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모로코… 프랑스 식민 지배, 구한말 한반도 상황과 닮은꼴

  작성자: 신종태
조회: 769 추천: 0 글자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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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4-08 10:45:54

<13> 모로코 ②
카사블랑카 시내 역사갤러리 풍자화
20세기 초 국제정치적 상황 보여줘
‘선진문화’ 식민지 인식은 사뭇 달라


프랑스의 모로코 식민 지배는 1912년부터 1956년까지 무려 44년간 이어졌다. 프랑스가 건립한 카사블랑카 천주교 대성당. 필자 제공

프랑스의 모로코 식민 지배는 1912년부터 1956년까지 무려 44년간 이어졌다. 프랑스가 건립한 카사블랑카 천주교 대성당. 필자 제공


모로코는 이베리아반도의 스페인에서 해협 건너 빤히 눈으로도 보이는 가까운 나라다. 수천 년 동안 유럽 문물은 모로코를 통해 아프리카로 들어왔다. 해양과 대륙 세력 사이에 끼어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흡사하다. 특히 1900년대 초 주변 강대국들의 모로코 영유권 쟁탈전은 구한말 청·러·일이 한반도를 두고 격돌했던 과거 역사와 너무나 비슷했다.


4개 외국어 유창하게 구사하는 모로코 대학생

택시 기사는 역사갤러리로 가기 전, 지나가는 젊은 여성에게 다시 한번 위치를 확인했다. 몇 마디 주고받던 그녀는 자신도 그 방향으로 간다며 합승 양해를 구한다. 모로코에서 택시 합승은 불법이 아니다. 라바트(Rabat)대학에 다니는 살마(Salma)는 부모님이 계시는 카사블랑카에 왔단다. 한국인임을 밝히니 자신도 틈틈이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단다. 그녀는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아랍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고 했다. 모로코 공식 언어는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지만 행정문서는 프랑스어로 작성된다. 어려서부터 프랑스어와 아랍어를 배우며, 상류층 자제들은 영어·스페인어를 추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살마의 외국어 실력에 감탄하자 4개 국어 능력을 갖춘 모로코인들이 흔하다며 겸손해한다. 한국어까지 터득한 후 서울에 오라는 덕담에 전화 번호를 적어주며 여행 중 어려움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란다. 젊은 대학생의 예상치 않은 친절에 ‘소매치기’ ‘바가지요금’ 등 모로코 여행 전 들었던 온갖 부정적인 정보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유럽 강대국들의 모로코 영유권 쟁탈을 묘사한 풍자화. 욕조 내 모로코인을 유럽인들이 프랑스산 비누로 강제로 목욕시키고 있다.  필자 제공

유럽 강대국들의 모로코 영유권 쟁탈을 묘사한 풍자화. 욕조 내 모로코인을 유럽인들이 프랑스산 비누로 강제로 목욕시키고 있다. 필자 제공


역사 풍자화가 보여주는 약소국의 서러움

카사블랑카 역사갤러리는 시내 주택가에 있었다. 3층 건물로 외부에 2∼3개의 깃발만 있어 외국인들이 찾아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출토 도자기 및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림·기록 사진으로 모로코 근현대 역사를 일부 소개했다. 역사 전시물 중 1장의 풍자화가 20세기 초 모로코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즉 ‘모로코’ 팻말을 목에 건 흑인을 욕조에 억지로 집어넣어 목욕을 강요하는 그림이다. 주변에는 프랑스·스페인·독일·영국인들이 온갖 감언이설로 겁에 질린 모로코인을 꼬드기고 있다. 특히 사용하는 백색 비누는 현재도 유명한 프랑스산 조개껍질 상표 제품이다. 이 비누는 ‘미개하고 더러운 모로코를 발전시킨다는 빌미로 자국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프랑스 책략을 풍자한 것이다. 흡사 20세기 초 일본이 대한제국에 강요한 을사늑약·강제병합의 역사와 판박이였다.


모로코 지배를 위한 강대국들의 갈등

1830년 알제리를 식민지화한 프랑스는 1900년부터 서부의 모로코를 탐내어 점령을 시도했다. 이슬람교도들의 격렬한 반발에 1902년 7월 20일, 카사블랑카에 프랑스함대는 함포사격까지 퍼부었다. 이에 독일이 반발하면서 양국 간 긴장이 조성됐다. 1911년 프랑스가 모로코 내륙도시를 점령하자, 독일은 해군 함대를 파견하여 양국은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까지 치달았다. 먹거리를 두고 으르렁거리는 동물의 세계와 다름없는 살벌한 국제사회의 민낯이다. 결국 ‘프랑스는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하되, 독일은 콩고 주요 지역을 지배한다’라는 나눠먹기식 외교협상으로 타결됐다. 1905년 미·일 간의 ‘카스라 태프트 밀약’으로 필리핀과 조선의 운명이 결정된 것과 유사하다. 이 사건으로 영국은 프랑스보다 독일을 더 큰 위협으로 판단하여 영·프 동맹을 강화하고 독일을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변환했다.

드디어 1912년 3월 30일, ‘페스(Fes) 조약’으로 프랑스는 모로코의 국방·외교·치안권을 장악했고, 스페인 역시 북부 해안과 남부 일부의 영유권을 확보했다. 모로코는 갈기갈기 찢겼고 프랑스는 자국민의 대규모 이주와 서구식 문화를 확산시켰다. 1930년대 거센 독립운동에 프랑스는 산악지역 베르베르인과 도시권 아랍인과의 반목을 조장하여 모로코인들을 분열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왕 모하메드(Mohammed) 5세는 해외망명지에서 독립을 선언했고, 결국 1956년 모로코왕국은 프랑스·스페인 지배를 벗어나 재탄생했다.


스페인·프랑스와 투쟁 ‘리프전쟁(Rif War)’

‘리프(Rif)’는 스페인에서 마주 보는 모로코 북부 산악지대다. 16세기 이래 스페인은 지브롤터 해협의 대안 항구도시 ‘세우타’와 ‘멜리야’를 확보하고 베르베르(Berber)인 리프족과 분쟁을 겪어왔다. 스페인·프랑스와 리프 공화국 간의 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북아프리카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규모가 큰 전쟁이다. 1920년 리프족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2만 명의 스페인군이 출동했지만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대패했다. 반면 리프군은 8만 명의 대병력으로 성장하여 프랑스령 모로코까지 진출했다. 대결 상태를 유지해온 스페인·프랑스였지만 공동 위협에 대응하여 30만의 양국 원정군이 결성됐다. 첨단 무기인 탱크·전투기가 동원되었지만, 리프군의 저항은 끈질겼다. 이에 원정군은 무자비하게 겨자 독가스까지 사용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 본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던 이 전쟁은 1926년 5월 26일, 리프군이 프랑스군에게 항복하면서 끝났다. 하지만 모로코는 선조들의 피 어린 전쟁사를 전해주는 국립역사박물관 한 곳 갖추지 않았다. 개인갤러리에서 겨우 그 역사의 일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인과 다른 모로코인 식민지 지배 인식

프랑스의 모로코 식민 지배는 1912년부터 1956년까지 무려 44년간 이어졌다. 시내에서 프랑스식 옛 건물들을 쉽게 볼 수 있고 웅장한 천주교 성당도 관광명소로 소개된다. 또한, 한국인의 일본 식민지에 대한 역사 인식과 모로코인의 프랑스 식민지 인식은 사뭇 다르다. 그들에게 프랑스는 척박한 땅 모로코에 선진문화를 심어준 존재라는 의식도 일부 가진 듯했다.

카사블랑카 항구에는 수백 년 전통의 유럽풍 유명식당들이 즐비하다. 옛 성곽 일부를 개조한 음식점 안 곳곳에 붙어 있는 18·19세기 건물 사진들이 유명세를 더한다. 사진 속 간판에는 이미 큼직한 프랑스어 식당 명칭이 붙어 있다. 저렴한 가격에 풍성한 상차림은 가성비까지 최고다. 넘치는 물질의 풍요를 마음껏 즐기자는 분위기는 한국이나 모로코 모두 똑같았다.

<신종태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 저자>



https://kookbang.dema.mil.kr/newsWeb/20210408/1/BBSMSTR_000000100142/view.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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