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사자성어로 읽는 mil story> 김윤후의 화살 한 발에… 몽골 살리타이 ‘불귀의 객’

  작성자: 오홍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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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6-10 14:50:55

22 백발백중과 처인성 전투


百 中 百 發
일백 백, 가운데 중, 일백 백, 필 발 
백 번 쏘아 백 번 맞힌다


고려 승장 김윤후 처인성 언덕 매복
방어 상황 정찰 나선 살리타이 저격
수장 잃은 몽골군 결국 이듬해 철수

승장 김윤후가 쏜 화살은 몽골군 1만여 명을 격퇴하고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필자 제공(일러스트 한가영)

승장 김윤후가 쏜 화살은 몽골군 1만여 명을 격퇴하고 고려를 위기에서 구해냈다. 필자 제공(일러스트 한가영)

망종(芒種) 지난 용인 처인성터 맞은편 살장터(殺將터·몽골 살리타이를 죽인 장소) 논에서는 모심기가 한창이다.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앉아 땀을 식히며 역사 흔적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풀벌레 우는 소리 멎고 함성과 창 부딪치는 소리 들려온다. 오랜 세월 전에 화살 한 발로 몽골 일만 대군을 물리친 곳이다.

명사수 백기의 오발(誤發·빗나감)

기원전 281년 진(秦)나라 명장 백기는 위(魏)나라 수도 대량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웃 주나라는 어찌할 줄 몰랐다. 대량 정벌 뒤 그 기세를 이어 낙읍을 공격할 것이 뻔했다. 주나라는 진·위나라 중간에 낀 소국으로 국방력은 미약했다. 진나라 공격을 막을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소려가 외교 특사로 가서 백기를 만났다. 그는 백기에게 초나라 명사수 양유기 이야기를 꺼냈다.

“양유기는 백 보 밖 버들잎을 쏘아서 꿰뚫을 수 있다(去柳葉者百步而射之·거유엽자백보이사지). 백 발 화살을 쏘아 단 한 발도 빗나가지 않는 백발백중(百發百中) 명사수다. 이런 그에게 누군가 제대로 쉬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휴식 부족으로 피로가 쌓이면 실수로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할 수 있다. 그러면 명사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그동안 쌓아온 명성도 모두 물거품이 된다’는 것이었다.”

소려는 계속해서 “잠시 쉬면서 유사시를 대비해 힘을 비축하지 않으면, 연이은 정복 전쟁으로 장병들이 피곤해지고 실수도 범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진 소양왕에게 병을 핑계로 출병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백기는 위나라 공격을 계속했다. 진나라 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백기는 소려의 말이 옳았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백기의 지나친 정복욕으로 활이 기울고 화살이 휘어졌다(弓撥矢鉤·궁발시구). 『전국책(戰國策)』의 ‘서주책(西周策)’에 나온다.

몽골, 고려를 넘보다

13세기 세계 정복자 몽골 살리타이도 고려를 얕보다 일격을 당했다. 몽골 정복 대상이 서역에서 동아시아로 돌려졌다. 불행하게도 고려가 첫 제물이 됐다. 1231년 8월 몽골군 살리타이가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군은 압록강에서 개경에 이르는 요충지를 연하여 축차적 방어를 펼쳤다. 귀주성에서 4개월에 걸친 항쟁은 완강했고 몽골군은 발목이 잡혀 공격을 일단 멈췄다.

다음 해 고려 무신정권은 몽골의 거듭된 핍박에 강화도 천도와 결사항전을 결정했다. 그러자 살리타이는 기병 1만여 명으로 다시 침공했다. 2차 침략은 고려군과 접촉을 회피하며 신속한 기동전을 전개했다. 몽골군은 4개 제대로 분산했다. 제1군은 개경 포위, 제2군과 제3군은 강화도 정면 공격에 투입됐다. 살리타이는 직접 제4군을 이끌고 용인 방향으로 진출했다.

이때 승장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용인시청에서 남쪽으로 321번 도로를 따라 야트막한 싸리재 고개를 넘으면 넓은 평지가 나온다. 11㎞ 지점 도로 옆에 처인성 터가 있다. 조선시대 지도책 『輿地圖書·여지도서』에 의하면 처인성은 흙으로 쌓은(土築·토축) 군창(軍倉·식량 창고)이었다. 이곳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으로 유사시 사용할 식량과 물자를 보관한 병참기지였다.



단 한 발 화살, 살리타이 저격

살리타이는 제4군 주력을 김포 방향으로 보내 강화도를 압박했다. 자신은 일부 병력만으로 용인 남쪽으로 향했다. 이때 처인성에서는 인근 각 고을 피난민과 승병들이 급편방어 중이었다. 12월 16일 살리타이는 처인성 동북방 완장고개 일대에 500여 기 병력을 분산하고 공격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소수 정찰병과 함께 처인성 방어상황을 살펴보러 정찰에 나섰다. 승장 김윤후는 처인성 동문 밖 건너편 언덕에 저격병 수십 명과 함께 매복했다. 적이 가까이 접근하자 단 한 발 화살로 살리타이를 저격했다. 몽골군 잔류 병력은 처인성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승병과 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용인 북쪽으로 달아났다.

살리타이가 갑자기 전사하자 몽골군 사기는 완전히 떨어졌다. 고려군은 강화도와 개경 일대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몽골군 부지휘관 테케는 포로로 잡힌 고려 백성들을 송환하고 강화를 요청했다. 그들은 다음 해 1월 철수를 개시했다. 거침없이 내달리던 몽골군 말발굽 소리가 멈췄다.

1231년 이후 태어난 고려 백성은 비참한 운명이었다. 1281년 일본원정까지 무려 50년 동안 항몽전쟁과 일본원정에 시달렸다. 왕은 강화도에서 39년을 갇혀 있었다. 지도층은 무능했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오히려 권력 다툼으로 서로 칼을 겨눴다. 그때 백성들은 무자비한 살육을 당했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할아버지는 처인성에서 몽골군을 격퇴했으나 할머니는 몽골군에 포로로 끌려가 모진 수모를 겪었다. 아버지는 여·몽 연합군으로 일본원정에 두 번이나 노를 저어야 했다. 손자들은 80년 동안 몽골 속국으로 머리카락을 땋아 늘인 변발로 지내야 했다. 고려 땅에 발을 딛고 몽골인으로 살아야 했다. 몽골을 저격한 화살 한 발은 백발 사격훈련 결과다. 전방위 안보 위협 과녁을 향한 일발필중(一發必中) 훈련에 매진하자.
<오홍국 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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