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월 윌리엄스 영국 국방장관은 유럽연합탈퇴(Brexit) 이후 군사전략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2021년경 실전 배치되는 6만5000톤급 정규항모 ‘퀸 엘리자베스’를 태평양의 분쟁 수역에 파견하겠다고 밝혔다. 9월에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를 통해 영국 항모의 아시아·태평양지역 배치계획이 보도되자 중국은 “적대행위가 될 수 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러한 결정은 수년 전부터 예고된 사안이었다.

2016년 10월 20일에 미국 해군참모총장, 영국 해군 제1경(First Sea Lord), 일본 해상자위대 막료장이 펜타곤에 모여 최초로 3국 해군협력협정(Trilateral Cooperation Agreement)을 체결했다. 공해 상 항행의 자유를 보장하고 공동이익을 위해 협력을 증진한다는 내용으로 구체적인 대상과 목표지역을 명시하지는 않았다.

2018년 8월에 영국 해군 함정이 최초로 난사군도 분쟁 수역을 항행했다. 중국의 항의에 영국 해군 대변인은 국제법에 따라 항행한 것이라고 밝혔다. 2018년 12월에는 영국 해군의 Type23 프리깃 아르길(Argyll)이 영국 해군 함정으로선 최초로 서태평양에서 미국·일본의 함정·항공기들과 합동 대잠수함전 훈련을 했다.

올해 3월에는 동급의 몬트로스(Montrose)가 동일한 훈련을 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20일에 ‘퀸 엘리자베스’ 함상에서 3국의 해군 수장들이 모여 두 번째 해군협력협정에 서명했다. 동 협정문은 ‘인도·태평양 지역 내 다양한 도전 및 항행의 자유 방해행위에 대한 공동대응’을 명시함으로써 중국의 세력 확대에 대한 견제 의도를 명백히 밝혔다. 최근 몇 년간 영국이 취한 일련의 행보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연상케 하는 영국식 아시아 회귀라고 명명할 수 있다.

영국 해군은 4만5000톤급 구형 항모 아크로열(Ark Royal)이 1979년 퇴역한 이후 40여 년 지속된 정규항모 공백 시기를 마감했다. 2017년 12월에 취역한 ‘퀸 엘리자베스’는 2021년 실전 배치를 목표로 F-35B의 작전능력을 시험 중이다. 영국은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을 수행하면서 정규항모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시 만재배수량 2만 톤의 인빈서블(Invincible)급 경항모로 구성된 영국의 원정함대는 빈약한 조기경보 능력과 부족한 항공자산으로 인해 지상작전 지원 및 함대공 임무에 큰 제한을 받았다. 전쟁 초기에는 영국의 항모전단이 아르헨티나의 항모로부터 공습을 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걸프 전쟁 및 코소보 전쟁을 통해 항모가 고강도 전쟁에서 저강도 분쟁 및 인도주의 작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전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적합하다는 점이 확인됨에 따라 1998년 발간된 국방개혁안을 통해 2척의 정규항모 건조를 결정했다.

항모는 영국과 영연방 국민에게 대영제국의 영광을 환기(喚起)하고 자부심을 심어주며 연대를 강화하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며 핵보유를 공인받은 국가로서 국제사회에서의 무게감도 더할 수 있다. 그러나 함재기 가격을 제외하고도 척당 31억 파운드(약 4조5000억 원)에 이르는 정규항모를 건조한 배경에는 ‘현시효과(display effect)’ 외에 ‘해외 영토 및 자산 보호’라는 실질적인 의무가 자리 잡고 있다. 국가안보전략서(NSS)와 전략적 방위 및 안보검토서(SDSR)는 안정된 세계형성과 해외에서의 국익보호를 방위목표로 명시하고 있다.

영국은 버뮤다 제도 등 16곳의 해외 영토를 보유하고 있는데, 그중 지중해의 지브롤터와 인도양의 차고스 제도는 대체할 수 없는 군사적 가치를 지닌 요충지(choke point)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영국 기업들의 자산은 글로벌 경제의 핵심요소인 에너지와 금융 분야에 집중돼 있다. 2018년 매출액 기준 세계 8위 기업인 BP 등 에너지 회사들은 북해와 중동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90위 기업인 HSBC 홀딩스를 비롯한 금융기관들은 런던과 홍콩이 주 활동무대다.

중국 기업들은 국내 금융제약으로 인해 주로 홍콩에 있는 영국계 금융기관들을 통해 해외자금을 유치하거나 투자를 한다. 세계적인 방위산업체 BAE 시스템즈가 498위를 기록한 사실과 비교하면 이들 기업의 활동범위와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영국이 운용하는 금융자산과 인프라는 파운드화가 달러화 및 유로화와 더불어 기축통화의 하나로 인정받게 만드는 요인이다.

최근 홍콩 사태는 영국에 미묘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1997년 영국과 중국이 서명한 일국양제는 2047년까지 유효하다. 영국은 협정의 당사자로서 중국에 홍콩의 일국양제 준수를 강요할 의무가 있다. 중동과 아시아에서 기존 질서를 변경하려는 수정주의 시도는 영국이 정착시켜 놓은 해외자산들의 활동을 위협한다. 미국의 군사력에 편승했던 과거와 달리 정규항모를 보유함으로써 독자적인 보호능력을 제고하게 됐다.

영국은 19세기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유럽 열강 중 맹주로 군림했으나,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패권에 가려져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지역에 남겨놓은 흔적들은 언제든 개입과 관여의 명분으로 활용된다.

영국은 아시아에서 식민지를 청산한 이후 1971년에 호주·뉴질랜드·싱가포르·말레이시아와 5개국 방위협정(FPDA)을 맺었다. 각 국가에 대한 무력공격이나 위협 발생 시 회원국들은 즉시 협의하고 대응방안을 강구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5개국의 방위수장들은 매년 회동해 지역 정세를 논의하고 협력방안을 만들어 내며 합동훈련을 실시한다. 영국은 이 협정에 근거해 싱가포르 셈바왕(Sembawang)에 해군 함정 수리 및 보급기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1월 18일 일본 도쿄 인근 지바현에서 세계 최대 규모의 방산전시회인 DSEI가 개최됐다. 영국 국방부 주관으로 런던 인근에서 격년제로 개최하던 행사를 올해부터는 일본에서도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영국의 정규항모 전단이 아시아 지역에 배치될 때 우리는 과거 영일동맹을 연상할 정도로 일본과 밀접하게 공조하는 영국의 모습을 목도하게 되리라 예상한다.

■ 무관노트

英-日 군사협력 강도 높아질 듯

역사의 흔적들은 선택과 해석의 대상이 되면서 후손들의 정책 방향과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884구의 영국군 전사자는 우리나라와 영국 간 우호관계를 받쳐주는 흔적이다.

20세기 초에 맺어진 1차 및 2차 영일동맹은 양국이 서로 싸웠던 2차 대전의 아픈 기억을 희석하고 우호관계를 강화해주는 흔적들이다. ‘퀸 엘리자베스’가 아시아에 배치되면 영국과 일본의 군사협력은 매우 높은 수준까지 격상될 것이다.

일본은 2024년경 F-35B를 도입해 이즈모급에 탑재할 예정이므로 영국으로부터 F-35B를 운용하는 지식과 경험을 사전에 습득해야 한다. 또한, 정규항모 보유가 금지된 일본에 영국 항모는 이즈모급의 제한된 능력을 보완하는 선택지가 될 수 있다. 영국은 ‘퀸 엘리자베스’를 호위하며 공동작전을 펼칠 함정들이 필요하다. 만성적인 함정 척수 부족에 시달리는 영국에 일본과의 군사협력은 매력적이다.

일본은 차세대 스텔스전투기 F-3개발에 영국 BAE 시스템즈를 사업파트너로 고려하고 있다. 미국의 방위비 분담 압박에 대한 불편한 심기와 F-2개발 시 기술이전을 제한했던 불편한 기억이 작용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과 일본은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 참여를 공식화한 국가들이다.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은 취하면서도 군사적 의도는 제어하려는 목적을 공유하고 있다. 미국이 동맹국에 대해 방위비 분담을 압박하고 선택적 개입주의로 전환해 가는 시기에 영국 항모의 아시아 배치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사건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