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대한제국의 군인들> 일본군·밀정 들끓는 점령지 잠입…사활 건 병력 모집
작성자 : 김선덕(218.152.xxx.xxx)
입력 2024-06-11 09: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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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군인들 - 48. 광복군 창설 주역 조성환과 황학수 

중일전쟁 이후 중국 이주 조선인 급증
1939년 중 시안 지역서 청년 포섭 활동
이듬해 총사령부 설치 단위부대 편성
군무부장 조성환·사령관 대리 황학수
1945년 8월 정예 병력 500~600명으로
대한민국 국군 창군에도 200명쯤 참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대원들(1940. 12. 26). 군무부장 조성환(맨 앞줄 가운데)과 총사령관 대리 황학수(맨 앞줄 왼쪽 넷째)가 참석했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수도인 쓰촨(四川)성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거행됐다. 총사령관은 52세의 지청천, 참모장은 40세의 이범석이었다. 

이보다 3년여 전인 1937년 7월 16일 임시정부가 군무부 내에 군사위원회를 발족했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지 9일 후였다. 군사위원회는 중일전쟁에 대응해 임시정부의 군사정책 및 활동을 전반적으로 다뤘다.

1939년 10월 1일 임시정부가 군사특파단을 조직했다. 특파단 주임위원에는 군사위원회 책임자이며 군무부장을 맡고 있던 조성환이 임명됐다. 위원에 임명된 황학수, 나태섭, 이준식 등도 군사위원회 위원이었다. 임시정부의 군사정책을 책임지는 군사위원들로 군사특파단을 구성한 것이다.

이들의 임무는 광복군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당시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병력을 모집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충칭 주변에는 조선인 청년들이 없었다.

중일전쟁 이후 중국에는 조선인이 급격히 증가했다. 일본이 점령지에 일본인과 조선인들을 대거 이주시키는 식민정책을 폈기 때문에 상당수의 조선인이 중국으로 이주했다.

1940년을 전후해 중국 화베이(華北) 지역 일대에는 약 20만 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해 병력을 모집하려 한 것이다. 1939년 10월 주임위원 조성환과 위원 황학수를 포함한 대원들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파견됐다. 충칭에서 동북쪽으로 2000여 리 떨어진 곳이었다.


조성환. 사진=독립기념관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1900년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한 대한제국군 참위(소위) 출신이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군무부장(19·21·23대)을 지낸 조성환은 시안으로 갈 당시 64세의 고령이었다.

황학수(黃學秀·1879~1953)는 1898년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한 대한제국군 부위(중위) 출신이었다. 서로군정서 군사부장·신민부 군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으로 경박호전투·동경성전투 등에 참전했다. 황학수도 당시 60세의 고령이었다.

이들이 시안으로 간 이유는 화베이 지역의 중심지인 시안이 병력 모집을 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병력 모집 활동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일본군 점령 지역에 몰래 잠입하는 것부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잠입에 성공한 뒤에는 조선인 청년들을 포섭해야 하는데, 이 또한 위험한 일이었다. 사방에 조선인 밀정이 있어서다. 포섭한 청년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병력을 모집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사령부를 먼저 구성하고 병력이 확보되는 대로 단위부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임시정부의 군사 간부들, 중국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는 조선인들로 광복군 총사령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당시 중국군에는 김홍일, 최용덕 등 70여 명의 조선인 청년이 복무 중이었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출범한 직후인 1940년 10월 9일 임시정부가 헌법 개헌을 단행했다. 국무위원제로 운용됐던 집단지도체제를 단일지도체제인 주석제로 바꾸고, 김구를 주석에 선임한 것이다. 개헌을 단행한 이유는 주석에게 국군통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강력한 영도력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사령부를 시안에 설치했다. 총사령관 지청천과 참모장 이범석은 중국 군사 당국과 업무를 협의하기 위해 충칭에 남고, 총사령부를 시안에 별도로 설치했다. 시안 총사령부는 이미 그곳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있는 군사특파단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이에 따라 군사특파단이 해체되고 단장이었던 조성환은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선임돼 충칭으로 귀환했다. 황학수가 총사령부 사령관 대리에 임명됐고, 단원들은 모두 총사령부 간부가 됐다.

총사령관 대리 황학수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총사령부 산하에 단위부대를 편성하는 일이었다. 황학수는 단위부대 명칭을 지대(支隊)로 정하고, 3개 지대를 편성했다. 중국군 편제에서 지대는 독립여단 규모의 부대였다. 시안에 총사령부가 설치될 당시 광복군 병력은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있는 30여 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광복군 모집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들로 우선 3개 지대를 편성했다. 이들 창설요원을 시작으로 지대 병력을 늘려 나가기로 한 것이다. 중국 윈난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조선혁명군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이준식이 1지대장, 한국독립군 출신 공진원이 2지대장,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조선혁명군 참모장을 지낸 김학규가 3지대장에 임명됐다.

1941년 1월 1개 지대가 증설됐다. 100여 명에 달하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편입해 5지대를 만든 것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나월환을 중심으로 하는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1939년 11월 충칭에서 결성한 무장조직이었다.

이후 각 지대는 본격적으로 광복군 모집에 들어갔다. 산시(山西)·허베이(河北)성을 중심으로 하는 화베이 지역은 물론 북쪽의 네이멍구(內蒙古) 지역부터 남쪽의 안후이(安徽)·장시(江西)·후베이(湖北)·저장(浙江)성 등에 이르기까지 조선인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서 광복군을 모집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에 발각돼 많은 대원이 희생당했다. 하지만 광복군 모집은 광복군의 존립과 직결된 일이었다. 온갖 어려움에도 광복군 모집을 계속한 결과 광복 당시인 1945년 8월엔 잘 훈련된 광복군이 500~600명 규모로 늘어났다.

지금도 아쉬운 점은 특수훈련을 마친 광복군을 한반도에 투입하기 바로 전에 광복이 됐다는 것이다. 조금만 일찍 투입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정말 많이 남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200명가량의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 창군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조성환과 황학수의 노고가 창군으로 이어진 것이다.

조성환과 황학수 두 사람 모두 살아서 광복을 맞이했다. 두 사람은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요인 2진으로 군산을 통해 환국했다. 조성환은 1948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1946년 고향 제천으로 낙향한 황학수는 1953년 74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필자 김선덕은 32년간 국방일보 기자, 국군영화 감독, 국방TV PD로 봉직한 군사연구가. 현재 공군 역사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록 대한민국 국군 70년』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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