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전쟁과 인간> 이념도 풀지 못한 상호 불신…‘공존과 반목’ 지속

  작성자: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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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4-08 10:46:45

오월동주(吳越同舟), 중국·베트남의 갈등

 
지배와 저항 기나긴 역사적 배경
공산주의 국가 간 무력 충돌 불사
냉전 이후 빗장 풀고 교류 증가
中 ‘굴기 정책’에 다시 갈등 격화

 

베트남 여군 민병대의 모습.  필자 제공

베트남 여군 민병대의 모습. 필자 제공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 (유인선, 창비, 2012)

『베트남과 그 이웃 중국: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 (유인선, 창비, 2012)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중국 천년전쟁』 (오정환, 종문화사, 2017)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중국 천년전쟁』 (오정환, 종문화사, 2017)

포로로 잡힌 중국군 병사들.  필자 제공

포로로 잡힌 중국군 병사들. 필자 제공


중국은 옛날부터 베트남을 ‘안남(安南)’으로 칭하고 자신들의 지배영역으로 간주했지만, 베트남의 왕조들은 중국에 조공을 바치면서도 중국의 간섭이 커질 때마다 끈질기게 맞섰고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유지했다. 중국은 끝내 베트남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었다. 19세기가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중국이 아편전쟁(1840)을 계기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직면하고,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면서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반제국주의 전선의 동반자로 발전했다. 이 관계는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운 태평양전쟁까지 이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트남 북부에 국민당 군대가 들어오자 오랜 세월 중국의 간섭을 받아왔던 베트남인들의 반중의식은 다시 고조됐다. 중국 국민당은 곧바로 이어진 공산당과의 내전으로 베트남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에 곧 군대를 철수시켰다. 중국이 내전 이후 곧바로 한반도의 전쟁에 휘말린 덕분에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프랑스에 맞선 독립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디엔비엔푸 전투(1954)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한 후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과 공산주의 노선을 선택한 북베트남으로 분단되었다.

1965년,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내전에 미국이 개입해 전쟁이 확전되자 중국은 고사포부대와 공병부대를 파견해 북베트남을 지원했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위기에 몰린 북베트남은 외부의 지원이 절실했기에 껄끄러운 중국군의 파병을 거절하지 못했다. 베트남은 중국 외에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중국과의 불화가 불거졌다. 소련은 1968년 ‘구정공세’ 이후 평화회담이 성립되도록 도왔다. 소련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싸우는 북베트남을 돕고 있었지만, 냉전 상황에서 미국과의 갈등이 늘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공산주의 노선 갈등을 빚었고, 두 나라의 국경에서 무력충돌까지 벌어질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외교적으로 고립된 중국은 결국 1972년에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인들은 이러한 중국의 태도를 두고 이웃 나라의 분열을 바라는 중국의 전통적 외교술과 다르지 않다고 파악했다. 1975년,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한 북베트남의 하노이 정부는 이제 중국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어졌다.

베트남은 중국에서 벌어졌던 ‘문화대혁명’과 흡사한 잔혹한 학살극(킬링필드)을 자행한 폴 포트 정권을 축출한다는 명분 아래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했고, 폴 포트 정권은 중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1904~1997)은 베트남을 “오만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고 비난했다.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의 프놈펜을 점령한 지 한 달이 지난 1979년 2월 17일, 중국군은 베트남 북부를 공격했다. 베트남의 주력 부대가 캄보디아에 주둔한 상황이었기에 중국군은 승리를 장담했다.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쟁에 세계는 놀랐다. 미·소 냉전이 첨예한 상황에서 같은 진영 내의 국가들끼리 수십 만의 군대를 동원한 충돌이 벌어진 것은 처음이었다. 중국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 전쟁은 전통적인 중화주의적 세계질서를 추구하는 중국과 이에 맞서는 베트남의 이해가 충돌한 결과였다.

50만이 넘는 군대를 동원한 중국군에 맞선 베트남의 정규군은 불과 2개 사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베트남에는 오랜 전쟁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은 민병대가 있었다. 베트남의 민병대는 베트남 전쟁 때 노획한 미군의 무기를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펼쳤고, 중국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중국군의 인해전술은 산악지형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중국군은 국경도시 란손을 점령했으나 캄보디아에 배치된 베트남 정규군 일부가 전투 지역에 합류하기 시작하자 전쟁을 오래 끌수록 불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군은 베트남의 국경 도시들을 점령하는 전략적인 목표를 달성했다고 선언하고 철군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인들은 침략군을 그대로 보내지 않았다. 베트남군은 철군하는 중국군의 후미를 강타했고, 중국군은 철도와 공업시설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1979년 3월 16일, 두 국가의 짧은 전쟁은 끝났지만, 1991년까지 국경 지역에서 산발적인 충돌이 이어졌다.

냉전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이 빗장을 풀고 경제발전을 꾀하면서 중국과 베트남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중국이 팽창주의에 근거한 ‘굴기 정책’을 시행하면서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는 다시 갈등이 시작되고 있다. 중국이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 군도’의 일부가 중국 영토임을 주장하자 베트남은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임을 강조하면서 반발하고 나섰다. 스프래틀리 군도는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된 지역이면서 필리핀,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중국, 베트남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지역이다. 또 소련이 베트남에 설치했던 캄란만의 해군기지가 반환(2002)되자, 2010년 베트남의 응우옌 떤 중 총리는 캄란만을 개방할 것임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중국은 이곳에 미군 함대가 드나들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긴장하면서 베트남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현재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교류를 확대하고 우의를 다짐하면서도 서로를 불신한다. 2009년 4월 베트남 정부가 서부 고원지대의 보크사이트 광산 개발권을 중국 회사에 허가해주자 베트남의 전쟁영웅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은 정부에 반대 서한을 전달했다. 과거의 호찌민 역시 “중국군은 베트남에 올 때마다 천 년 동안 머물렀다”고 언급하면서 중국을 경계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사이가 나쁜 사람끼리 같은 장소나 처지에 함께 놓이거나, 서로 반목하면서도 공통의 곤란이나 이해에 대해서는 협력함을 비유한다. 두 국가의 공존과 갈등의 역사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 고사성어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와 중국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10408/1/BBSMSTR_00000010010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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