용은 대략 "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라는 내용으로 27일까지 반복 방송이 됩니다. 이승만 박사는 이미 27일 새벽 3시에 대구를 향해 경무대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송이 계속되었으므로 국민들은 안심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서 90일을 지냈던 시민들로부터 국민을 기만했다는 비난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때 군의 대국민 방송은 육군본부 정훈국에서 담당했는데 당시 육본 정훈국장이었던 이선근씨에 의해 국민과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울을 사수한다는 초기 녹음을 계속 틀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이 증언은 이선근씨가 경희대 대학원장으로 있을 당시인 1969년 경희대 정치학 석사과정 강의 도중에 나왔으며,  자신으로 인해 "어른이 욕잡수시게 해 드린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합니다. 이때 석사과정 강의를 듣던 수강생은 3명으로, 그 중 한 분은 타계하시고 이인수 박사님과, 또 다른 한분으로는 당시 부산 남성여자중고등학교 이사장이었던 김근재씨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27일 새벽 서울을 떠나 대전에 임시관저를 마련한 이박사는 무초대사로부터 유엔안보리의 결정과 미국의 적극 개입방침 설명을 듣고는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한 대국민 위무방송을 27일 밤 10시에 하기로 하고 서울중앙방송국과 전화로 연결하여 방송 내용을 녹음합니다.  이 방송은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울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군기 · 군물을 날라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다" 는 요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이박사는 유엔의 개입과 미군의 개입을 국민에게 빨리 알려 우방이 우리를 도우러 오므로 절망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보내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방송이 가까스로 끝난 것은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일 당번 아나운서는 이 대통령의 담화 방송이 끝나기도 전에 이 대통령의 담화 디스크를 걸어 놓은 채 11시경 방송국을 나왔기 때문에 이 내용은 반복 방송이 되면서 결국 28일 새벽 2시가 되기 전  북괴 정규군에 앞서 들어온 사복의 무장 편의공작대가 방송국을 점령을 할때까지 방송이 지속되게 된 것입니다.

 

국민을 버리고 피신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 30분 서울역에서 피난 열차를 타게 되지요.

이미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인민군은 6월 28일 11시 30분 서울 점령을 선언했습니다. 개전 초기에 대국민 위무방송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이 심각하게 피난을 생각하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 전략적으로 군통수권자는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 원칙입니다. 다만 국민들은 오보 방송으로 인해 정부와 군을 믿고 피난을 생각지 못했는데 정부는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으로 인해 정부를 비난하게 되었지요.

 

만일 그 당시 대통령이 피신을 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렀다면 다음날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생포되거나 살해당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국군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지만 변변한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한국군 1사단은 인민군 6사단의 개성 기습 공격으로 전방 연대가 전멸되었고, 7사단은 포천 측선의 인민군 3사단과 동두천 측선의 인민군 4사단의 저지에 실패하여 의정부를 내주게 되었고, 다급한 마음에 준비되지 못한 후방 2사단을 통한 무리한 역습 투입으로 측차 투입된 2사단마저 공중 분해되어 서울 사수에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뿐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든 나라에 전란이나 변고가 발생하면 군통수권자와 정부, 군 수뇌부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여 전투를 지휘하게 됩니다. 이는 전술전략적으로 옳은 결정입니다. 만일 이 때 군 수뇌부 혹은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적에게 사로잡히거나 사살된다면 이미 그 전쟁은 끝난 전쟁이 됩니다. 그러므로 초기의 정부 대응이 미숙하여 혼선이 벌어졌지만 이를 두고 대통령이 국민을 버리고 피신간 것이라는 비난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대통령이 피신을 가지 않고 그대로 서울에 상주하여 서울 시민들과 같이 죽음을 맞거나 생포되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대통령이 서울시민과 같이 서울에 머물다 인민군에게 잡혔다면 국민들은 대통령이 서울시민과 생사를 함께 했다고 칭송했을까요? 그 다음은 생각만 해도 어떤 비난이 난무했을지 끔찍하네요.

 

대통령의 피난과 관련한 증언입니다. '27일 새벽 1시경 조병옥과 이기붕 서울시장이 경무대로 뛰어들어와 "각하! 사태가 여간 급박하지 않습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하며 피신을 권유했다. 이승만은 이 말을 듣고 "날보고 서울을 버리고 떠나란 말인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며 단호히 거절했다. 설득은 프란체스카가 맡았다. 1시간 이상을 설득한 끝에 이승만이 전용승용차에 오른 것은 새벽 3시반경이다. 수행원은 비서 황규면, 경무대경찰서장 김장흥, 경호경찰관 4명등 모두 6명이었다.'

 

친북좌파들의 논리에 말려들지 마세요. 저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건국 대통령을 헐뜯기 위해 한개의 사건만을 놓고 비난을 하지만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만 놓고 명쾌하게 이것이 옳고 저것은 그르다 할 수 있는 사안이 되지 못합니다. 여러 조건들과 상황들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울 시민들에게 적절한 대피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잘못과 초기 정보 부재로 인한 정부 정책의 실책과 군의 작전 미스에 대해서까지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 수립한 지 불과 1년 10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정부수립 후에는 제주폭동, 14연대 반란사건,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는 빨치산, 더욱 중요한 것은 창군은 되었으나 변변한 무기도 없었고, 제대로 된 대규모 작전 훈련도 받지 못했던 군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사고문단으로부터는 국내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소규모 군사훈련만 받았지요.

 

이 시기의 국군의 무장상태는 오히려 경찰보다도 더 열악했습니다. 게다가 군내 불순세력 숙청작업을 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일부 불순세력들이 있었구요.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놓고 본다면 비록 정부수립은 했지만 우리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만한 군대도, 장비도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항간의 진보학자라는 자들은 정부와 군의 무능 즉 이승만 대통령이 무능하다고 헐뜯고 있지만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다른 누가 집권을 했더라면 그 혼란기를 아무런 실책없이 잘 넘겼을까요? 비록 초기에는 우왕좌왕하면 실책을 범했으나 결국 이승만 정권은 북한 김일성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단정론으로 남북분단이 고착화 되었다고 비난하면서 6.25는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하면서 6.25발발시 초기 대응이 미숙했다고 비난하는 자들의 모순이 여기서 적나라하게 들어납니다. 이승만 대통령을 격하시키고 폄훼하여 대한민국을 부정하고픈 자들이 6.25전쟁 발발 초기의 대응 미숙에 대해 비난하다니 자가당착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한강다리 폭파

 

이 부분에 관해서는 김영이 군사평론가의 글로 대체합니다.

한강다리 폭파는 전술전략적으로는 맞는 작전이었지만, 그 시기가 너무 일렀다는 실책을 면할 수는 없겠습니다.

너무 조급하게 폭파하는 바람에 서울 시민들은 물론이고 국군과 장비들을 서울에 고스란히 남겨둘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만은 알았으면 합니다. 어떤 군사 전략가라 할지라도 100% 완벽한 전술전략만을 구사하여 전쟁을 이끌지는 못한다는 사실을요. 뛰어난 용장이며 지략가 일지라도 인간인 이상 실수는 있게 마련이죠. 개전 초기 막강한 미군도 얼마나 많은 전략전술상의 실수를 했는지를 보시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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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
28일 새벽 北 전차 서울 돈암동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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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시작된 지 사흘째인 6월27일 전세가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이 위협받게 됐다. 이날 새벽 대통령이 특별 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떠났고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군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창동 방어선에 가용한 전력을 집중시켰으나 이 방어선이 붕괴되자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포기하기로 하고 27일 11시 긴급 회의를 열어 육군본부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상의 교량을 폭파하기로 결정한다.

폭파 시기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로 잡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수도경비사령관 이종찬 대령은 서울 시민의 피난 조치도 강구하지 않은 채 군부가 먼저 철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특히 서울 시민과 서울 북쪽에서 전투 중인 국군의 유일한 퇴로인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육군본부는 철수를 개시,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로 이동했다. 그리고 공병감 주도 하에 임무를 받은 각 폭파조들은 27일 12시부터 오후 3시30분 사이에 한강 인도교와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에 폭파 장치를 완료했다.

바로 그날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이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 곧 한국 전선에 전방지휘소(ADCOM)를 설치한다는 소식과 함께 육군본부를 서울로 복귀시킬 것을 권고해 왔다.

이에 따라 채총참모장은 육본을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키고 한강교 폭파를 연기한 다음 미아리와 회기동을 연결하는 선에서 서울을 사수키로 하고 한강상의 각 교량에 설치했던 폭발물도 일부 제거, 차량과 열차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조치했다. 그리고 한강교 폭파 지휘 계통도 총참모장 - 참모부장(김백일 대령) - 공병감 - 공병학교장으로 확정했다.

그러나 미아리 방어선에서 공방전이 전개될 무렵인 27일 밤 11시30분에 다시 폭파 준비 명령이 하달됐고 한밤중인 28일 1시45분을 전후해 돈암동에 북한군 전차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총참모장은 공병감에게 지체 없이 한강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월28일 2시30분에 한강교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절단됐다. 그로부터 1시간30분 뒤에 광진교도 폭파됐다. 그러나 경인선 상행 철교와 경부선 철교는 일부만 손상시켰을 뿐 불발로 끝났다.

이로 인해 당시 한강교를 건너던 500~800명에 이르는 인원과 차량 50여 대가 피해를 입었으며 서울 지역에 투입됐던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가 차단돼 차량 1318대를 비롯한 중장비와 공용화기들을 한강 이북에 유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하게 됐다.

또 국군의 주력 4만여 명의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한강교의 조기 파괴로 피난 기회를 상실한 많은 시민은 적 치하에서 엄청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기실 북한군 전차가 한강대교 북단에 출현한 것은 교량이 폭파된 지 7시간 반이 지난 28일 오전 10시쯤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폭파 시기를 적확히 선택하지 못한 군 지휘부의 조치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이다.

한강교의 조기 폭파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 데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자 군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뒤늦게 폭파 관계자들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이 재판에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하고 1950년 9월21일 부산 교외에서 형이 집행됐다.

그러나 최대령의 사형이 집행된 지 14년 후인 64년, 유족인 부인이 제기한 항소심에서 그의 조치는 상관 명령에 복종한 것이라고 판단, 무죄가 선고됐다.

<김영이 군사평론가>

 

2. 정부수립이후 여러번의 정치 파동을 일으켜 영구집권을 꾀했다

 

일명 부산 정치파동을 불리는 1952년의 발체개헌과 1954년의 일명 사사오입개헌에 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한 사건만을 놓고 그 행위 자체를 분석하여 비판하기는 쉽지요. 그러나 그 당시의 국내 상황과 국제상황,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살펴봐야 합니다.

 

제헌헌법은 대통령 중심제나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는 간선제 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완전한 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직선제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우선 정부 수립이 급하므로 정부를 수립한 후 헌법은 적당한 시기에 고치면 된다고 생각하고 정부수립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제헌과정에서 한민당은 강력하게 내각책임제를 주장했으나 이박사에 의해 대통령중심제로 결정되었고 대통령 선출권은 의회가 장악하게 된 것입니다. 한민당은 내각제 구상을 통해 전 국민적 지지를 받는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국무총리가 실권을 가진 후 자신들의 정책을 펼치는 이른바 이박사를 무력화시키려 했던 세력이었습니다.

 

실제로 농지개혁 당시 한민당은 지주중심 농지개혁 방안을 주장했으나 이승만 박사는 이를 좌절시킵니다. 그 후로도 한민당을 비롯한 국회는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며, 반이승만 박사 투쟁을 전개하여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1949년 2월10일 한민당이 중심이 되고 대한국민당의 일부(신익희)와 대동청년단(지청천)이 참가하는 형태로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내각제로의 개헌운동을 펼칩니다.

 

김운태교수는 "해방후 한국을 지배하던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여운형의) 건국동맹도 아니고 (김구의) 한국독립당도 아닌 한국민주당이었으니 이것은 국내혁명세력도 아니고 해외혁명세력도 아닌 바로 일제시 이래의 국내토착세력이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이승만과 김구로 대표되는) 해외혁명세력을 업고 국내혁명세력을 타도하였으며 다음에는 이대통령을 업고 림정을 타도하였다. 그리고는 최종으로 완전고립된 이대통령마저 제거하려던 단계에서 이대통령의 비상한 투쟁으로 초기 한민당세력이 둘로 분열하여 하나는 자유당이 되었고 하나는 민국당으로 되었다. " 고 언급합니다. 여기서 비상한 투쟁이란  전 한민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야당인 민국당의 1950년의 내각제 개헌기도를 좌절시킨 것을 말합니다.

 

건국의 아버지로서 초당주의 내지는 무당주의를 표방해온 이승만 박사는 한민당에 대해서는 철저히 견제했으나 국회와의 관계, 인재부족 등으로 인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인물을 쓸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원내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민국당은 49년 봄이 되면서 12부중 7개부처를 장악했습니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실의 실권까지 장악해 사실상 남한 최대의 권력그룹 으로 부상했지요. 이 무렵의 상황을 김운태교수는 "민국당은 자당본위의 정책주장이 실패할 시에는 그 실책의 주인을 정부수반에 돌렸으며 반이대통령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표현했습니다. 이 때부터 야당을 비롯해 미국의 일부 언론들은 이승만을 독재자 로 부르기 시작했고 이런 상황 하에서 1950년 1월27일 내각제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국회심의과정에서 국회 사상 최초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등 격렬한 분위기 속에서 3월14일 표결이 진행돼 출석의원 1백79명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로 민국당의 내각제 개헌기도는 과반수 미달로 실패했습니다. 이런 국내적 상황들과 미국과의 관계에 의해 일명 부산정치파동으로 이어집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이틀 후인 30일 이승만 박사는 비밀리에 한국군의 38선 돌파 명령을 내림으로써 소련을 비롯한 북한의 야욕을 견제하되 과잉행동으로 제3차대전을 유발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트루먼의 세계전략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여 다시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됩니다. 그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하게 된 유엔군과 미국측은 휴전을 생각합니다. 이때 이승만 박사는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필요하다면 UN군에서 탙퇴하여 독자적 군작전을 수행하겠다며 강력한 휴전반대 운동을 전개합니다. 미국으로서는 매우 못마땅한 상황이 전개된 것이죠.

 

이 부분은 이한우의 '거대한 생애 90년 리승만'에서 인용합니다.

 

'전모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이승만과 미국의 대립 이라는 구도에서 보아야 한다. 시간적으로도 52년 5-6월 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되고 최소한 1년 이상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많은 측면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그 대립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재선을 생각한 이승만과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차제에 미국에 대해 고분고분한 지도자 로 교체하려는 미국이 정면으로 대결한 것이다.

당시 미국이 이승만을 거추장스러워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의 휴전반대 였다.

미국은 실제로 에버레디 작전 이라 해서 이승만 제거작전을 수립해두기까지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재선구상을 하면서 가장 큰 걸림돌로 생각한 것은 국회 내의 민국당이나 야당세력이 아니라 미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민국당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UN군 산하에 있는 한국군 고위장성들을 통해 얼마든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

 

이때 이미 미군을 등에 업은 군부의 쿠테타 조짐도 포착됩니다. 결국 이때의 군부 쿠테타 모의 세력들이 5.16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이 됩니다. 미국은 여러 차례에 걸쳐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수립해 놓고 있었지요. 심지어는 이박사를 감금하고 유엔군정을 펼치는 구상도 했었지만 전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는 이박사를 제거할 수 없었고, 또 당시 이박사와 같이 국민을 일치단결시켜 전쟁을 이끌어 갈만한 마땅한 지도자도 없었기 때문에 미국의 계획은 좌절되고, 결국은 이박사의 의도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조건하에 휴전이 성립되게 됩니다.

 

반면 국회내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박사를 몰아내고 자신들의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미국의 비호와 암묵아래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했지만 실패했고, 당시 대통령 선출권은 국회에 있으므로 이박사는 출마한다 하더라도 대통령으로 선출되지 않을 것이 뻔한 상황이었지요. 그러므로 이박사는 직접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는 생각에 제헌 당시 유보했던 대통령 선출권을 국민이 행사하는 직접선거 방식으로 개헌을 시도하게 된 것이지요. 전쟁중인 장수는 말을 갈아타지 않는다는 말도 있듯이 당시 한창 전쟁 와중인 1952년도에 민국당을 위주로 한 야당의원들은 국익보다는 자신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이승만 박사를 내몰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미국도 남북전쟁 당시 링컨이 초헌법적이며 위헌적인 조치를 취해 정적들로부터 독재자라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오늘날 미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멀리도 말고 1940년 3선 대통령으로 선출된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도 있습니다. 위기의 정국에는 때론 초헌법적인 조치가 취해지기도 했던 것이 오랜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있었던 사실입니다. 국가가 없으면 헌법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므로 위기상황에는 헌법수호만을 고집한 것이 아니라 초헌법적인 조치를 취해 국가의 위기 상황을 먼저 종료시켰던 것입니다. 국가의 위기 상황이 무엇입니까? 바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상황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습니다. 그 자신도 자신이 벌여 놓은 경제정책을 자신이 달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3선 개헌과, 그 후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이나 똑같은 정치적 행보를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지 이승만 대통령만 독재자라고 비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친북좌파들의 함정이 있으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박정희 정권의 과도 상당히 크게 작용합니다.


사사오입개헌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안보에 대한 걱정은 일부 해결했으나 아직 일본과의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사실 이박사는 정계 은퇴를 구상하고 있었지만 이박사가 아니면 자유당의 재집권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자유당에서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박사의 출마를 종용했고 초대대통령에 한해 종신집권제를 열어 놓았습니다. 또한 이박사 입장에서는 대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번 더 연임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대해 36억불의 보상을 청구했습니다. 우리가 일제 36년을 겪었으므로 그것이 결코 많은 금액이 아니라고 했죠. 그동안 우리 국민이 겪은 고초와 국내 자원의 방출, 그리고 우리 국민을 전쟁터로 총알받이로 내몰아 수많은 목숨을 잃게 한 것 등에 비하면 그것도 작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일본의 국력이 아직 그마만한 금액을 지불할 만큼의 능력이 되지 않았고, 또한 너무 빨리 일본과 관계 정상화를 할 경우 아직 우리 국민들 사이에 잔존하고 있는 식민지 백성의 근성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여 완급을 조절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박사만큼 반일정신이 투철한 분도 많지 않았지만. 특히 일본이 제일 두려워하고 껄끄러워 했던 존재가 이박사였기 때문에 그들도 함부로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래서 이박사는 대일 관계에서 우리가 최대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한 후 청구권을 행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명' 이승만 라인' 즉 '평화선'이 선포되기도 했죠. 그러므로 이승만 박사가 권력욕에 사로잡혀 영구집권을 획책했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80을 넘긴 고령에 전쟁을 겪으며 노쇠해졌고, 주위의 <인의 장막>으로 인해 국민 여론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비록 이승만 대통령은 모르는 상태에서 저질저 졌다하더라도 전쟁기간 중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는 이미 자유당을 완전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과 더불어 민심이반이 왔던 것이죠.

 

3. 315 선거에서 조직적인 부정을 저질렀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의거로 말미암아 이승만 박사의 모든 업적이 묻히게 되는 불행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정황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4대 정 · 부통령 선거가 바로 3.15선거였는데 당시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박사,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씨가 출마합니다. 그리고 야당인 민주당은 조병옥씨가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지만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떠난 조병옥씨는 미국에서 타계하고 맙니다. 결국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 단일 후보로 선거 결과에 관계 없이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입장에서는 부정선거를 치를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문제는 부통령에 출마한 이기붕씨였습니다.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장면씨와의 대결에 자신이 없게된 것이지요.

이때의 부통령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대통령 유고시 대통령직을 대신할 직책이었고, 또 이승만 박사가 고령인 관계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부통령은 반드시 자유당에서 당선시켜야 자유당의 정권이 유지될 수 있는 절대절명의 선거였죠.

 

이에 자유당에서는 이기붕씨를 당선시키기 위해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의 지휘 아래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합니다.

그러나 이미 경무대 비서진에도 이기붕씨 측근이 들어와 정보를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박사는 철저하게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입니다. 그래서 민심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이박사는 3.15부정선거 개입은 물론이고 부정선거 획책여부도 몰랐습니다. 몰랐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지요. 비록 수하들이 저질렀다 하더라도 당시 국가 최고 통치권자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년간의 세계대전보다 더 끔찍한 전화를 겪고 난 이박사는 더욱 노쇠해 졌고, 카리스마의 상실로 이러한 불행한 사태가 발생한 것으로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구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스스로 하야함으로써 더 이상의 유혈사태를 막고 헌정을 중단시키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3.15부정선거 사건을 접한 후 이승만 박사의 입장은 前 한국해광개발 사장이었던 이원순씨가 1965년 집필한 '인간 이승만'에서 관련 부분을 발췌해 올려드립니다. (397-373)조금 길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자유당 정권 말기 국무회의는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에 각각 열렸다. 화요일의 국무회의는 이승만 주재로 경무대에서, 금요일의 국무회의는 수석국무위원의 주재로 중앙청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수석위원은 외무장관이었으나 궐석이었으므로 서열에 따라 내무장관 홍진기가 주재했다. 4.19의 1주일 전인 12일 화요일, 마산사건이 터진 이후였으므로 국내 정세가 소란한 가운데 국무회의가 경무대에서 열렸다.

 

오전 9시 이승만은 경무대 북쪽에 위치한 소회의실로 들어왔다. 그는 대개 애견 해피와 스카티를 동반하지만 국무회의에만은 애견을 동반치 않는 것이 상례였다. 소회의실에는 책상도 없이 의자만 놓인 채 내무장관 홍진기를 비롯하여 전 각료와 유창준 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보통 날은 지난 주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보고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장관들의 보고가 있곤 했다.

 

그런데 이날은 상례를 깨뜨리고 이승만이 말을 먼저 꺼냈다. 표정은 아주 굳고 금방 짜증을 낼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의 첫마디는 반문(反問)에 가까운 것이었다.

 

「마산사건은 정부가 무엇을 잘못해서 일어났다는 말이 있고, 또 오늘까지 진정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보고가 없어? 선거관계에서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어.」

 

이에 대해 홍내무장관이 답변에 나섰다.

「어제 마산에서 일어난 데모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직 모르나 피살된 학생의 눈에서 총탄이 나왔으며, 행방불명이 3명이나 되고, 도립병원에서 시체를 해부하고 원인을 조사중인데 왜 시체를 버렸느냐고 900명 가량의 군중이 서장을 나오라고 데모를 했습니다. 그래서 경찰에서 공포를 쏘았습니다 … . 총포를 사용하지 말라 지시했더니 경관의 피해가 많다 합니다. 선거와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는 야당이 직접 나서지 않고 있으나 선동하면 오열이 편승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사진을 찍고 있고 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진상을 조사하겠습니다.」

 

「맨처음 무슨 이유로 아이들이 일어났는가?」

 

대통령은 전혀 모르고 있는 형편이어서 근본 원인을 무척 알고 싶어했다. 문교장관 최재유가 답변했다.

「학생이 대구에서도 데모를 했습니다. 배후가 있어 아이들을 내세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들이 경고를 하며 못 나가도록 막고, 배후관계를 밝히고자 담화문을 내었습니다. 학교에서 어디까지나 자치적으로 단속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시종 굳은 표정으로 노기를 띠고 말하였다.

「마산 · 대구에서 하는 일이 누가 하는 운동이며 누가 책임을 질것이며 더 구체적으로 그 원인을 알았으면, 그것을 정당 싸움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자 홍내무가 대답했다.

「까닭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이번 선거를 잘못해서 생긴 것이냐? 선거를 잘못해서 된 것이냐? 내가 좀더 알고 싶어 … .」

 

대통령은 핵심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자꾸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었다. 홍내무는 설명을 계속했다.

「야당에서 선거결과에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평은 데모로 호소할 것이 아니고 대법원에 호소하여 판결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선거무효 소송 등을 할 수 있는데, 극한 투쟁을 모파가 주장하고 있습니다. 선동 증거는 없으나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오열이 시민을 사주하는 것 같은데 불응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약간 데모가 있었으나 시민이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대비는 있어야 하겠으나 민주주의 발전과정에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야당의 지지는 늘고 있지 않고 군 · 경 · 관이 이에 동조하지 않고 있으니 데모는 염려 마십시오.」

 

모든 형편이 되어 가는 것을 보니 정치할 수 없는 사람들이야. 그 문화나 그 자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서양사람들과 다른 것은 의지가 없는 까닭이야. 나부터 모든 것이 기가 막히고 또한 기가 막힌 소리들 뿐이야. 어느 정당을 막론하고 정당이라는 것이 속에 악심(惡心)만 가지고 해서는 부서지고 말아. 이대로 두면 악습이 더 심할 것이야. 임자들 가지고 민주주의 해 나갈 수 없어. 또 더 나은 생각이 없을 거야. 내 얘기가 과도한 말이면 책망해 주시오. 싸움만 하는 불안정한 정국이니 무관심해도 그것이 그것이 아니야. 필리핀의 예를 다 봐도 무슨 정당, 무슨 정당 다 버리고 다시 해보자고 하고 싶은 생각이 있으나 생명을 결단내는데 어디 견디겠어?」

 

4월 15일 금요일엔 홍내무 주재로 중앙청 국무회의가 다시 열렸다. 회의는 사소한 심의에 앞서 상황보고가 있었다. 그 다음에 착잡한 심정으로 최치환 공보가 긴급동의를 냈다.

 

「의장, 3.15선거 결과를 두고 만 한 달,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정선거라 해서 전국 각처에서 데모가 일어나는데 위로는 대통령의 귀를 가리고 또 국민에게는 책임을 지지 않는 이 내각이 그 무슨 면목으로 역사 앞에 대하겠습니까? 나는 여기에서 세세한 토론을 하지 않고 즉각 내각이 총사직할 것을 정식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마침내 4월 19일 화요일을 맞아 예정대로 오전 9시 경무대 소회의실에서 이승만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도 예를 깨뜨리고 이승만이 먼저 발언하였는데 그의 표정이 매우 엄숙했다.

 

「오늘은 내가 이거 무슨 난중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이 날더러 나가라고 하는 것 같어. 좋게 내주려고 해. 내가 알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무슨 까닭인지, 여러분이 생각해 봐. 뭣인지 까닭을 알아야 해결할 것이 아니야? 급한 때일수록 속에 있는 얘기나 들은 대로의 얘기를 해봐야 해, 우리가 알아야 돼, 학생이나 사인이나 공인이나를 막론하고 다같이 할 얘기는 터놓고 해봐야 해.」

 

이 말에 홍내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각하, 모든 것은 선거기관에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제 고대가 데모를 했고 의사당 앞에서도 1,500명이 데모를 했습니다. 슬로건은 <3.15부정선거를 다시 하자.>는 것입니다. 법에 의하지 않고 야당에서 선동하고 있습니다. 부정선거 여부는 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리면 됩니다. 야당이 학생이나 그 당원에게 진정하도록 호소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마산사건은 미대사관측에서 불순분자가 조종했다고도 하는데 우리 군경은 뭣을 하고 있는 거냐?」

 

여기에 대한 답변은 아무도 없었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에 다시 홍내무가 입을 열었다.

「오늘 몇 대학에서 또 데모를 한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뭣이(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찾아내야 한다!」

이승만은 노기서린 어조로 말했다. 이야말로 부정선거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정식답변이었다.

 

「선거 때문에 국민들 속에 불평이 퍼져 있습니다.」홍내무의 말에 그는 소리쳤다.

 

「백성들이 서울이나 지방에서 선거 잘못했다고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 . 중간에 뭣이 있는 거야? 하루라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이야. 사람들의 생각이 격렬해 가고 있는 것이 걱정스러운 데 덮어놓고 결단 내려고 하는 얘기가 바야흐로 있다지?」

 

「죄송합니다, 각하. 학생들에게 호소해서 진정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국민 없는 학생이 어디 있겠습니까?」최문교의 말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국무원에서도 뭣을 작성해서 해야지, 그대로 있을 것이오? 우리 사람들이 마산사건이 처음이지?」

 

「네, 모든 사건의 발단이 마산사건이고 또 그 원인이 부정선거라는 것입니다.」

 

「부정선거가 뭐야? 내가 말라고 하면 그들도 정당한 그 뭣을 가지고 얘기할 것 아니요?」

 

이 말에 홍내부가 말했다.

「선거는 다시 못합니다. 선거무효 판결로써만 다시 선거할 수 있습니다. 민심이 가라앉아야 하는데, 그 방안은 정부가 자유당을 쇄신하는 것이라야 새로운 인상을 줍니다.」

 

「나는 생각이 안 난다. 이런 자리는 처음 보아. 표가 많으니 보통 사람들이 잘 된 것으로 볼 것이야. 그러면 그 다음에 한 일이 뭣이야? 야당이 세력이 있어요? 잘 돼 가는 것이요? 여러분과 일 같이 못해.」

 

송인상 재무장관이 나섰다.

「일이 잘 되어 나가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좀 복잡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번에 이승만이 소리를 질렀다.

 

「그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야!」

 

송재무가 이어 말하였다.「극렬한 사람이 소수이긴 하나 방법이 졸렬합니다.」이에 곽의영 체신장관이 말했다.

「자유당과 야당이 협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모는 즉시 그치고 정치적인 문제이니 협상을 해야겠어요. 자유당 아닌 사람이 지방에 가서 진정시키는 강연을 하게 하고, 또 공약에 내세운 항목은 우리가 단행하기로 하여 시국을 수습해야 하겠습니다.」

 

이승만은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아무말 없이 앉아 있던 김일환 교통장관이 입을 열었다.

「큰일이 있으면 난동이 나기 쉽습니다. 야당도, 자유당도, 국무원도 개편돼야 할 것이라고 당내에서 떠들고 있습니다. 국회의장 자리가 비는 데다가 국무원도 법무 · 외무자리도 비어 있습니다. 선거 당시의 국무위원과 당무위원을 바꿔야 한다고 여론이 강력히 대두되고 더구나 공석이 많아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승만은 듣기만 햇다.

이근직 농림장관도 말햇다.

「자유당내에도 불평이 많습니다. 자유당과 정부는 개편을 해야 합니다.」

 

그제야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없는 얘기를 더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어. 사람은 마음이 정돈된 뒤에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는 법이야. 모든 것이 이래 가지고서야 나라의 장래가 암담해.」

 

이런 말이 오고간 뒤 10시 경에 각 보고가 있었으나 이승만은 들은 체 만 체했다.

10시 40분 경에 회의를 끝내고 일어설 때에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것을 결론지어 말하였다.

 

「여러분이 짐작하지만 정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그 분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냥 두어서는 안 돼, 심상히 두어서는 안 되며 결단을 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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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est 쿠비즈 2012-08-18 추천 2

    전쟁중 국군이 이기고 있으니 서울을 지키라고 서울사람들에게 말 할 수 있다. 이승만을 그것과 관련하여 비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선무방송이 아니라 그걸 믿고 피난 안떠난 사람들을 서울 수복후 마구 보복했다는거다. 적극적 부역자들의 처벌은 당연한 거지만 생존을 위해 빨 갱 이들 명령을 따른 시민들을 부역자 취급했다는게 가장 큰 문제라는 거야. 자신들이 저지른 실책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의 실책때문에 빨 갱 이들에게 남겨져 고생한 사람을 마구 학대했다는거지.

  • 백선엽장군 2012-08-19 추천 0

    애초에 한홍구(종북 사관을 가진 학자의 자료를 참고하려니 참 기분이 그렇네요.)의 책에서도 이기붕이가 그 사건 해결에 앞장섰다고 나오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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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선엽장군 2012-08-19 추천 0

    국민 방위군 사건은 처벌이 제대로 됐다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 당사자들 전부다 총살형에 처해졌구만... 그리고 은폐된 사실을 잘만 알고 있군요.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에게 들어갔다는 증거를 대면 될일입니다. kifv2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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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유아비 2012-08-19 추천 0

    이승만이나 김구나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경제발전은 못했을 꺼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타고난 능력 밖이죠..투사들은 경제관념이 별로 없어요..이승만은 외교. 김구선생은 항일무력투쟁.. 박통이 좀 특이한 사람이죠..이순신장군이 특이한 사람이듯이..(전쟁보다, 경제적인 면에서..명량해전에서 이긴 후의 6개월은 거의 경이 그 자체..) ..어쨋건 박통도 이승만도,김구선생도 모두 자기할 일 열심히 다 하고 간 사람이고 위대한 양반들입니다. 위대한 사람들도 인간이지..하나님은 아니라고 생각해요..그럼 벌써 여긴 천국이게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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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fv2 2012-08-19 추천 0

    근거를 되라니 반갑군요 ㅎㅎㅎ 보통 이쯤에서 빨갱이나 외국인으로 몰고가는게 이슈토론방인데 ㅎㅎ

    그때 빨리 덮어서 제대로 들어난게 없지만 증언은 많습니다.. 1974년 2월 25일자 동아일보 보면 국회모정파에 1억원들어갔다는 증언했다는게 나오죠. 기타 여러가지 내용이 있습니다..

    근데 참 이기붕 잘했다는것이 왜 쏙빼먹은거죠? 그리고 제가 열거한거만 국민방위군, 6.25전쟁 준비부족,안두희처리 등등을 열거했는데.. 국민방위군 본질이 아닌 정치자금 근거를 들어달라는것은 또 먼가요.. 아주 지엽적인 문제인데..

    국민방위군사권에 대해서 하는 말이 당시 인력이 열악했기 &#46468;문? 그럼 이승만 본인은 부정부패 척결이나 깨끗할려고 얼마나 노력했다고 봅니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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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선엽장군 2012-08-18 추천 0

    국민방위군 사건에서 정치금 건좀 증거를 대 주시죠? 이기붕이가 국민 방위군 사건 잘 처리해서 이후 잘나간 건 설명 쏙 빼놓고..말했잖아요..대한민국 정부는 건국된지 얼마 안돼서 혼란스러웠다고...일제 강점기 때 진짜 고위직 올라간 조선인 얼마나 될까요? 공무원 사회에선 사무관보다 이사관이 더 양성하기 힘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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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fv2 2012-08-18 추천 1

    그리고 최악의 사건은 국민방위군사건입니다.. 군이 9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었습니다.. 군량미 착복해서 정치자금으로 쓰다가요.. 이것은 전쟁중에 일입니다.. 이것도 군장교나 국방부장관만의 잘못입니까? 부정선거를 한 이기붕이와 국방부장관은 누가 임명한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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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fv2 2012-08-18 추천 0

    이승만이 안두희에 연관없다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후처리만 바도 사주했을 가능성이 매우크죠.. 어떻게 김구선생 암살범이 2년만에 장교로 복귀하고.. 계급도 소위에서 대위로 진급합니까?
    거기다가 복권까지... 이런 식의 일처리가 말이 됩니까? 국민장으로 처리를 하고도 그 암살범을 저렇게 처리하는 것보면 참 양심없다고 생각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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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당224 2012-08-18 추천 1

    kifv2 님에 의견에 공감하면서 이승만이의 업&#51257;을 아무리 나열하여도 감구선생을 암살하는데 직.간접적인 도의적 책임을 면치 못할것이며 이사건만으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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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fv2 2012-08-18 추천 0

    박정희 대통령은 누가 바도 엄청난 업적이 있습니다.경제성장이죠.. 새마을운동과 국가개발5개년계획을 통한 국민에게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제일 큰 문제였던 경제성장을 이루어낸거죠.,, 정치적으론 문제가 있으나 제가 바도 공이 과보단 훨씬 컷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승만대통령은 아닙니다.. 그당시 만연한 부정부패와 6.25전쟁의 실책... 그리고 부정선거...
    국민에게 비전도 못보여주었죠.. 이승만 정부도 박정희 대통령만큼 했으면 경제성장 훨씬 빠르게 되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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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ifv2 2012-08-18 추천 2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한국전쟁당시 한국이 무방비였다는 겁니다.. 김종필이 경고 했다죠.. 근데 무시하고 국방부장관은 점심은 평양에 먹겠다고 말했죠.. 부정부패는 만연&#54720;지만 연락기 하나 정부돈으로 사지못해 국민성금으로 샀습니다... 탱크하나도 없이 북한 이긴다고 장담했죠.. 북한이 무엇을 준비하는지도 모르면서 북한의 침략으로 3일만에 서울 빼앗긴것은 누가바도 큰 실책입니다.. 미군의 지원이 없었으면 우리가 공산주의사회가 될뻔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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